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가람은 배 한척이다. 장경각 뒤편에 탑을 세워 배에 실었다. 피안으로 가는 배다. 이 배를 반야용선이라고 한다.
자 갑시다. 배를 타고 서방정토로 가십시다. 이 배에는 또한 81,258장의 고려대장경이 실려있다. 해인사의 스님들은 이 배를 타고, 그리고 밤마다 부처님 말씀을 머리에 이고 잠들며 깨어난다. 나날이 정대불사이다. 이 배가 어찌 장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려대장경이 이운된 배는 조선조 때의 조운선이다. 조운선은 세곡으로 바치던 쌀을 실었던 배이다. 쌀을 실어 나르던 배에 고려대장경을 싣고 왔다. 화려한 용머리 장식도, 차근차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계단도, 배 중간에 장염하게 꾸민 집도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장엄하게 꾸민 그 집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그 집이 없으니 부처님도 없다. 용전의 뱃머리도 없고, 매화도 목단도 국화도 장엄하게 새겨진 연꽃도 없다. 그렇지만 장대도 없이 돛을 높이 세우니 그 배가 바로 진여의 배요, 진여의 세계다.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에는 부처님이 안 계시지만 부처님과 한배를 탄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곧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용머리와 꽃을 새겨 장엄하지 않았지만 이 배가 어찌 장엄하지 않겠는가.
이 배가 어두운 밤바다 파도를 헤쳐갈 때 어찌 두려움이 있었을까. 길 잃을 두려움에 있었을까. 칠흙 같은 밤바다 길을 한점 환한 불빛을 싣고 가는 그 배가 어찌 미망에서 헤매일 것인가
조선 태조실록의 역사기록.
-전라도에서 올라온 조운선, 큰배.
쌀 천 석을 싣고 올라왔던 그 배들은 고려대장경을 싣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어떤 연해안을 따라 내려갔는지 정확한 역사기록은 없다. 해로 이운설도 근거가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하나의 가설이며, 이 가설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은 전라도에서 올라온 배를 왕이 살펴보았다는 것에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강을 따라 이운해 간 가설보다는 조선 초기에는 해로 이운이 훨씬 발달해 있었다. 이 배들은 모두 국가에서 관리하고 운용하던 조운선들이었다. 조선왕조가 정작 조운의 제도를 정비하고 나선 것은 태종 때의 일이다. 그 이전 조선왕조의 조운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전기에는 민간인들의 사선 해상활동이 극히 침체되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 배들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고려대장경을 싣고 갔던 배들은 고려의 조운선과 별로 다르지 않은 조운선 형태의 배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무렵의 조운선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네 곳의 창에 모두 이백열다섯 척이나 있었다. 만일 해로를 따라 내려갔다면 서해 연해안 조창 지역을 따라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조선 전기에는 조운을 오로지 조창 전속의 조운선만이 전담하였기 때문이다. 이 배들은 태안반도 안흥항을 거쳐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 위치한 법성창, 지금의 법성포를 거쳐갔을 것이다. 이 법성창을 따라 오르내리는 서해안의 뱃길은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서해를 이용해 전라도의 생산물을 이어주던 법성창, 그러나 번화했을 법성포는 이제 생업을 위한 고깃배들만이 드나드는 포구로 변해 있다.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는 법성창을 거쳐 여수, 남해, 진주를 거쳐 고령에 이른다. 고령에는 장경나루가 있다. 이 장경나루는 영남내륙 수로교통의 동맥을 이루는 낙동강의 한 지류에 형성된 나루터이다. 이 곳이 해인사에서 가장 가까운 나루터다. 장경나루에서 해인사까지는 약 삼십여 킬로 미터. 이 곳에 고려대장경이 부려졌음은 확실하다. 장경나루. 장경나루는 본해 개경포였다. 대장경이 들어와 포구를 열었다는 개경포.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장경나루, 개경포. 어쨌든 이 곳은 내륙의 강을 이용해 육로로 이운하든지 아니면 해로를 이용한 이운이든지간에 마지막에 이르는 지점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이 곳도 번화했던 나루터는 간 곳이 없다. 빈 배 한 척과 바람만이 세월을 쓸며 출렁일 뿐이다. 고려대장경은 이 장경나루에 부려진 뒤 머리에 이고, 가슴에 품고, 기야산 가랫재를 넘어 해인사에 모셔졌을 것이다. 극락으로, 서방정토로, 피안으로 가는 그 배에 고려대장경은 다시 실렸다. 장대를 돛처럼 높이 세우고, 탑을 돛처럼 높이 세우고 용의 뱃머리를, 극락 장엄된 누각의 집이 세워진, 그 집터 맨 위에 고려대장경은 모셔져 실렸다. 바로 이 배가 해인사의 배이며 부처님 말씀이 실린 이 배를 우리는 법보의 배라고 한다. 법보종찰, 법보의 배, 해인사.
