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께서는 해인사 제일 아래 요사채 맨 끝방에서 한주(閑主)로 계셨다. 방에 들어섰을 때짙게 풍기는 먹냄새와 여기저기 걸어놓은 그림이며 글씨에서 스님께서 평소 즐겨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스님께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물으니, “우리 스님네들은 참선 아니면 염불로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므로 하는 일이지요. 나는 여가선용으로 사군자를 그리거나 이따금 글씨도 쓰면서 여가를 보내요” 하신다.
스님께서는 그저 소일거리라고 하시지만 스님의 서화작품은 예사롭지가 않다. 세상에 흔한 그저 붓끝으로 기교만 부린 그런 게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수행과 더불어 꼿꼿이 다듬어 온 선서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찬탄케 한다. 그래서 ‘예(藝)’를 넘어 ‘도(道)’라고 하는 것일까. 결국 스님은 그 ‘도’가 과연 무엇일까를 내내 의심하다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국시대에 한문이 넉넉한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절에 공부하러 간다기에 절에 가면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도’를 공부하러 간다고 해요. ‘도’를 공부하는 데는 불도(佛道)가 제일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그 친구와 해인사엘 갔어요. 해인사에 당도하여 아무나 붙잡고 주지스님만 찾았어요. 그 넓은 해인사를 온종일 돌아다녔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때 한 노스님이 다가와 왜 주지스님을 찾으려 하느냐고 물었어요. 불도를 공부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더니 그러면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시면서 선방 조실스님께 데리고 갔어요. 조실스님께서 여기는 무엇하러 왔느냐고 물으셨어요. 세상에 ‘도’ ‘도’하는데 그 ‘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왔다고 대답했지요. 그 말을 듣고 조실스님은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사는 주소를 말하니, 거거서 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또 물으셨어요. 곰곰 생각하다가 어머님 뱃속에서 왔다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그 이전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또 물어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서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조실 스님께서는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이 무엇인지 알면 ‘도’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시면서 빙그레 미소만 지으셨어요”
이렇게 해서 스님은 이십대 초입 청춘 시절에 바로 그 선방 조실스님인 정혼해(鄭混海)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 출가했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줄곧 함양 백운산 상련대암, 양산 내원사, 김천 직지사, 선산 도리사 등 제방의 선원에서 수행정진하다가 1983년 다시 해인사로 돌아와 지금까지 상주하고 계신다. 해인사 교무국장을 거쳐 현재는 해인승가대학 서예 지도법사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신다.
스님께서 남달리 서화에 몰두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여쭈었더니, “옛날부터 사군자나 묵화를 보면 하고 싶은 욕구가 남달리 강했어요. 그런데 발심수행하다 보니 그런 것이 소소한 세상 일처럼 느껴져 마음 속으로만 품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6.25 전쟁이 나고 보니 세상에 남은 것이라곤 전쟁의 폐허와 상처 뿐이었어요. 그 속에서 나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면에서 대를 이어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화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혼자서 자습으로 하다가 나중에 해강(海岡)선생의 아들인 청강(晴江) 김영기(金永基)선생께 사사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30여 년이 넘는 세월이지요. 요즈음도 참선을 하다가 잡념이 생기면 붓을 들곤 하지요. 붓을 들고 있으면 그런 잡념이 일시에 사라져요. 서화를 통하여 들든 마음을 잠재울 수 있어서 정진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아요”
스님은 그동안 여덟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단체전에 참여한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지난 1986년 총무원에서 주최한 개인전은 지체장애자를 돕기 위한 기금 마련에 기증했다. 스님의 회갑을 기념해 일생을 통해 모아온 특수작품 104점을 장애자를 위해 내놓으셔서 빛나는 작품 위에 한층 더 빛나는 마음을 보이셨다.
스님의 작품은 때가 묻지 않아 맑고 깨끗하다. 고고한 정선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런지‘청정무애(淸淨無碍)’라는 구절을 즐겨 쓰신다. 청정하면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면 생사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자재할 수 있다고 하신다.
