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조선총독부는 각 지역에 산재한 우리의 문화재들을 서울로 옮기어 경복궁의 경회루 동쪽편 넓은 잔디밭에 두 줄로 세워 놓았었다. 이것은 외딴곳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 석조부도, 석비 등 여러 문화재의 도난을 방지하고 또는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은 일본 오오사까까지 반출되었다가 되돌아와 원위치에 가지 못하고 경복궁에 놓여지게 되었고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은 원위치를 모르는 채 불법 반출되어 파고다공원에 옮겨졌다가 경복궁에 왔으며 경천사10층석탑 敬天寺十層石塔은 일본 도오쿄오로 운반되었다가 반환되어 온 것이다. 이밖에도 원위치에서 불법으로 옮겨진 문화재가 한두 점이 아니었는데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모든 석조물들을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야외에 진열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국보,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우리 나라의 불교적인 석조미술을 연구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찾아 각종 조형물을 소상히 살펴보게 된다. 그것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석조물이며 역사적 배경등을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러한 관점에서 서울수복 직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이곳에 가서 석조물 하나하나에 대한 관찰, 실측, 사진촬영을 진행하면서 눈에 익히곤 하였었다.
이렇게 하던 중 흥법사진공대사탑興法寺眞空大師塔(보물 제365호)이 서 있음을 보았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탑에 딸린 석관이 바로 옆에 놓여 있어 주의를 끌게 하였는데 부도와 함께 세워졌을 탑비는 보이지 않아 혹시 원위치를 찾으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 그리고 흥법사 옛절터에 가면 주목할 만한 석조물이 있을 법한 생각이 들었다. 1954년 겨울철에 이곳을 찾게 된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진공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왕사王師로 너무나 유명하며 흥법사에서 입적하였던바 모든 점을 종합해 보았을 때에 흥법사지에 대한 조사 연구는 큰 의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위치는 강원도 원성군(지금의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인데 서울에서 가거나 원주에서 간다해도 간현艮峴을 거치게 된다.청량리역에서 중앙선으로 강원도 땅에 들어서면서 첫 번째 기차역인 간현에서 하차한다. 이곳에서 간현강을 건너 강가를 따라 4Km쯤 걸어가면 흥법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 바로 흥법사 옛터가 남아 있다. 현재는 나룻배 대신에 큰 다리가 놓여지고 차도가 개설되어 자동차를 이용하면 쉽게 흥법마을까지 갈 수 있다. 마을 입구의 언덕에서 건등산 남쪽 기슭을 바라보면 넓은 대지가 보이는데 높이 3m, 길이 약 60m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중문지中門址 안쪽으로 3층 석탑 1기가 우뚝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흥법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 초반까지는 법등을 밝혔던 것으로 추측된다.
겨울철은 낮이 짧아 일찍 해가 저물었다. 운좋게 나이 드신 어르신을 만나 저녁까지 대접받은 후 잠들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든의 연세이나 지난일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선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탑을 옮겨갔다는데 이것은 곧 1931년 서울에 옮겨진 진공대사탑을 말함이었다. 그리고 법당 자리에 있었던 철불을 뗏목에 실고 어디론가 갔다는데 이 철불의 행방은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절터에서 유물들이 옮겨진 후에는 일본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으며 외지 사람으로는 필자의 방문이 처음이라 하면서 무척 반가워하였었다.
강바람이 심하여 춥기는 하였으나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절터에 나와 노인의 말대로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3층석탑이 서 있는 안쪽으로 법당지가 있으며 주초석이 산란한데 여기에 봉안하였던 철불을 옮겼는바 그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법당 북쪽이 다소 언덕진 곳이나 여기가 옛 강당지로 추측되었다. 동쪽편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앞에 큼직한 귀부와 이수가 놓였는데 이수 표면에 「진공대사眞空 大師」라는 두 줄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진공대사탑비 임을 곧 알 수 있었다. 해가 나면서 추위가 약간 풀린 듯 하여 노인을 모시고 진공대사탑의 원위치를 찾았던바 탑비가 있는 곳에서 북쪽 산기슭으로 약 200m 올라간 비스듬한 자리에 잡석들이 산재한데 바로 이곳에 서 있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금당자리가 잘 남아 있고 석탑도 원위치에 서 있으며 주변 경작지에서는 막새와 명문기와 등을 수집할 수 있었던바 「흥법사」라는 명문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탑신을 형성한 일반형석탑이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을 장식하였으며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 우주와 1탱주가 모각되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정하였는데 탑신석에는 양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고 각층 옥개석에는 4단의 옥개받침이 각출되어 있다.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상층기단 갑석의 상면 경사도 급한 편이어서 건립시기가 고려 초기로부터 다소 뒤지는 때로 추측된다. 이 석탑은 높이 3.7m로 중형 석탑에 속한다고 하겠으나 진공대사가 주석하였던 시기에서는 다소 벗어나는 때의 건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지를 조사한 후 흥법사지가 차차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1960년 8월 15일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가 발족되어 『고고미술考古美術』 제 1호가 발간될 때 흥법사지에 대한 내용이 필자에 의하여 소개되었고 이후 석탑이 보물 제 46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진공대사탑비는 귀부와 이수가 원위치에 남아 있으며 비신석은 일제시대에 옮겨져 현재 서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보관되어 있다. 귀부는 용의 머리로 변하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지대석과 한 돌로 조성되어 네 발로 대석을 힘차게 딛고 있다. 등에는 6각의 귀갑문 안에 꽃문양을 장식하였으며 중앙에 직사각형의 높직한 비좌를 마련하였는데 각 측면은 안상을 장식하였다. 비좌 위에 놓여 있는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중앙을 향하여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좌·우 측면에도 전·후대칭되게 운용雲龍을 배치하였다. 비신은 「고려국원주高麗國原州……」의 비제로 시작하였는데 비문은 왕사였던 진공대사가 세상을 떠난 뒤 태조가 몸소 글을 지었으며 글씨는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진공대사는 신라 때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 건국 후 태조의 왕사로 추대되었다가 태조23년(940)에 흥법사에서 입적한 당대의 고승이었다. 이 석비의 귀부와 이수도 현재 보물 제463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