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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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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원철 2000년 07월 221호
온 국토가 환경문제로 들끓고 있다. 한 쪽에서는 개발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야단이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보존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외쳐댄다. 같이 \'살길\'이라는 말을 함께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전자가 \'양적인 살 길\'이라면 후자는 \' 질적인 살 길\'을 말하는 것 같다. 모두 나름대로 논리적 타당성을 가진다.
어쨌거나 60년대 이후 개발의 공덕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개발론자의 공로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로 삶의 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양\'에서 \'질\'이라는 대중적 삶의 목표가 바뀐 것이다. \'배부름\'에서 \'쾌적함\'으로 삶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국민의식 자체가 이렇게 바뀌어 가는 데 정책 입안자는 그 바뀜 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명無明의 연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무명은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의 내용은 개발론자들의 기존조직의 현상유지 내지는 확대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물은 흐르는 업業을 가지고 있다. 흘러야 산다. 흐르는 것이 물의 선업善業인 것이다. 바위는 그 자리를 지키는 업을 가지고 있다. 제 자리에 있어야만 멋있다. 물이 고정되어 있으면 썩어버릴 것이고 바위가 시도 때도 없이 움직인다면 주변에서 불안해 할 것이다. 그래서 물이 막히면 흐르게 해주어야 하고 바위가 흔들리면 고정시켜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선업을 증장시켜 준다. 만약 흐르는 물을 막고 고정된 바위를 인위적으로 옮긴다면 이건 악업을 짓는 것이다. 악업을 덜게 하고 선업을 쌓게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고 있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팔십 먹은 어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댐을 만드는 것은 흐르는 물을 서게 하는 것이니 물에게 악업을 짓는 것이다. 고정된 바위를 옮겨다가 물을 막는데 쓰니 바위에게 악업을 짓는 것이다. 악업이야 당연히 선업으로 바꾸어야 하겠지만 선업을 악업으로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소극적으로 선업을 악업으로 바꾸는 것을 보고도 방조傍助하고 있다면 그것도 역시 과보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동강은 흘러야 한다\'고 외쳐 댐 백지화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또 지리산 댐이다. 민족의 영산 불교계의 성산의 물이 막히고 바위가 물막이로 옮겨지는 악업을 쌓기 위한 타당성 조사가 한참이다. 더불어 이를 막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환경단체의 목소리도 뜨겁다. 불교계도 한 몫 거들고 있다.
늘 대중과 공권력이 충돌하여 갈 때까지 가서야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풀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개발론자는 결국 소모전을 통하여 예산만 날리고 그 비용은 전체국민에게 고스란히 세금으로 전가된다. 보존론자들은 환경기금을 모은다고 또 대중에게 손을 벌린다. 이것도 준조세다. 이렇게 개발론과 보존론이 맞붙는 곳에는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이 뒤따르게 된다. 결국 누가 이겨도 모두에게 손해만 남기는 게임인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조주스님은 \'아무리 좋은 일도 없는 일만 못하다\'고 하신 것인가 보다.

미리 문제를 만들지 않는 눈 밝고 귀 열린 선지식들이 이 땅 구석구석에서 제 몫을 다하는 시대가 하루 빨리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