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을 꿰는 바늘의 직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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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일백호 기념특집 - 현장
1990년 06월 100호
「해인」이 어느덧 지령 100호가 되었다니 감개무량하다. 우선 100호기념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처음 창간되었을 때의 뒷이야기와 「해인」을 만들면서 얻은 체험과 느낀 점들을 기억나는 대로 회고해 볼까한다.
「해인」이 창간된 지도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해인」지가 창간된 것은 개인의 원력이나 사중의 뜻에 의해 계획된 일이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와 순수한 여망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발생적으로 탄생되었다.
그 당시 해인사에는 현응스님을 중심으로 불교학생회가 설립되면서 주간 단위의 법보 교재용 주보를 만들게 되었는데 강원의 학인스님들이 그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때 나는 경반 학인신분이었는데 포교부장의 직책에 선출되면서 학생회와 인연이 맺어졌다.
학생회 법회를 알리는 소식지로서의 법보를 좀 더 발전시켜 월간으로 바꾸면서 내용을 알차게 담아 읽을거리를 제공하려고 했던 것이 1982년 3월 6일에 「해인」의 창간호가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해인」이 탄생된 데에 산파역할을 한 사람은 강원의 학인스님들이다. 그들은 학생회를 가꾸고 보조해 주자는 애뜻한 마음을 모아 자발적으로 포교기금인 성금을 마련했는데 처음에는 그 비용으로 「해인」을 만들었다. 창간호는 별 모양도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그때는 포교지가 귀해서 그런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런데 이것을 계속 발간하는 데는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무인판매제도였다. 매달 나오는 「해인」지를 장격각에서 ‘해인사안내기’라는 소제목을 붙여 보급하기로 결정하고 편집 내용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중고등학생이 읽을 수 있는 불교교양물이면서 해인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불교를 쉽게 소개하고 해 인사를 안내할 수 있는 팜플렛의 역할을 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련암의 원택스님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방장스님의 법문을 싣기로 했다. 또 해인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해인사를 안내해야겠다는 필요성에 따라 법당에 그려져 있는 벽화를 소개하기로 했다. 벽화를 통해 불교를 더욱 재미있고 쉽게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자료로 삼은 것이다.
이런 편집방침에 따라 2호부터 앞에는 일반인들이 삶 속에서 불교를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친 방장스님의 법문을 담고, 뒷면에는 벽화이야기를 실어 대비를 맞추고, 그밖에 팔만대장경 및 편액·주련 등을 해설과 함께 편집해 해인사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해인」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을 받아보던 사람들의 떨림과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는 불교인쇄불이 전무한 상태였고, 있다고 해도 격을 갖추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좋은 법문을 좋은 종이에 칼라인쇄로 발행한 것을 보고 불교를 어렵게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공감하고 찬탄했던 기억이 난다.
창간호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1천부를 발행했는데 2호는 2만부, 3호는 3만부를 찍어도 금방 바닥이 나서 1만부를 더 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들을 위해서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한두사람의 일이 아니라 불교계에서 꼭 필요한 일이 되었고,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는 자각이 일을 하면 할수록 깊어갔다.
그 당시 생각으로 나 자신은 능력이 없지만 주변에는 구슬괴 같은 재주와 능력을 갖춘 분들이 많은 것을 보고 그것을 하나로 꿸 수 있는 바늘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구슬의 참 의미를 깨닫고 일상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랬다. 여러 큰 스님과 능력있는 스님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좋은 생각과 마음들을 모아서 염주를 만들듯 바늘에 꿰는 작업이 바로 편집자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같은 바늘의 역할이 중노릇을 지어가는 하나의 소재가 되었다.
강원의 학인신분으로 시작한 일이라 신분적인 제약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다. 처음에는 주지스님이나 강주스님의 이해 부족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늘어나는 우편물과 장부정리, 발송관계 등의 일들을 처리하는데 힘이 들었다. 몇몇 뜻있는 스님들은 밤을 세워가며 발송작업을 하고, 서로서로 일을 거들면서 개인적 차원을 넘어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일에 열중했
다. 그러한 정신이 오늘의 「해인」까지 이어져 을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처음에 비매품으로 무책임하게 나누어주고 말았더라면 지금까지 한 호도 빠짐없이 계속 증면 발전할 수 있었을까.
「해인」지가 몇 호 나왔을 때 치문반 스님 셋이서 「해인」지 500부를 얻어다가 부산국제시장에 가서 탁발한 적이 있다. 가사 장삼을 수하고 두 스님이 목탁과 요령을 흔들며 염불 축원을 하고 한 스님은 상가마다 사람마다 「해인」지를 한 장씩 나누어 주며 탁발을 했는데 시장 사람들이 “불교도 이렇게 포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기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때 치문반 스님 세 분이 한나절 탁발한 25만원을 「해인」지 제작 성금으로 가져와서 탁발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편집하면서 가장 가슴 저렸던 기억이 난다. 초창기에 학인들의 그런 정성과 독자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기반이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해인」을 만들 때 어떻게 편집해야 하나 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신문 편집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해서 방학을 이용해서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기존에 나와 있는 큰 사찰의 팜플렛은 물론 학생 주보, 원불교·성당·교회의 인쇄물까지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그런 것을 참고하여 2호부터는 4×6배판, 8면의 형식을 계속 유지하며 발행하게 되었다. 내용은 중고등학생을 기준 대상으로 삼아 가능하면 쉬운 말로 풀어 쓰고 읽어서 무리가 없는 문장으로 꾸미려고 애썼다.
「해인」지 만드는 일을 더 꾸준하게 못했던 것은 밖의 요인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것은 스스로가 한계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의 부족함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래서 더 공부해야겠다는 자각이 구체적으로 싹터옴을 느꼈다. 어느 순간 바늘의 역할만으로 꾸준히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자각과 함께 나 자신도 구슬의 역할이 함께
이루어져야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개인적인 원력과 다짐도 소중하지만 일을 잘 할 수 있는 기술적인 실력들도 병행되어야 함을 알았던 것이다.
끝으로 「해인」지가 독자의 입장에서 독자에게 필요한 편집취지와 발행목적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에서 몇 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첫째로, 「해인」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해인」은 해인사에서 발행되는 것인 만큼 해인사의 특성을 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작했을 때 성공했던 것도 해인사가 법보사찰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점에 덕을 많이 본 셈이다. 우리 불교문화의 뿌리로서 팔만대장경을 비롯해서 많은 문화유산을 잘 이용해서 편집에 반영한다면 보다 효과적인 포교잡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해인의 출발은 해인사 승가학원 학인들의 발원으로 시작된 것이다. 학인들의 숨은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해인」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그들의 뜻과 바램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만큼 학인들의 참여란 부분을 부활했으면 싶다.
셋째로 이점은 불교잡지의 공통적 바램이기도 한데 불교잡지라면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 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처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여 오늘의 시대상황에서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했으면 한다.
우리가 법문을 듣거나 어록을 보는 것은 하나의 단면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그러한 공부는 실체적인 경험을 얻을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살아있는 구슬로 존재하는 우리의 앎이 깨우침이 바늘이 되어서 하나의 실로 꿰어질 때 삶의 참된 보배로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해인」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던 가장 큰 것은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모으는 바늘의 철학을 얻었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