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판을 바라보는 일은 조심스럽다. 누런 빛을 띠기 시작한 벼가 찰랑이는 들판, 여름 끝무렵부터 대풍이라는 성급한 말이 오가게끔 넉넉하게 매달린 일곡은 가을볕에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들판은 한해의 정점인 수확기를 향해 치닫는 중이다. 바라보면 저절로 마음이 순해지는 가을 들녘. 하지만 조심해야지.
한순간에 들판을 휩쓸어 굽은 등에 시름을 한 짐 얹어 놓고 달아나는 벼멸구 떼며 태풍이 언제 밀어닥칠지 모르니. 고요히 반쩍이는 저 강물이 돌연 물굽이를 만들어 배를 뒤집어 놓듯, 발뒤꿈치 쫓아오르는 물살을 피하느라 허위허위 오른 산등성이에서 단단히 일러둔 경계를 잊고 잠깐 돌아보는 순간 돌기둥이 되어버리듯, 그렇게 잠복한 복병들이 언제 출몰할지 모르니. 가을들판에 살아 있는 것들은 조심 조심 가을을 건너는 중이다.
남한강 물줄기를 끼고 여주 산륵사며 흥법사, 거돈사, 청룡사 등의 절이 비슷한 간격으로 세워진 것도 뱃길의 안녕을 위한 것이 아닌가라는 글을 떠올리며 원주로 향한다.
태백산맥을 모태로 오대산에서 갈라지는 차령산맥, 그 차령 산맥이 서남쪽으로 흐르다 이룬 치악산, 그 치악산에서 흘러나오며 각각 솟은 크고 작은 산자락으로 둘러쌓인 땅. 그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섬강을 이루고, 섬강은 다시 흘러내려 남한강으로 합해지고.
무심하게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 한겹 안쪽을 들여다보면. 땅이며 물은 저희끼리 맥을 이어가며 이합집산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곳어어서 그러는가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를 찾아나선 길에선 유독 길이 햇갈린다. ‘주유소 건너서 우회전해서 우회전 이라고 친절히 가르쳐 준 길을 가다가 애매하게 갈라진 길에서 머뭇거리기도 하고, 찻길을 건너려다 치인 들짐송의 사체가 널브러진 곳을 지났다가 되돌아오기도 하고, 비 길로 죽 가다가 길가에 돌세운 곳에서 꺾어져 들어가면 바로 법천사지’ 라는 말에 기대어 가다보면 길가에 표지판으로 세워둔 돌은 여럿이다. 하기야 법천法果으로 가는 길 아닌가. 물어물어 찾아든 법천사지 어귀.
길갓집 담장 안의 오동나무에서 날아온 씨가 싹 틔워 자란 듯한 어린 오동나무 몇 그루가 하늘거린다. 그 오동나무가 담장을 넘은 집이며 꼬리를 휘둘러 제 엉덩이를 치며 파리를 쫓는 소들이 웅크린 축사며 밭자락 모두, 오래 전에는 법천사 경내였다.
명봉산 법천사는 725년에 창건되어 고려문종 때 지광국사가 주석하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절의 규모는 확실치 않다. 당간지주가 밭 가운데 자리하고 절 건물에 쓰였던 돌이 민가의 섬돌로 쓰이는 걸로 미루어 짐작할 뿐, 절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 그나마 절의 흔적이 선연히 남은 곳은 마을 위쪽 산자락에 들어앉은 탑전 塔殿이다. 크지 않은 건물 세 동의 흔적이 여실한 탑전으로 올라서면, 초석을 두단으로 쌓아 돋운 첫번째 건물터에 광배와 불상, 연화문 대석이며 어디에 쓰였는지 모르나 무늬가 조각된 석재들을 모아 놓았다.
비스듬히 세운 광배 앞의 불상이 기우듬하다. 머리 따로 몸통 따로인 불상은 게다가 어깨에서 팔목까지도 흔적 없고 손만이 무릎 위에 얹혀 있다. 그런 채로 견디는 불상의 시선이 닿는 거기,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가 우뚝하다.
