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버리면 선禪이 필요없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김원석
2000년 08월 222호
환갑이 넘은 백발로 수련회의 젊은이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불혹을 훌쩍 넘어 이제 이순耳順이면 사리에 통해야 할 나이라는데 아직도 방향조차 모르고 늘 방황하는 자신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나는 성당에서 세례 받은 지 15년이 넘은 크리스천이다. 옛날 같으면 불문에서 받아 주지도 않았겠지만 교회에서도 이단으로 단죄되었을 것이다.
2년 전 송광사에 가서 한번 혼이 났는데도 이번에 다시 해인사를 찾게 된 것은, 여름철이면 더 심해지는 산사로 향하고픈 나의 업보랄까. 꼭 어떤 깨달음을 기대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땅에 태어나 우리 역사 속에 살면서 불교의 향기와 영향을 저버릴 수는 없었고 더구나 등산이 취미인 나는 늘 산사를 지나며 호기심으로 들여다보기 마련이다.
또한 고苦·집集·멸滅·도道 사성제의 진리가 한평생 살며 가슴에 와 닿는 것을 어쩌랴.
40여년 전 생도시절 처음 해인사에 간 적이 있었다. 어느 법당 불상 밑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 들리던 풍경소리, 아침공양에 오른 쑥국의 향기는 후에 늘 불교와 해인사에 대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 다시 찾으리라 생각했으나 인연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수련은 또 다른 감회를 느끼게 했다.
수련회는 역시 내 육체적 한계를 절감케 하였다. 어느 누구보다 엄격한 규율과 힘든 교육훈련으로 일관된 정예군인으로 한평생 살아온 나에게도 긴 참선은 어려운 고비였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도 움직이는 것은 극복이 쉬운 것 같다.
동물인 나 같은 인간에겐 동물의 제1법칙인 움직임이 제한되는 훈련은 참으로 고통이었다. 아마 스님들은 동물 아닌 인간이기에 쉬운 것일까?
이년 전만 해도 1080배를 젊은 학생들과 같이 독하게 해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800을 넘어가면서 속도를 같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 것이다.
4박 5일의 수련을 마치고 산문을 나설 때는 파죽이 된 육체와는 달리 잔잔하고 맑은 마음의 평화, 해인삼매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정글을 뚫고, 태풍이 지나간 후의 안도와 성취감 같으면서도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랄까? 멋모르고 불문을 기웃거리다, 부처님께 호된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문을 뒤로 하고 나오는 내 귓전에는 “인간은 자연이며 자연의 일부다.” “자기를 버리는 자는 선禪이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시던 극락전 고봉스님의 가르침이 메아리쳤다.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참 진리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 진리라면 벽이 왜 필요한가?
종교간의 추악한 전쟁이 인류 역사의 과거이고 현재인 한은 신앙을 가진 자가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 현실 같다.
그러나 참선의 궁극이 이타利他가 실현되는 정토의 세계라 하시듯, 크리스천의 궁극도 이타(사랑)가 완성되는 구원의 세계가 아니던가.
자기 방식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곳에 결코 구원이 없다고 한 신학자의 말을 상기해 본다. 모두가 보다 높은 진리를 향해 같이 돌고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다시 여름이 오면, 나는 또 집을 떠나 산사로 가고 싶어질 것 같다. 일주문에 문턱이 없는 한.
하지만 이제 이 육체가 허락할지 의문이다. 이것이 또한 노인이 버려야 할 또 하나의 집착은 아닐까!
이 방황하는 이교도에게 문을 열어 좋은 가르침 주신 해인사 수련회 삼보님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