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교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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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이문
2000년 09월 223호
불교가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불교는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 그림인 동시에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적 세계관을 꼭 집어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다양한 가르침이 다같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이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설 즉 내가 죽으면 다음 세상에 다른 형태로 태어남을 주장한다면 나는 그런 윤회설을 믿을 수 없고 따라서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불교가 이승과는 다른 저승의 존재, 서방정토설, 미륵보살, 약사여래 등을 가르친다면 나는 그런 것들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고, 따라서 나의 세계관은 불교적이 아니다. 부처님 상 앞에서 진심으로 불공을 올리고 어떤 소원성취를 바랄 수 없는 나는 불교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의 세계관을 불교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불교를 기독교의 경우처럼 초월자의 계시에 의존하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구체적 관찰과 논리에 근거를 둔 철학으로 규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종교적 불교와 철학적 불교를 구별하고 후자만이 납득이 가는 세계관이라 믿고 그것을 따라 간다. 나의 세계관이 불교적이라면 철학적 불교의 관점에서만 그러하다. 불교가 인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고, 그가 가르치고자했던 세계관의 핵심이 사성제 四聖諦 팔정도八正道에 집약되어 있다면, 그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일종의 구원 즉 고통으로부터의 인간의 근원적 해방에 있다는 점에서는 종교적이지만 그것이 계시나 맹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과 정밀한 논리적 사고로 뒷받침되었다는 점에서 불교는 종교이기 보다는 철학으로 분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궁극적 문제와 그 문제의 궁극적 해결방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성제 팔정도이다. 사성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라는 네 가지 진리를 뜻하고 팔정도는 네 가지 진리 가운데의 마지막 진리인 도의 구체적 내용이다. 첫째의 진리는 삶의 근본적 조건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둘째의 진리는 그 근본적 원인이 인간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셋째의 진리는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넷째 번 진리는 그 방법의 구체적 내용들이다.
첫째의 진리는 구체적 관찰로서 알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인간이 의식을 갖고 존재하는 한 그는 항상 작고 큰 것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노예나 일반 백성만이 아니라 절대권력을 갖은 진시황이나 도통한 노자나 공자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둘째의 진리는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고통의 의미가 욕망의 불충족인 이상 욕망이 고통의 근본적 그리고 보편적 원인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결론이기 때문이다. 첫째와 둘째는 가장 알기 쉬운 진리이다. 그러나 셋째번 진리와 넷째번 진리는 사정이 다르다. 셋째번 진리는 깊은 사색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전제하기 때문이고, 넷째번 진리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팔정도 즉 여덟 가지 방법을 실증해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가 심오한 사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는 그것이 위와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세계관 즉 불교가 주장하는 위의 네 가지 명제가 정말 진리인가 아닌가의 결정은 그것들에 전제된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옳고 그름에 달려있다. 사성제에 전제된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세계관은 불교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불교적 형이상학의 특징은 무엇이며 어떻게 서술할 수 있는가? 불교적 형이상학은 일원론적이다. 일원론적 형이상학은 현상적으로는 서로 달리 보이는 모든 존재들이 실제로는 서로 다르지 않은, 즉 서로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전체라는 믿음이다. 일원론적 형이상학은 한편으로는 속세와 천당, 감각적 현상과 가시적 실체,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을 양분하는 기독교적, 풀라톤적, 데카르트적인 서양을 지배해 온 이원론적 형이상학과 대조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힌두교나 노장사상과 상통한다. 나는 이러한 일원론은 누구나 사물현상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관찰한다면 부정할 수 없고, 최근의 첨단과학에 의해서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나의 세계관은 불교적이다.
무아無我, 무존無存, 공空,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등과 같은 불교의 핵심적 개념들은 일원론적 형이상학의 다른 표현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는 서로 차별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전체라면, \'나\' 라는 개체는 물론 아무 개체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그런 점에서 모든 개별적인 것은 공空/무無라고 밖에 부를 수 없고, 더 궁극적으로는 현상 즉 색色과 존재의 본질 즉 공空은 서로 구별할 수 없는 존재, 따라서 동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강조 해야할 점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무가 존재의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낱말들이 의도하는 것은 일원론적 존재론의 틀에서는 존재전체는 물론 그것의 한 측면인 그 어떤 것도 언어의 개념적 틀 속에 분류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석할 때 무아, 무존, 공, 색즉시공 공즉시색 등의 의미는 분명하며, 그러한 낱말들이 전달하려는 명제는 옳다고 나는 확신한하며, 존재에 대한 위와 같은 불교적 서술은 일원론적 존재론의 틀 안에서는 논리적으로 불가피하ㅣ다. 이런 점에서 나의 세계관이 불교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불교적 존재론의 특징은 일원론적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순환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순환적 존재론은 모든 것을 역동적으로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현상들도 사실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며 사물현상의 운동과 변화를 환상으로 본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와는 달리 불교의 경우 모든 것이 영원히 정체적이 아니라 역동하며, 우주는 기독교나 헤겔의 세계관에서와는 달리 어떤 시점에서 시작하여 어떤 방향을 향한 목적론적 직선전 진행이 아니라, 니체의 \'영원회기\'의 형이상학의 경우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서로의 고리를 물은 순환적 반복이다. 물질과 정신, 삶과 죽음, 동물과 인간, 개와 뱀, 한 신분과 다른 신분은 인과적 관계에 의해서 순환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순환적 세계관이 옳다고 믿는다.
이러한 순환적 세계관은 불교에서 윤회설輪廻說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나는 윤회설을 믿는가? 윤회설이 불교의 형이상학의 뺄 수 없는 한 기둥을 차지하는만큼, 그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나의 세계관은 불교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윤회설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문제는 불교에서 윤회설이 핵심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설의 내용이 애매한데 있다. 원해 힌두교에서 사용되는 윤회설은 인간의 삶과 죽음의 관계 및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 간의 관계를 설명할 목적으로 고안 된 것으로 불수 있다. 힌두교에서나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윤회설에 의하면 가령 사회적 신분상 하층 계급에 속하는, 가령, \'나\' 라는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육체적 죽임일 뿐 나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한 업적에 따라서 다음 세상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소나 돼지로 다시 태어나거나 아니면 인간사회의 상류계급의 가족으로 태어난다. 불교적 세계관이 이런 윤회설을 전제한다면 나의 세계관은 불교적이 아니다. 첫째는 이런 윤회설은 아무 객관적 근거도 없는 이야기로서 영생, 현재보다는 보다 바람직한 삶에 대한 절실한 인간적 갈망을 상상적으로 채우고자 고안한 픽션이거나, 사회적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 사회가 집단적으로 꾸며낸 거짓말이거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짜낸 이야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러한 윤회설은 불교의 근본적 바탕인 일원론적 존재론과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회설이 자아自我를 포함해서 어떠한 것도 고정된 것이 없이 무한히 다른 형태로 영원함을 뜻한다면 나는 윤회설은 옳다고 믿고 이런 점에서 나의 세계관은 불교적이다. 내가 죽으면 나는 흙으로, 버러지의 양식으로, 변하고, 그것은 다시 풀의 거름이 되다가 어떤 상황에서 현재의 나와 같은 모습이 우주에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세계관은 내가 알기로 가장 지적 그리고 넓은 뜻에서 이성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위와 같은 세계관을 지칭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그러한 진리를 터득함을 뜻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涅槃열바이 이러한 깨달음이 동반하는 완전한 심리적 해방감을 뜻한다면, 나의 실천적 삶이 나의 세계관과 일치하기에는 아직도 한 없이 멀고 따라서 불교적이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세계관만은 불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