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신심을 다하는데 서울은 밤이 아름답다 했던가. 태양 아래서 본때 없던 회색의 콘크리트 숲과 신물나게 귀에 거슬리는 이 소리 저 소리들 대신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선 덕분이리라.가까이 가보면 제 이름을 알리느라 여념이 없는 천박한 근성이 드러나지만, 먼발치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은 검은 비단에 금실 수놓은 듯 일단은 화려하다.
그 자극적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우리는 신선이 노닐 듯한 자연을, 수 백년 이어져온 마을을 물 속에 쳐넣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천혜의 비경 동강까지 삼켜버리려 했으니….
인연이었나 보다.
지광스님이 반딧불이 노니는 산 속 토굴 생활을 잠시 뒤로하고 휘황한 불빛이 감싸인 서울에 입성한 것이 15년 전.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늦깍이로 출가해 용맹정진이 지나쳤는지 몸이 많이 축나 아는 보살이 약 좀 자시게 한다고 서울로 모신 것
이 계기가 됐다. 잠시 몸을 추스르고 간다는 것이 이렇게 서울에 눌러앉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서울이 낯설 리 없다. 출가 전 기자노릇(스님은 출가 전 한국일보 기자였으나 5공 때 해직 당했다.)하느라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으니 낯익은 거리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몇 년 떠나있던 사이는 거리는 달라졌다. 낯설었다. 분명 거리의 풍경은 그대로건만 생소하기만 하고, 어서 수행해서 깨쳐야 한다는 조바심에 마음은 온통 산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것이 스님을 붙잡았다. 창문을 열면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의 중심지 강남의 밤 풍경. 늘 보던 그 모습이 어느 날부터인가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수많은 불빛과 불빛들 그 사이를 거침없이 오고가며 행진하고 있는 빨간 색 십자가의 행렬이 불교의 현실과 겹쳐지면서.
\"강남에 십자가가 유난히 많아, 한국 굴지의 교회들은 거의 다 모여있지. 문득 교회는 저렇게 잘되는데 불교는 왜 싸움만 하고 있나. 내가 느낀 불교는 이게 아닌데. 너무도 아름다운데 하는 회한이 들더군.\"
인연의 끈은 이렇게 우연처럼 불현듯 들이닥쳤다.
애초 \'포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몇몇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산중에서 살던 얘기며, 체험한 것, 공부한 내용을 들려주곤 했는데 점차 그 수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스님은 40∼50년 된 불자들 조차 불교를 전혀 모르는데 깜짝 놀랐다.
\"천수경도 모르고 반야심경도 몰라. 그냥 뜻도 모르고 외우고만 있는 거라. 지금도 그런 사람 많을걸.\" 그때나 이때나 스님의 법문은 불자들의 심금을 울린 모양이다. 불자들은 산에 가지 마시고 계속 있어달라고 붙잡았으나 \'몸을 추스릴 동안만 잠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숙소로 돌아오다 어둠을 비듯 반짝이는 붉은 색 십자가만 아니었어도 불교가 사회를 저버리고 사회 속에 어찌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의식도 더 이상 불자들을 방치해 둘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치 않았을지 모른다.
80년대는 불교 전체적으로 볼 때 포교의 새로운 장이 열린 시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불자들이 산사로 찾아가야 스님을 만날 수 있었던 소극적 태도에서 적극적으로 불교가 불자들 곁으로 다가간 것이다. 이때부터 도심에 포교당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포교의 씨가 곳곳에 뿌려진 것이다. 특히 강남에 많은 포교당들이 생겨났고 한결같이 상가 한켠에서 어렵사리 시작했다. 능인선원도 시기적으로 그 가운데 하나였다.
결과는 각양각색. 많은 새싹들이 자라기도 전에 시들어 버렸고, 무럭무럭 자라 큰 나무로 성장한 경우는 손가락으로 셀 정도, 능인선원은 성공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84년 서초동의 상가 건물 2층에서 시작해. 10년만에(95년) 지하 5층 지상 3층, 연 건평 삼천육백 평에 이르는 대작불사를 이루었으니 가히 신화적이라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지하 2층은 종교시설로 지상 3층은 사회복지시설로 사용 중.)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화재로 터만 남아 있는 북한산 궁녕사 중창 불사를 추진 중에 있으며, 수행자 양성을 위한 정규 대학 설립까지 계획하고 있다.
지광 스님이 능인선원을 개원하고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불자교육. 우리 불교가 답보를 거듭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불자들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동안 능인불교대학을 졸업한 인원만도 8만명. 그리고 지금도 매기 3천 명씩 계속 배출되고 있다. 사람들이 혹 능인선원 성장의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스님은 서슴없이 답한다. 그것은 바로 불자들 교육이라고.
현 능인선원 법당을 짓는데 들어간 돈이 자그마치 200억. 이 대작불사는 6년이 걸렸다. 한푼 없이 시작했으나 불사를 위해 권선문 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빚을 낸 것도 아니다.