귀부며 이수, 비신이 온천히 남은 탑비의 조각은 화려하다. 귀부의 귀갑은 네모로 구획 지은 안쪽에 육각형을 새기고 다시 그 안에 임금왕王자를 새긴 독특한 문양이고, 구름문양 여의주와 용머리가 새겨진 이수는 하늘을 향해 들린 처마 같은 선에 귀꽃이 화려하고, 비신의 비명 양옆에는 극락조가 음각되어 있다.
모눈처럼 그은 칸 안에 한글자씩 새겨 넣은 비신은 원주사람인 지광국사가 고려 성종 3년(984)에 태어나 어렸을 때 입산, 문종 때에 왕사와 국사를 지냈고 84세에 법천사로 들어가 입적했다는 기록을 전한다. 지광국사를 기리기 위한 탑비와 부도탑은 대사가 입적한지 십팔년 만에 세워지는데, 거기 들인 공력만큼 화려한 부도탑은 탑비가 있는 법천사지를 떠나 서울 경복궁 뜰에 세워져 있다. 1912년, 일제가 일본으로 반출한 것을 삼년 만에 되찾아 경복궁에 모신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 모셔진 지광국사 현묘탑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지대석 네 모서리는 물결의 굽이나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구름, 또는 허공을 향해 벌어나가는 넝쿨처럼 길게 벌어나온 돌이 땅과 탑을 잇는다. 부도탑으로는 이색적인 네모진 탑의 몸체는 문양들이 난무하다.
안상문양이며 구름문양, 당초문, 연화문, 보탑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페르시아풍으로 주름을 잡아 드리운 커튼은 탑이 돌로 이루어진 것임을 잠깐 잊게 만든다. 과제물을 위해 친구들과 몰려온 초등학생 가운데 ‘역사박사’ 라는 한 아이가 “사리를 모신 탑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기장 아름다운 탑”이라고 친구들에게 의젓하게 설명하는데 손색없다.
그 탑을 멀리 떠나보낸 채 절터를 지키는 탑비의 비신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점판암계의 돌은매끄럽던 표면이 풍화되어 아래쪽 모서리는 해안의 층층절벽처럼 침식된 단면이 드러난다. 세월은 사물들의 특성을 지워버리는가 아니면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가. 닳아버린 돌은 매끄러운 부분과 달리 돌의 속성을 드러내지만, 어찌보면 오래 된 나무의 수피와도 닮았다. 사물과 사물을 가르는 경계, 세월을 가르는 경계를 건너뛰는 건 돌과 나무만은 아니다. 법천사지의 비신, 지광국사의 행적을 기리는 글귀가 쓰인 여백에 새겨넣은 62년 德이며 李라는 외글자는 경복궁 현묘탑비 부근의 안내판에 연필로 써 넣은 ‘윤아영, 박지혜, 유윤숙 왔다감’ 이라는 연필 글씨와 닮은꼴이다. 비신에 자기만 알아볼 수 있는 이름자의 외글자를 새긴 사람도 속으로 썼을 것이다. ‘나 이아무개, 왔다 간다.’ 아무것도 남긴 바없이 스러지는 한생의 멋없음이며 부박함이 그토록 사무쳐서, 국보로 지정된 유물을 훼손시키면서까지 제 존재의 지취를 남기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삼킨 말, 장난기에 겨워 연필로 끄적거린 아이들이 남긴 ‘왔다감’ 이라는 말이 묻는다. 한나절 나들이를 마친 아이들이 피로한 다리를 끌고 찾아드는 집처럼, 이 생의 나들이를 마치고 ‘왔다가는 날에 찾아들 곳이 어디냐’고.
밤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싸인 법천사지 탑전아래 마을, 말복을 무사히 넘긴 개가 짖는다. 법천사지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조선초, ‘태재 유방선이 일찍이 이 절에서 학문을 강의 하였는데 배우러 오는 자가 먼 곳으로부터 모여들었다. 권랍,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같은 이들은 뒤에 다 큰 이름이 있었다’ 는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까지는 남아 있었고 임진왜란 무렵에 폐사가 되었으리라 여져진다.
