
세월은 유수라더니 바로 엊그제 일만 같은데 어느새 십년이 훨씬 넘어버렸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온통 나라안이 민주화 열망으로 후끈 달아오르던 80년대 중반 경 물어물어 석왕사를 찾아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날이 아마 백중이었을 것이다. 당시 석왕사에서는 백중의 의미를 생명해방에 두고, 가장 억압당하고 소외된 계층인 노동자들의 문화잔치를 매년 백중날에 열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전태일 평전>이 필독서였던 시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집회 한번 열 수 없었던 부천지역 노동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절로 모여들었고, 사물놀이패의 꽹과리 소리 징소리와 어우러진 풍자와 해학의 한마당이 절 마당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터져나온 구호들….
이때 뒷전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영담 스님을 처음 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듯한 동그란 눈과 둥근 얼굴이 영락없는 그림속의 동자승을 연상시켜, 스님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쩌면 저렇게 스님이 예쁠까\'하는 생각을 했다. 후에 그분이 석왕사 주지스님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박종철 군 천도재 날의 일은 후에 들은 얘기다..
천도재 날 전국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석왕사로 모여들었고 시위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경찰이 아침부터 석왕사 주변을 에워싸고 절 안으로의 진입을 통제했다. 이에 스님은 \"사찰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책임지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책임 못진다.\"고 통보했으나 절문은 봉쇄되었고, 그날 절 안에 들어오지 못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부천과 서울 곳곳에서 밤늦도록 산발적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서장이 \"석왕사 주지가 데모를 배후조정했다.\'고 하는 말이 들리자 스님은 \"봉쇄 안했으면 대규모 가두시위로까지 발전은 안했을 것이다. 서장은 돌대가리다\"라고 해 결국 서장이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석왕사는 \'부천의 명동성당\'이라는 닉네임을 얻었고, 점차 부천 노동자들의 의지처가 돼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길이었다. 예전 기억을 더듬어, 부천 전철역에서 내려 원미동 가는 2번인가 3번인가 하는 버스를 타고 가다 원미동 어디였더라 정류장 이름은 모르지만 낮은 연립들을 지나 옥수수 무성한 공터가 나오고 그 다음이었던 것 같은데, 정류장 이름만 알면 될 것같아 종무소에 전화로 물었더니 그보다는 소사 전철역에서 택시 타면 기본요금 거리라고 더 편리한 방법을 일러준다.
자기 늙은 것은 생각 못하고 아이들만 컸다고 한다더니, 과거 기억을 더듬어 왔다가는 낭패를 당할 뻔 했다. 과거 낮은 주택들이 올망졸망 있던 일주문 주변은 어느새 고층 아파트가 들어 섰고, .보운산과 석왕사를 잇던 자리에 6차선의 대로가 뚫리면서 뜻하지 않게 대로변 사찰이 돼 있었다. 새로 길이 남으로써 길가에 새로 일주문 불사가 진행중이었다. 절에서 반대운동을 펴 터널을 만들 계획이었다는데 IMF이후 시 예산을 핑계로 지상계획을 강행한 것이라 한다. 길만큼 절땅이 들어가 경내가 예전보다 비좁아졌고, 무엇보다 산과 절이 분리된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 산을 끼고 있어 무척 푸근했는데.
고찰은 아니더라도 오래된 절인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석왕사가 보운산 아래 자리잡은 것은 `76년이란다. 30년도 채 안됐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하게 석왕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만큼 부천지역에 석왕사가 각인돼 있다는 것인지.
이 절의 창건자는 영담 스님의 은사이신 고산스님. 수도권 지역에 절지을 자리를 물색하다, 뒤로는 보운산이 있고 앞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이 자리에-지금 아파트와 주택들이 있는 자리가 당시만 해도 논과 밭이었다- 낙점한 것이다. 또한 부천이라는 지역은 신앙활동이 왕성한 곳으로 신앙촌이 있는가 하면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와 개신교의 신학대학 등이 있지만 불교는 불모지나 다름없다는 점에서도 적격이라 판단했다고 영담 스님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 석왕사는 부천불교의 대명사가 돼 있다. 1대 고산 스님이 신앙이라는 뿌리를 튼튼히 하는데 역점을 두셨다면 `82년 2대 주지가 된 영담 스님은 시대와 지역사회의 아픔과 현안을 끌어안고 함께 해결해 가면서 불교 위상을 확고히 다져왔다고 할 수 있다. 영담 스님이 석왕사 주지로 취임할 당시 스님의 세속 나이는 30대 초반. 그래서 너무 빨리 주지가 된 것 아니냐는 말들도 있었다는데, 스님이 13세에 출가를 하셨으니, 법랍을 따져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어쨌든 젊은 나이에 주지가 된 영담 스님은 \'늙은 불교\'를 지양하고 \'젊은 불교\'를 주창했다. 그래서인지 석왕사에는 항상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활기가 있었다.
젊은 불교를 내세운 영담스님이 벌여온 사업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 가운데서 특히 관심을 보인 대상이 노동자와 어린이.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공단지역인 부천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80년대에는 노동자 야학을 하는가 하면 백중에는 노동자문화잔치를 열었으며, 절을 집회장소로 개방해 데모를 배후조정했다는 둥의 오해를 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백중절 노동자문화잔치는 열리지 않는다. 사회상황이 변한 탓인지 한국인 노동자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에 나서고 있다. 현재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석왕사 옆에 주택을 사 마련해주었으며 그 옆에는 \'미얀마NLD 민족동맹 한국지부\'가 있다.