나는 해인사의 전경을 머리에 그리면 언제나 떠오르는 한장의 판화가 있다. 이철수씨의 판화다. 판화의 제목은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다. 그의 글을 옮긴다.
“떠 있는 배 위에 탑이 실려 있습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맞은편에 가볍게 내려 앉았습니다. 배와 물이 살며시 움직였습니다.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
고려대장경은 바로 그 새다. 탑이 실려있는 배 위에 가볍게 내려와 앉은 한 마리의 새. 장경각의 고려대장경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이 새가 생각난다. 새 한마리의 무게로 내려앉아 실려 있는 고려대장경. 이철수 씨의 판화속의 배는 새의 무게와 탑이 균형을 이루어 고해의 바다를 벗어나고 있다. 피안으로, 피안으로. 새는 언제까지 날아갈 줄을 모른채 앉아있다. 까맣게. 그런 고려대장경은 또한 말씀의 숲이다. 그 숲에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외길이다. 그 숲길을 걸어 본 사람만이 외길인지 안다. 그 숲길을 걸으면 무엇인가 반짝거린다. 때론 나뭇잎이 몸 뒤집혀 떨어지며 반짝거림을 보여준다. 가만히 이슬 맺힌 풀섶을 헤치면 솔씨 하나가 웃는다. 그 솔씨 하나에 길이 있다. 그리고 숲이 있다. 그 숲에서, 솔씨 하나에서, 반짝거림에서 우리는 마음을 밝힌다. 내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는 그 외길. 그 숲길을 따라걷는 사람들은 말 없이 침묵하며 간다.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만이 대장경을 구한다.
그 숲에도 새 한마리가 있다.
고려대장경은 하늘이 낸 창문이다. 판화가 이철수 씨가 그려낸 고려대장경은 하늘이 낸 문이다. 왜 하늘이 낸 창문일까. 그의 판화를 보면 창문 하나가 열려 있다. 창문에는 고려대장경 목판 어느 구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 창문은 장경각을 통해 열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마음 하나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엿보이는 대장경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가 하늘에 낸 창문이다. 그는 말한다. 하늘로 낸 창문을 통해서….
어둠을 어둡다고 느끼는 사람들만이 빛을 구한다고 말한다. 고려대장경을 만들었던 고려의 옛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하늘로 난 창문을 내었다고. 빛을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조성한 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이다라고. 그렇다. 그렇다…. 고려대장경은 그저 글씨가 새겨져 있는 목판에 지나지 않는다. 오후의 빛이 조금 새어드는 어두운 장경각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먼저 깨어난 사람들만이 빛을 구하고자 한다. 결코 빛나지도 찬란하지도 않은 먹물 머금은 목판속에서 영원한 지혜의 빛이 빛나고 있다. 그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깃들어 앉아있다. 법보의 배 위에. 나의 잠머리맡에도 얼핏 새 한 마리가 앉는다. 그러나 없다. 없다….
멋붙이는 말
-l398년,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가 떠난 그 해.
해로의 이운 가능성에 대해 왜구의 침입이 잦던 시절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 된다. 그러나 1398년 그 해. 고려대장경이 해인사로 이운되던 해에느 ㄴ왜구의 침입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단 한 건의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단 한번도 없었을리 만무하지만 기록상으로 그 해에는 왜구의 침입이 없었다. 1399년도에는 단 한 차례의 왜구 침입 기록이 나와 있다. 일단 해로 이운 가능성 가운데 왜구의 침입 문제와 의문에 대한 것은 덜어진 셈이다.
왜구는 고려 고종 10년, 1223년 처음 침입한다. 그 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극성을 부렸다. 연해안 일대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강릉을 거쳐 함경도 북청에까지 내륙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고려 멸망을 앞두었던 우왕과 공민왕 때가 왜구의 침입이 극에 달하였다. 많을 때는 이백 척에서 오백 척까지 떼지어 몰려와 양민을 학살하고 세곡을 실은 조운선을 약탈해 갔을 정도였다. 조선 태조때에도 그 횟수가 잦았는데, 1397년에는 여섯 차례, 1396년에는 다섯 차례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