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스물다섯 해 전 행자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때처럼 하늘을 찌를 듯 사문이 된 자긍심으로 빛나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스승의 곁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천지에 부러울 것이 없던 내 스무살 적 구도에의 첫 걸음부터 나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복을 누렸다. 불연이 깊었는지 어릴 때부터 초파일 같은 절 집안 명절날, 행사가 끝나 남들이 다 내려간 저녁 어스름녘에 혼자 산모퉁이에 서서 환히 켜진 등불이며 절마당을 한없이 내려다보곤 했다. 중학교 삼학년 때, 어머니가 편찮아 구인사에 모시고 간 적이 있다. 고향인 왜관을 나서서 구인사 입구에서 걸음조차 제대로 못 걷는 어머니를 업고 중간에 나온 스님 한 분과 교대로 수십 리나 되는 길을 걸었다. 구인사에 머물며 일 주일 동안 관음기도를 했는데 어린 마음에도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환희심이 가슴에 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그 때 출가를 해야겠다는 발심을 내게 되었다.
그 뒤 시간이 날 때마다 집 뒷동산에 올라 염불을 하며 출가에의 꿈을 키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를 끝마칠 무렵 예비고사를 끝내고 한 수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백련암으로 갔다. 천주교 고등학교를 다닌 덕에 백련암에 가 참선을 배운 수사의 소개장을 받을 수 있었다. 11월 초 결제에 들어가기 바로 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내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내 스승을 만난 것은, 호랑이상에 눈이 형형이 빛나던 그분은 소개장을 들고 찾아간 어린 소년을 보고 한마디하셨다.
“니, 절에 있고 싶나?”
그렇다고 하자 그분은 뒷방에서 일 주일쯤 있어 보라고 했다. 뒷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 대중 스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오는 게 좋겠다. 또는 생각났을 때 내쳐 하라는 등등의 얘기가 있었으나 빨리 출가하고 싶은 내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이레 뒤 다시 찾은 나를 보고 스님께서 말씀했다.
“행자생활이라는 게 밥하고 나무하는 거친 생활이다. 적당히 할 수 있는 편안한 생활이 아닌데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것 하지 못하면 뭐 하러 여기에 왔겠습니까.”
다듬어지지 않은 퉁명스런 대꾸였다. 나중에 들으니 나의 대답이 거칠게 들리셨던지 “이상한 놈”이라고 하셨단다.
그날 비로소 그렇게 내 출가사문의 길은 시작되었다. 아, 중이 되기를 참으로 잘했구나, 중노릇이란 이렇게 하는 게로구나를 가슴에 켜켜히 쌓게 하고 뒷날 두고두고 그 시절에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올올이 새겨져 나오게 했던 스승, 성性자 철澈자 스님을 모시고 행자생활을 연 것이다.
행자생활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그 때 원주 소임을 맡고 있던 원택스님으로부터 스님 찬상을 차려 올리는 일을 물려받았다. 스무 해 넘게 무염식을 하고 있던 그 무렵 겨울, 스님의 찬장은 조출하기 그지 없었다. 작은 그릇에 삼분의 이쯤 담은 밥 한 공기,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로 썰은 당근 두세 쪽, 상을 들여 가기 직전 깎아놓은 마, 작은 검은콩을 푹 삶아 참기름을 한 숟갈 넣은 콩자반, 쑥갓 몇 잎, 그것이 전부였다.
공복에 따뜻한 물 한 컵에 꿀을 넣어 드시는 것 이외엔 간식도 드시는 일도 없었다. 스님께선 늘 많이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쩌다 절 한구석에서라도 위장약이 눈에 뜨이는 날이면 날벼락을 내리셨다. “니 애비가 천석꾼이냐 만석꾼이냐, 무에 그리 많이 먹어.” 스님의 검박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미국의 카네기나 그 밖의 부자들의 예를 들곤 하면서 큰 부자도 검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정신이 실아 있어야 큰부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여름철에 수박을 먹고 나서 껍데기에 불은 기라도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이면 쓰레기통에 들어간 것까지 들어내어 먹어야 했다. 스님께선 기운이 좋아 겨울에도 내의를 입지 않고 광목 가사 하나 걸치고 지내셨으며, 재채기를 한번 하면 백 리 밖에까지 들린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시자들 야단치는 것 또한 기운차고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혹독했다.
스님을 모신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백련암 온 대중이 모여 도배를 하는 중이었는데 스님께서 내게 방바닥에 깔아 놓을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소견을 내어 신문지를 많이 가져다 스님께 드렸는데, 그 순간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 미련하기가 곰처럼 바보같은 놈아. 누가 신문을 가져 오랬어.” 도배를 할 때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아 놓았다가 나중에 반짝 걷어내 버리면 십상일 텐데 왜 저리 화를 내시나 영문을 몰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서 있는데 누군가 뛰어가 신도들이 절할 때 깔아놓는 장판을 가져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판을 깔면 쓰고 나서 걸레질을 해 다시 쓰면 되는데 아까운 신문지 (종이)를 왜 낭비하느냐는 거였다. 우리 모든 대중은 물론 스님께서도 그 무렵 포장지 가운데서도 가장 싸고 앓은 것을 사다가 오려서 썼다. 세속에서는 신문지나 책 같은 것을 화장실에서 쓰곤 했지만 절 집안에서 글씨가 박혀 있는 것을 휴지로 쓰면 머리가 둔해진다 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스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호된 꾸지람을 듣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스님의 성격은 사정없이 직선적이어서 한번 소리 내면 생각할 겨를 없이 되받아 실수가 없어야 했으므로 생활 하나하나에 정확하고 세밀하지 않으면 백련암에 살수 없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걸려 그렇듯 혹독하게 야단을 맞을 때면 대중 모두가 스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어디론가 피해 있곤 했다. 같이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엔 가르쳐 주면서 일을 시키면 될 터인데 저렇게까지 야단을 칠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했으나, 아마도 그러한 호된 꾸중은 스님의 직선적 성격 탓도 있거니와 제자의 기질을 개발시키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혼을 내시곤 했어도 누구 하나 불만을 내거나 못 견뎌 하지는 않았으니, 오히려 스님에게 “내려가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무섭기도 했으나 저녁이면 대중 스님은 물론 우리 행자도 함께 불러 간단한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였다. 그 때 스님께선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무언중에 제자들이 출가자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 때 백련암에서는 아침에 능엄주를 하고 저녁에 백팔참회를 했는데 스님께서도 거동하실 때까지 그것을 빼놓지 않으셨다. 나는 능엄주와 백팔참회를 통해 신심을 키웠고 「불교성전」과 「아함부」를 공부하며 출가사문의 긍지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행자사절을 지나 나중에 황벽스님의 「전심법요」와 도원 선사의 정법안장을 마치고 마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북받쳐 올라 선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스님을 모시고 한해를 산 다음 해에 계를 받고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났다. 출가사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사고 등 모든 것이 그 때 갖추어졌을 만큼 그 시절은 충분히 자랑스러웠고,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사문에 대한 자긍심이 밖으로는 오만으로 내비쳤을 만큼 눈부신 나날이었다. 그러나 스무해도 넘게 지난 지금, 내세울 것 없는 가장 시원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참담하다. 부처님을 모습으로 닮든지 마음으로 닮든지 그 곳으로 돌0}가야 하지 않을까. 견성할 때까지 평생 좌복에 앉아 있다 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수행자라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되새기게 하는 바람 찬 이 겨울, 스승이 몹시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