\"요즘 생산현장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3D업종이라 하여 꺼리고 네팔이나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어요. 여기서는 그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 고의적 임금체불이나 부상 등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면서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지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사가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는 상황이지만, 계속 자행되는 일인 만큼 석왕사의 외국인노동자 권익보호 운동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는 일이었다면 어린이 포교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만들기였다. 불교에서 어린이포교에 눈뜨기 시작한 80년대 초반 석왕사에서는 이미 어린이집을 만들어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았다. 이런 선도적 복지활동이 쌓이고 쌓여 2개의 복지관을 위탁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고, 4개의 어린이집과 유치원, 아기화랑단 등 어린이 포교를 다채롭게 펼치고 있다.
특히 룸비니 특수아동조기교실은 정신지체아들 교육시설로 비싼 교육비 때문에 아이를 맡기기 힘든 중하층의 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이러한 교육시설들이 증세가 굳어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룸비니\'는 치료효과를 볼 수 있는 취학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만큼 어린이 교육에 자신감과 노하우, 여력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디 그뿐인가 \'지방화시대의 민주언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부천시민신문>도 만들었고-IMF이후 사정이 어려워 내일신문과 제휴, \'부천시민내일신문\'으로 나오고 있다-, 생활협동조합도 운영하며 유기농법으로 제공한 우리 농산물을 보급하면서 우리 농촌살리기 운동까지 펼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느 대찰 못지않게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대웅전을 뺀다면 마치 생산현장에 온듯하다. 새로운 공사가 하나 진행되고 있어 스님께 여쭈니 장례식장이란다. 영담스님이 새로이 중점을 두는 사업이다. `94년에 장례식장을 만들었는데, 그동안은 종무소 옆 가건물을 사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일체 거품이 빠진 장례비용과 정성스럽고 깔끔한 뒷처리로 호응을 얻고 있다. 석왕사 장례식장 때문에 부천에 있는 병원 장례식장들이 지금 모두 개조를 서두르고 있다고 하니 그 파장을 알만 하다. 영담스님은\"장례 치뤄주고 인사오는 곳은 석왕사 밖에 없다.\"며 흐믓한 표정을 짓는다.
석왕사에는 108상조회라는 것이 있다. 누구든 죽음이 눈앞에 닥쳐 당황하게 되는데, 상조회에 가입하면 임종부터 매장 또는 납골까지 일체를 책임지고 행해주게 된다.장례식장만이 아니라 납골당도 있어 석왕사 안에 납골을 봉안할 수도 있다.
영담스님은 이제 인간에게 꼭 한 번은 닥치게 되는 죽음을 끌어안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늘 그래왔다. 불교의 사명이라고 판단하면 받아들여 앞서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항상 선구적이다. 스님은 `82년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을 때 이미 학원을 다니며 익혀 종무행정에 적용했으며,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노동자 권익보호에 앞장서 왔고, 어린이 포교에서 장례식장까지 사찰이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절안에 수영장과 장례식장을 둔 사찰은 아마 석왕사 밖에 없을 것이다.
수영장 등을 만드는데는 은사이신 고산 스님의 반대가 있었다. \"절안에 무슨 수영장\"이냐는 것이었다는데, 영담 스님의 고집을 꺽지는 못하신 모양이다.
\"은사 스님은 절불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지요. \"
그러고 보니 석왕사에는 두 가지 분위기가 있다. 대웅전과 부속사들에서 전통과 현대, 신앙과 포교라는 두 날개의 묘한 조화를 연상시킨다. 아니 뿌리와 나무인 듯도 하다. 고산스님이 심어놓으신 신앙의 뿌리를 바탕으로 영담스님의 나무가 왕성하게 커가는 것은 아닐까?
요즘 영담 스님은 종단정치에 개입하면서 이미지가 많이 훼손됐다는 고언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절 일에 소홀해졌다는 우려를 하기고 한다. 종회 총무분과위원장에다 불교방송 상임이사, 부천경실련 공동대표, 불교신문사 사장 등 스님의 명함에만 찍힌 공식 직함 만도 다 헤아리기가 힘들다. 그러나 스님은 명함찍을 때 꼭 빠뜨리지 않는 명칭이 있다, 석왕사 주지. 스님은 다른 일을 핑계로 석왕사의 기도나 재에 빠지는 법이 없다.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 밖에 없지요. 인간 능력의 한계가 있는 것인데. 그래도 내가 몸담고 있는 전체 일에서 석왕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정도라고 할까.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고, 종단정치라는 것이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몸담기는 쉬워도 발을 빼는 것은 쉽지 않아요. 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보고 때가 되면 과감히 정리할 줄 알아야 된다고는 생각하지요. 구질구질한 것은 질색이니까.\"
스님도 세월은 비껴갈 수 없는가 보다. 시간이 스미지 않을 것같던 만년 동자승, 영담 스님의 얼굴에도 미소지을 때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것은 보면. 그래도 미소는 여전히 동자승을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