스님의 이런 성품은 젊었을 때 은사스님을 모시기 위해 몇 번 주지소임을 지낸 것 외에는 자의로 그런 소임을 맡으신 적은 한번도 없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님은 현재 서화계에서 중견의 위치에 있으시지만 그에 못지 않게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선(修禪)에 힘쓴 분이다.
젊은 시절 선방을 다니면서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전념하다 소위 말하는 상기병(上氣病)을 얻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이라고 하시면서 한토막 들려 주셨다.
“젊었을 때 기력은 약한데 정신을 너무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병을 얻게 되었어요. 참선을 열심히 해본 사람이면 십중팔구 얻는 병이 바로 이 상기병이에요. 음식을 먹으면 모조리 토하고, 눈알이 빠지는 듯 아프고, 기(氣)가 위로 솟아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는 병이지요. 이처럼 공부란 성불하기 전까지는 고생덩어리 아니겠어요. 이 모든 고통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겠지요. 공부는 안되고 병만 자꾸 깊어져 죽을려고도 생각했어요. 그러나 성불도 못하고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서 마음을 고쳐 먹고 병을 낫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옛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인데 갈침(葛針)이란 것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칡뿌리 끝을 입안으로 넣어서 막힌 체증을 뚫는 방법인데 실행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 방법을 이용해서 나는 그때 질기고 부드러운 난초대를 구해서 그 끝을 실로 연결하고 기름을 묻혀서 입에서부터 배꼽까지 밀어 넣었어요. 목구멍에 손가락만 넣어도 구역질이 나는데 그렇게 하니 뱃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가 다 나왔어요.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때까지 모조리 토하고 나니 상기병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어요.
내 느낌으로 선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희소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한 줄의 글로 적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성불이나 해탈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옛 도인들은 공부에 뜻을 세우면 목숨까지 걸었던 것일까. 공부를 이룬다는 게 이처럼 쉽지 않으니 큰스님들께서 잔소리처럼 부지런히 노력하여 공부하라고 일러주시는가 보다. 스님의 말씀처럼 목숨을 걸고 이룬 공부를 한 줄의 글로 표현한다는 게 어불성설(語不成說)인지도 모른다.
올해로 스님의 세수는 66세, 법랍은 45년이 된다. 스님께 일생 동안 일관된 생각이 있으실 것 같아 여쭈어 보았더니,
“이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요. 그 모든 것에 마음을 다 빼앗기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요. 그래서 내 생활신조는 물욕을 차리지 않는 것이며, 안되는 것을 억지로 욕심부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하고 말씀하신다.
요즈음 사람들은 옛날보다 더 많이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욕망을 억제하며 살아가야 한다. 욕망을 따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물질의 노예가 되거나 삶의 본질은 망각한 채 끝없는 방황을 일삼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기가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스님은 지금도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책이었다고 하시면서 오직 공부를 이루겠다는 일념뿐이었던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결심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요즈음 사람들은 참는 힘이 부족해요. 사실 세상의 오욕락(五慾樂)을 완전히 끊어야 하는 출가자들의 공부는 뼈를 깍는 고통 없이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보살은 자비로 능(能)을 삼고, 비구는 인욕으로 능을 삼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공부를 지어갈려면 먼저 하고 싶은 욕망을 참는 힘부터 길러야 해요. 그렇게 하기가 세상 사람들도 어렵겠지만 출가자는 더욱 인욕정진해야 해요. 옛날 원효스님께서도‘누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고자 아니하리요마는 그렇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오직 애욕에 얽히기 때문에 안 되느니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오늘날 세상은 부질없는 욕망을 쫓아 너나없이 바쁘고 들뜬 모습들이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을 반성하고 차분히 본연의 자세로 돌아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자신을 바로 알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도 함께 가져야 하리라.
이야기를 마치고 스님께서 옛날에 그려둔 그림이라며 목단 한폭을 주셨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넉넉한 여유가 느껴진다. 「해인」지 독자들을 위해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스님께 합장삼배를 올리고 방을 나서니 건너 앞산엔 더없이 밝고 환한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오랫만에 산사에서 느끼는 가득 찬 보름달의 의미를 내내 음미하며 아쉬움의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