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계종교윤리의 공통성
종교를 역사적 문화적 현상으로 볼 때, 종교윤리의 다양성은 각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가치체계, 신화적 상징과 그 해석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종교의 윤리는 그 종교의 우주관이나 신관, 그리고 인간의 종교체험의 내용에 따라 그 유형과 의미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세계종교윤리의 교의적 근거는 각각 다르지만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도덕률을 비교해보면 거기에는 공통된 지구윤리정신(Global Ethos)이 내재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종교들은 보편적 인간 권리의 존엄성을 지지하고 있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소망하며 또한 지구의 보전(오존층의 파괴, 파괴적인 유전인자의 변화 등) 등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종교 윤리의 보편성에 대한 재인식은 각 종교가 지닌 교의나 세계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지구촌의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세계종교가 내세우는 사랑, 자비, 우애의 정신의 실천 문제에서 우리는 세계 종교의 공동 본질이나 인류를 위한 종교의 공동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5계에 나오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등의 계율은 대부분의 종교 윤리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윤리 규범은 종교 계율 이전에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률이라 할 것이다. 인도의 자이나교는 살생, 망어, 투도, 비범행, 소유 등의 악덕에서 멀리 떠나야 한다는 5대서五大誓의 윤리를 가르친다. 이 오대서는 힌두교의 요가학파의 경전인 《요가경》에는 5대 금계로 설해지고 있다. 서양의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이른바 셈족의 유일신교 전통에 나타나는 10계명에도,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나 노예, 가축 등 네 이웃에 속하는 것을 탐내지 말라” 등 불교의 5계에 상응하는 계명을 발견할 수 있다.
3. 보편적 지구윤리로서의 불교의 오계
그러면 종교의 신앙체계와 상관없이 선의 규범을 정의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칸트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선과 악의 기준은 신의 의지나 특정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옳기 때문에 선이라는 도덕률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도덕률은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이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두 가지 지상명령을 선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지상명령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이를 행하고 존중해야 하는 당위의 법이라는 것이다.
세계윤리구상이나 지구윤리헌장 제정 운동도 이러한 인간주의적 윤리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계운동은 지구윤리운동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으며, 오계가 지닌 철저한 인간존중 사상과 그 덕목의 인류적 보편타당성은 칸트적 도덕관과 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필자가 관여하고 있는 세계불교도우의회(WFB) 한국본부에서도 1993년부터 국제오계파지운동(International Pancasila samadaniya Movement)을 전개해 왔다. 1998년 WFB 정기대회에서는 이러한 한국본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계파지운동 분과를 WFB 본부의 특별분과위원회로 설치한 바 있다. 이 운동은 본래 현재 상좌부불교, 금강승 불교(밀교), 대승불교 등 크게 세 전통으로 나누어져 있는 불교도간의 대화 운동에서 출발하였으나 이제는 앞에서 언급한 보편적 지구윤리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오계의 덕목은 인류 공동체가 사랑과 신뢰의 바탕 위에 공존하며 성장해 갈 수 있는 윤리 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오계 정신인 자비, 보시, 진실, 청정, 각성의 덕목은 어떤 종교에 대한 교조적 신조나 종파적 교의에 관계없이 전 인류의 윤리덕목으로서 보편성이 있다. 그러므로 오계윤리정신(pancasila-ethos)은 모든 인류가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윤리의 기본 원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오계는 단순히 재가불자의 소극적인 계율이 아닌 보편적 지구윤리의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며 오계정신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와 그 실천 방안의 모색으로 새로운 인류의 윤리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할 사명이 모든 불자에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