\"신도 가르쳐 부처님을 만들어봐. 배우면 눈이 열려. 눈이 열리면 내가 돈 내라 안 해도 내고 포교하지 말라 해도 스스로 알아서 해. 불사하는데 중이 애걸 복걸할 일이 뭐가 있어. 신도들이 애타야지. 이거 짓는 것도 신도들이 하자고 했어. 그리고 그네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한 거야.\"
지광스님은 간혹 스님들이 감당하지 못하게 불사를 벌여 놓고 애타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불사는 중 욕심 갖고 되는 게 아냐. 신도들의 자립적 의지와 부처님이 도와야지. 부처님께 기도를 많이 했지. 부처님이 보기에 흡족한 중이 돼야 해. 부처님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수행자가 되지 않고서는 무슨 불사가 되겠어.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신심을 다하는데 부처님이 날 도와주지 않고 누굴 도와줘. 빚을 지고 안 지고는 신도들 몫이고, 부처님 따라 살고 몸을 던져 사는 것이 바로 내 몫이야.\"
강남구 포이동 능인선원에는 새벽부터 불자들이 줄을 잊는다. 새벽기도의 행렬이다. 입시 철에는 새벽 3시에도 그 큰 법당에 앉을 자리가 없고, 평소에도 법당의 빈 공간을 찾기 힘들다.
새벽기도와 예불을 거르는 일없이 지광스님이 직접 집전하신다. 부처님 밥 얻어먹고 살면서 당연한 일이라고 스님은 말씀하시지만 불자들은 언제부터인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풍토에 익숙해 있다.
한번도 건강해본 적이 없다면서도 스님의 하루 일과는 초를 다투는 듯하다. 새벽기도와 예불, 오전 오후의 불교대학 강의, 법회 등등. 하루 취침시간이 2시간쯤 된다던가. 그래도 요즘에는 불교대학 강의에 교수님들을 초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이 모두 도맡아 했다.
참으로 많은 불자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능인선원을 찾는다. 대학교수, 무슨 무슨 박사, 난다 긴다하는 장관…등등. 소문만 들은 사람들은 종종 그 점을 궁금해한다. 스님은 도대체 어떻게 법문을 하시길래 이런저런 이들이 줄을 잇느냐고. 그러면 스님은 한마디로 말한다. 난 부처님과 친해지자고 말할 뿐이야. 그러기 위해 기도하라고.
기도는 부처님의 내 안에 모시는 일. 항상 함께 하는 부부가 닮듯 어려울 때나 슬플 때 기쁠 때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살면 부처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부처님의 의중을 잘 알게 되면 남들보다 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괜히 약삭빠른 꾀쓰지 말고 시정잡배 같은 알음알이 쓰지 말고 다 부처님 겁니다 하고 맡겨 버리면 부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는데 뭘. 우주의 주재자가 부처님이신데 아쉬울 게 무 있어.\"
이것이 스님의 삶이다. 스님 법문의 위력이 있다면 바로 폭넓은 지식과 함께 기도와 수행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소리에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현재 능인선원 법당을 불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스님이 부처님께 드린 기도내용은 이렇다.
\'강남에서 멀지 않고 한적한 산밑에 있는 곳으로 부처님이 앉아 계실 자리 부처님이 찾아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의 자리를 선몽받았다. 구룡산의 세 봉우리가 참으로 점잖게 않아 계시면서 굽어보고 계신 자리. 부처님은 그 자리를 택하셨다. 누구나 능인선원 3층 광장에 서면 그 모양에 감탄을 연발한다. 스님은 이를 삼존불로 확신하고 있다.
어떻게 서울에 이런 명당을 찾아 낸 것일까. 그 사연은 더욱 불가사의하다.
구룡산은 전체가 그린벨트로 묶여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능인선원이 앉아 있는 자리만이 자연녹지. 정부가 자연녹지위에 길을 냈는데(능인선원 앞 양재도로)그 터만 길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일은 일부 터의 주인이 값을 올리려 안 팔겠다고 해 애를 먹었는데, 하루는 자발적으로 팔겠다고 찾아왔다. 알고 보니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터를 팔라고 했단다.
스님의 터를 얻었을 때의 감회가 다시 되살아나는 듯\"희한하지?\"를 연발한다. 그러면서 중창불사에 들어가 국녕사 자리는 민족의 영봉 삼각산의 앞마당이요 원효, 의상봉이 앞 뒤 산으로 더 기가 막히다고 입에 침이 마른다.
그러면서 덧붙이시는 말씀.
\"그러니까 내가 얘기하잖아. 부처님과 친해지라니까.\"
실상 스님은 욕심이 많다. 이번에는 대학을 짓는다. 승려, 수행자를 키우는 정식 대학 말이다. 벌써 마스터플랜이 나왔고 내년 하반기부터 착공해 2003년부터 신입생을 받는다. 일단은 석사, 박사 대학원대학부터 시작해 정식대학으로 만들어볼 참이다. 준비는 10년 전부터 시작했다. 경기도에 대학부지로 한평 한평 사놓는 땅이 이제 15만평이 되었다.
\"신도들 교육은 이렇게 계속 나가면 될 것 같고, 나이 50이 넘다보니 후학들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
출가하고 바닥서부터 올라오면서 느낀 노하우, 자신의 모든 걸 전수해 주고 싶은 것이 소망이다. 학생들에게는 전액 장학금, 전원기숙사 시스템을 갖출 작정이다. 후배 스님들에게 할말이 많다. 젊은 수행자로서 삶을 도모할 때 치열하게 살라는 것이며, 보살처럼 모든 유정 중생들을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영웅적인 삶을 살라는 얘기며
\"영웅적인 삶을 살아야지. 시시하게 살려면 세속에 살지 왜 머리는 깎았나.\"
스님이 인터뷰 가운데 가장 힘을 실어 말씀하신 대목이다. 불사는 내 몫이 아니라 신도 몫이라는 말씀과는 사뭇 다른 절절함이 묻어 있다.
지광 스님은 수행자를 등불이라 말한다. 늘 소리 없이 타들어가 주위를 밝히는 빛이길 서원한다. 너도나도 모르게 제 모습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는 욕망의 불빛 사이에서 \'빈자의 일등\'이 되어 언제까지라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