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아리야 바로기네 세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 가로니가야 다냐댜 아바다 아바다 바리바제 인혜혜 다냐다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 다냐다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 바리마수다 못다남 옴 살바작수가야 다라니 인지라야 다냐다 바로기제 새바라야 살바도따 오하야미 사바하\'
불법에 있어 주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었으나 조실스님을 믿고 전심전려으로 주력에 몰두했으니, 나중에는 태고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주력이 실려 있는 듯 주력과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한 달은 채 안 되었을 것이다. 삼주쯤 지났을 때였을까. 나를 돌보아주었던 의사가 내 몸을 진찰해 보더니, \'아, 이 선생 병이 다 나았군요\'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반가워 일어서니 법당 안이었다. 비몽사몽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날아갈 듯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순간 불전에 나도 모르게 무수히 예배를 드렸다. 그 불치의 폐병이 그렇게 씻은 듯이 사라졌으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한 가피, 헤아릴 수 없는 대은혜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처님 법을 믿고 수행 삼매에 들었을 때 오는 그 무한한 가피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 가피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가는 경험한 이만이 알 것이다. 나는 그때 경험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고 그 후로도 어떤 인연으로 선을 하게 될 때까지 줄곧 서른 해를 주력으로 수행을 삼았다. 아무리 성취하기 어려운 일도 내게 맡겨지면 안 되는 일이 없었으니, 주력수행은 나와 뗄 수 없는 인연이 깊은 수행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피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몰아의 경지로 수행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이 바라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부처님법이 무엇인지 공부해 자신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정진하다보면 자연히 부처님법이 내 것이 되어 실생활에 실천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가만 보면 부처님법을 알려고 노력하고 수행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저 뭔가 이루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기만 한다. 기도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부처님 법을 깊이 체득하고 원을 세워 수행정진하다 보면 업장이 녹아 어려운 일을 미리 막기도 하는 것이다. 경전을 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수행이 제대로 되는 것이어서 나는 신도들에게 경전을 익혀 불법이 무엇인지 알고 수행에 들어가라고 이르고 있다. 경전을 공부하며 스스로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 수행이 빛이 나는 것이다. 끊임없이 참회하며 수행에 매진해야 한다.
병이 씻은 듯이 나은 후 곧 포산스님을 은사로 오계를 받고 절집사람이 되었으니 사실 나에게 행자시절이란 것이 생략된 셈이다. 글쎄 굳이 행자시절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포산스님의 공도리를 들으며 불법에 끌렸던 일,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찬 없는 밥 먹어가며 주력삼매에 빠졌던 그 시간들과 그후 태고사를 떠나 계룡산 용화사로 들어가 다시 주력으로 수행하며 지낸 몇 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 사제인 탄성스님이 문득 입적했다하여 법주사엘 다녀왔다. \'인욕보살\'이었던 그도 세월이 가니 그렇게 갔다. 어느덧 불가에 들어와 쉰해를 넘겼고 다시 여든을 넘겼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존재 아닌 소유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난리법석인데,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입산한 이 출가수행의 길에서 얼마만큼의 힘을 세상에 회향했을까. 어쩐지 그 일을 생각해도 흡족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