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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일연선사 부도탑을 찾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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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0년 07월 221호
인각사 일연선사 부도탑 일연一然선사의 유명한 저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를 공부하면서 선사가 입적한 인각사麟角寺를 찾아 부도탑을 조사하려 했으나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인각사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철로변에서는 먼 곳이어서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기차를 이용한다면 중앙선의 의성, 탑리를 지나 우보 혹은 화본역에서 내려 버스를 이용하는데 차도에서도 상당한 거리를 걷게 된다.
처음 찾은 것은 지금부터 45년전인 1955년 겨울이었다. 당시 학우인 문갑수와 화본역에서 내려 물어물어 인각사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너무 늦어 저녁 달라는 말도 못하고 윗방에서 낡고 무거운 솜이불 하나로 새우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경내를 살펴보니 법당 앞에 나즈막한 석탑 하나가 서 있었고 좀 떨어진 남쪽 편에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搭碑가 몹시 파손된 채 서 있었으며, 허물어진 담에는 연화문 막새와 파손된 석불 파편, 고려청자편과 기와편 등이 여기 저기 산란하였었다. 큼직한 바가지에 퍼온 꽁보리밥을 스님과 함께 먹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스님은 이곳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이곳의 사정을 잘 알수 없으며 특히 일연선사의 부도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다.
두 번째는 다음해 여름이었다. 한 번 갔던 길이어서 혼자서도 쉽게 갈수 있었는데 여름철의 긴 햇살 덕분에 어둡기 전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한나절에 걸쳐 사찰 주변을 돌아보며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보아도 전혀 단서를 찾을 길이 없었다.
세 번째로 찾은 것은 1956년 겨울이었다. 우리 속담에 무슨 일이든지 \'삼세번\'이란 말이 있다. 마음속으로 이번이 세 번째이니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 굳게 다짐하고 떠났다. 이렇게 세 번을 찾았으나 대중은 하나도 없고 늘 주지스님 한 분만 계셨는데 당시의 인각사의 사정은 스님들이 만행하다 한철 정도 쉬어가는 그런 절로 되어 있었다. 겨울이었는데도 별로 춥지가 않아 바람이라도 쏘일겸 해서 밖으로 나왔다. 걷다보니까 지난 여름에 젊은 주지스님과 함께 포행하며 물장구 치던 개울에 이르게 되어 그때의 일을 기억하며 잠시 쉬고 있을 때 산 쪽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는 두사람의 모습이 어둑어둑한속에서도 보였다. 그들이 개울을 건너 가까이 오길래 \"형씨들 어디로 가시오…좀 쉬었다 가시지요\" 했더니 나뭇짐을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물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장터까지 가는데 하루에 두 짐씩 나무를 해다 판다는 것이었다. 나무는 저쪽 윗마을 「부두골」에서 해온다고 하길래 정신이 번쩍들어 \"부두골이요?\"하며 재차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슨 탑 같은 것이 서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고 커다란 돌 덩어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모두가 손질을 한 것들이라고 하였다. 나는 혼잣말로 부두골은 <부도골>이며, 흩어진 손질한 돌들은 도굴배들에 의해 부도가 파손된 것이리라…이렇게 생각이 들자 두 사람에게 나무는 내가 살터이니 지금 그곳에 가자고 하여 길을 재촉했다. 밤길이어서 휴대한 전지로 길을 비춰가며 현장을 찾았는데 초행이어서 한 시간 정도는 족히 걸린 것 같았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저 골짜기 남쪽 뒷산은 대화산大華山이라 하였다. 밤길에 미끄러지고 돌부리에 채여 신발과 옷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마음은 몹시 설레이고 있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돌무더기를 전지로 비쳐보니 신장상 조각과 글씨가 있어 일연선사 부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세 번째 가서야 비로소 인각사 동쪽의 속칭 「부도골」이라 일컫는 산기슭에서 부도가 쓰러져 전부재全浮材가 사방에 흩어져 탑신석 한 면에 한 줄에 4字씩 두줄의 탑명塔銘이 「보각국사 정조지탑 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 각자刻字되어 있음을 보고 비로소 일연선사의 부도탑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일연선사 부도탑은 이렇게 하여 찾게 되었으며 이후 당국의 주선으로 각 부재를 모아 1962년도에 인각사 입구 왼쪽 화단에 복원 건립하고 그 후 「인각사보각국사탑」이라하여 보물 428호로 지정 보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도굴배들에 훼손된 바 있어 근년에 이르러 앞으로의 보존을 위하여 경내로 옮겨 세워 현재의 위치와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사진참조) 이 부도는 8각 원당의 기본형을 갖추어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지대석위에 8각으로 된 하대석을 놓았는데 윗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었고 중앙에 8각 괴임을 각출 하엿으며 이 괴임과 연접하여 작은 연화문이 조각 되었다. 중대석 또한 8각인데 각 면에서 넓은 액자를 마련하여 그 안에 동물상을 양각하였다. 8각 상대석은 원형에 가까운데 밑에는 낮은 받침이 있으며 주위에는 큼직한 연화문 8엽이 두줄의 음각선으로 나타나 있다. 8각의 탑신 앞면에는 두줄로「보각국사 정조지탑」이라 음각명이 있고 뒷면에는 문비형이 있다. 남은 6면에는 사천왕 입상과 연화좌 위의 보살 입상이 양각되었다. 사리공은 탑신 상면에 있으나 남은 것이 없었다. 8각 옥개석은 전각에 이르러 반전되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한 편이다. 상륜부에는 연화문을 새긴 보개와 화염에 쌓인 보주가 놓여 있다.

일연선사는 고려 제21대 회종2년(1206)에 출생하여 제25대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고승이다. 선사가 입적함에 왕은 몹시 슬퍼하여 보각국사普覺國師라 시호를 내리고 탑호를 정조靜照라 하였는데 보각국사탑비는 현재 경내의 석비 보호각 내에 보물 제 42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충렬왕 15년 7월8일 입적하였으며 이후 충렬왕 21년(1295) 8월에 세웠다는 것인데 이때는 선사의 입적으로부터 6년 후가 된다. 한편 부도탑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입적한 때의 건립보다는 탑비의 건립 연대인 충렬와 21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도는 신라 이래의 8각 원당형 양식을 충실히 지키고 있으나 각부의 형태나 조각이 다소 둔중함은 시대적인 양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