한때 존재했다 사라진 절은 법천사지 말고도 많다. 지금은 원주시로 편입된 원성군에는 나말여초의 불교 문화융성을 짐작하게 해 주는 절터가 백여 군데 이른다. 법천사지와 더불어 규모가 큰 절이었던 거돈사지는 법천사지와 같은 면에 있다. 부론면 정산리 현계산 기슭. 작은 개울을 낀 길가 축대 위로 올라서면 낮은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채 거칠 것 없이 너른 사적 제1 68호 거돈사지가 펼쳐진다.
한림대학교 박물관에서 1989년부터 네 차례 걸쳐 발굴한 뒤 한창 정비작업 중인 절터는 스무 칸 남짓의 건물을 품고 있던 곳 답게 칠천오백 명에 이르고 절터 귀퉁이에서 그늘을 드리우는 느티나무는 수령 천백 년이니 절의 역사와 맞먹는다.
축대 위로 올라서면 맨 앞에 단순하고 담백한 삼층석탑이 보인다.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돋운 그 뒤편의 건물터는 금당지다. 너른터에 1탑 1금당 방식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된 단정함이 두드러진다. 금당터로 가는 계단 소맷돌엔 정비공사를 하면서 끼워넣은 새 화강암이 하얗게 빛난다. 같은 재질이니 같은 시기에 생겨났으련만,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비바람에 견딘 돌과 갓다듬어진 돌은 각기 살은 흔적이 남아 저리 다르다.
회랑의 흔적이 주춧돌로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금당지에 우북한 풀은 초가을 한낮의 볕에 청정한 독기를 내뿜는다.
금당지 뒤편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들을 모아 단을 쌓고 돋운 또 다른 건물터가 있다. 그 입구의 습지엔 용케 습기를 알아차린 미나리가 잡풀 틈에 섞여 자란다.
지상에 높이 솟은 것이라고는 석탑뿐인 빈터에서 도로를 따라 좀 더 올라가다보면 절터 끄트머리에 보물 제78호원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있다. 귀갑에 卍자와 꽃문양이 번갈아 섞인 귀부는 법천사의 그것보다 소박하다.
거북이 등에 지고 있는 비신에는 원공국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 13년(930)에 태어난 원공은 8세에 불교에 입문하고 중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현종 때 왕사가 되었다. 1018년, 89세를 일기로 거돈사에서 입적하니 왕명을 따라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비문은 고려 문종때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이 지었고 글씨는 김거웅이 썼다. 탑비와 짝을 이루는 부도탑 또한 경복궁에 가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자기 집에 가져다 놓은 걸 l948년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귀부와 비신 사이의 틈바구니, 날아들어간 흙먼지며 새어들어 간 빗물에 씨를 묻어 자란 풀이 눈에 띈다. 실오라기처럼 가녀린 풀이지만 목숨 있는 것이어서, 가을이라고 누렇게 말라가며 버스러지고 있다. 그곁, 난데없는 연둣빛이 톡튀어나온다. 엄지손톱만한 청개구리다. 나뭇잎이며 풀잎의 초록빛이 다들 숨죽어가는 이 때, 당돌하게 튀어나온 연둣빛은 과연 청개구리라는 제 이름답다.
하지만 청개구리라는 관념은 사람이 얹을 것일 뿐, 사람의 눈에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성정은 위장술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녀린 목숨의 자구책이려니. 낯선 눈길에 긴장한 기척을 청개구리는 할딱이는 숨으로 드러낸다. 사위가 아연 긴장한다. 팽팽히 긴장한 신경세포로 세상을 감지하던 청개구리. 저를 향해 내밀어지는 사람의 손길에 놀라 팔딱, 풀섶으로 뛰어든다.
사람의 손톱만한 청개구리 한마리가 뛰어든 풀섶, 풀벌레 울음 소리 문득 그친다. 볕 단조로운 가을벌판, 풀 그늘의 풀벌레들이 소리를 삼킨 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