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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백련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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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1997년 10월 188호
효림


운수납자로 떠돌던 시절엔 늘 시간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고독한 시간을 오래 가진 데서 오는 삶의 ‘여백’ 같은 것이 많았던 게 아니었나 싶다. 사문이란 무릇 적요함을 동반한 한가함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는데, 요즘처럼 이런 저런 일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예전의 그 넉넉한 ‘여백’이 사뭇 그립다. 출가 사문의 길로 들어선지 삼십 년이 흐른 지금, 행자시절을 되돌아 본다는 것은 지금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그 ‘여백’ 의 아름다운 시간을 추억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여름방학,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나오는데 한동네에 살고 있던 친구가 느닷없이 절에 놀러가자고 했다. 그 길로 고향 거창에 있던 송계사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꽤 먼 길을 걸어 무주구천동 백련사로 갔다. 조그마한 집 한 채로 동그마니 서 있던 백련사엔 서른 중반의 깡마르고 키가 훌쩍 큰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스님께서 지어주신 저녁을 먹고 고단해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눈을 뜨니 스님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단정히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한 스님 모습을 숨도 제대로 못쉰 채 바라보았던 기억은 지금도 한 폭의 정물화로 가슴한켠에 남아 있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날이 밝자 군불을 지피던 스님을 거들면서 나는 물었다.
“스님께선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열여섯 소년의 눈엔 깊은 고민이 없고서야 그리 한 생각에 골몰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선하고 있었다.”
“참선이 무언데요?”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들어본 ‘참선’이니 ‘부처’라는 단어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군불을 지피던 아궁이 앞에서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자세히 들은 나는 주저 없이 ‘이 절에 살아야겠다’ 고 결심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영화 ‘사명대사’ 를 보고 오로지 ‘사명대사 같은 대 도인’이 되리란 꿈을 간직했던 잠재의식 때문에 그리 간단하게 결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자’ 는 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백련사에 눌러앉아 그야말로 꿈결같이 아름다운 몇 달을 보냈다. 약초를 가꾸던 스님을 따라 약초밭을 드나들기도 하고 스님의 좌선 삼매를 흉내내어 가부좌를 틀기도 했는데, 아무튼 스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그곳에 있은지 얼마안되어 스님이 내 또래 아이들 두 명을 데려와서 백련사에서의 내 생활은 즐거움이 더했다. 낮엔 아이들과 냇가에 나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물장구 치고 멱감고, 밤이면 아이들에게 단 한번 가 본 서울구경 얘기며 영화본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무협지보다 더 재미난 내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 무렵, 우리가 스님 몰래 즐기던 은밀한 즐거움 하나가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었다. 동산 가는 척 또는 스님출타중에 한이십 리 길은 족히 되는 마을에 내려가 라면 한두봉지를 사서 끓여 먹는 맛을 어찌 꿀맛에 대랴. 육십년대말 라면이란 것이 처음 나오던 시절, 라면 값이 오 원하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출타했다 돌아오시던 스님의 눈에 뜨이고 말았다. 라면 이름이 무슨 소고기 라면이니 닭고기 라면이니 했으니 라면은 절에 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음식이었던지라 스님 앞에 우린 코를 빠뜨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분명 엄청난 꾸중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스님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 우리를 내려다 보시곤 싱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뒤로 장에 나갔다 올 때는 늘 라면을 사오셨다. 참 속깊고 인자한 분이었다.
사문의 길로 들어선 뒤 내게 많은 영향을 준 몇 사람 가운데 한 분이 백련사의 그 항국스님이다. 스님은 초발심자인 내게 수행자가 가지는 깨끗하고 고고한 기품을 보여 주었다. 아마 그때 내가 스님에게 인간적인 거부감을 가졌다면 사문으로의 첫 출발이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군불을 때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엉덩이를 툭툭 차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니 커다란 개였다. 깊은 산중에 길을 잃었구나 싶어 붙들려고 하면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다가와 또 발로 차는 것이었다. 밖에서 이 모양을 스님이 보시고 조용하게 ‘임행자, 놔두고 이리 와라’했다. 그리고는 돌을 던져 멀리 쫓으며 하는 말이 ‘개가 아니고 늑대야’ 하는 것이었다. 늑대는 아이들을 살살달래 멀리 데리고 가선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이마 보통 사람 같으면 늑대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백련사 시절처럼 동화 속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던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 순수함의 여백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행자시절, 백련사의 항국스님이 ‘스님이란 멋 있고 자비로운 사람’이란 생각을 갖게 하고 불심을 키워 주었다면, 청담 노스님은 사문으로서 지녀야 할 정신이나 법구를 일러주신 분이었다.
집에 가서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좀더 큰 절로 가 공부했으면 하는 항국스님의 명에 따라 집에 들러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방학이 끝나기 전 돌아오라’ 는 편지를 받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가 몇 달만에 집에 돌아와선 ‘도인이 되기 위해 출가하겠다’ 며 집을 나서는 자식을 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셨다.
바로 집을 나와 기왕이면 큰 절로 가 제일 큰스님이 되려는 생각으로 서울 조계사로 갔다. 그곳에 들렀다가 혜광스님을 만나 그 분의 시자로 잠깐 있다가 스님의 은사 스님이었던 청담 노스님이 계신 도선사에 가 있게 되었다. 청담 노스님은 당신의 상좌들에겐 엄격했으나 나이 어린 행자들에겐 자상하고 따뜻하게 대하셨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스님 방에 들르면 과자를 내놓으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실달타 태자의 탄생에서부터 출가 수행 과정, 그리고 당신의 출가와 젊은 시절 수행하시던 얘기를 해주셨다. 우리가 스님의 말씀을 듣다 그만 깜빡 졸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 생고무를 달아 짚신 밑창에 붙이고 금강산, 묘향산 등 온 나라를 다니시던 얘기를 하면서 수좌 가운데 당신이 가장 행각을 많이 했을 거라고 하셨다.
노스님은 또 걸래질이며 비질하는 법, 양말을 빨아 윗목에 너는 법, 가사장심을 거는 법까지 절집안의 법도를 자상하게 일러주셨는데, 뒷날 내가 해인사 등 여러 제방선원에서 대중생활을 할 때 보니 나만큼 옛 법도를 아는 수좌가 드물었다.
청담 노스님이 이렇듯 자상하게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갖춰야 하는 데 영향을 주셨다면, 내 은사스님이신 소천스님은 오늘날 내가 불교운동을 하는데 사상적 밑거름이 되는 정신을 심어주신 분이다. 조계사에 잠깐 있을 때, 나는 수많은 큰 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엔 큰스님들 가운데 소천스님의 법문이 가장 수승해 보여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했다.
소천스님은 잔정이 없고 엄격한 분이셨으나 민족사 발전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육칠십년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남북간의 이념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금강경의 ‘공사상’ 이라고 주창하시며 금강경 구국 독송회를 열어 각운동을 벌인 분이다. “내 나이도 많고 행자 있을 곳으로도 마땅치 않다”며 고사하시는 스님을 인천 보각사로 찾아가 결국 허락을 얻고 계를 받았다. 백련사로 출가한 다음 해 삼월 십오일, 내 나이 열일곱때였다.

얼마 전에 북녘동포돕기운동의 일환으로 만주에 몇 차례 다녀왔다. 이미 타종교에선 포교를 하느라 야단이었는데 우리 불교 집안은 조용하다. 북방포교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 같다. 이렇듯 눈 가는 곳이 많으니 행자시절 누렸던 그 넉넉한 ‘여백’과 함께 할 시간은 그리 쉬 오지 않을것 같은 예감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