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 , 특히「경제발전」하면 우리는 우선 외향적인 경제지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나, 여기서는 보다 질적인 요소들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발전이 추구하는 핵심가치는 다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 첫째, 발전의 목표는 우선 인간들의 삶의 질(Ouality of Life) 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 삶의 질은 우선 물질적,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건강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 둘째「삶의 질」의 향상은 어느 특정계층이나 집단에 속한 사람들만의 향유가 아니라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골고루 확산되는 분배의 공정성을 수반하여야 한다. 셋째 , 이러한 가치들이 의미를 갖는 근거는 이러한 것들이 보장됨으로써 인간은 자신들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자아완성, 혹은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필요한 자원의 배분을 요구할 수 있고, 또 정당하게 배분 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곧 발전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 왔던 경제성장이란 이러한 발전과정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기초적인 수단이며 그 자체가 목표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도 자원이 어느 정도 형성된 국면에서 사회성원들의 자발성에 기초한 발전의 단계를 여하히 전환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인간의 자발성이나 창의성이란 그 자체가 목표이자 수단 일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할 수 있으나, 실제로 사회의 발전 혹은 사회구조의 변동이란 그 사회성원들의 의식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 성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의 진작은 목표이자 동시에 발전의 수단인 것이다.
하나의 저개발 사회를 발전된 사회로 번영시키자면, 그 사회를 지도하는 엘리트와 그 사회의 성원인 국민들의 마음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 인간의 의식구조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핵심은 「게임의 규칙」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자율질서」와「경쟁」이다 . 자유롭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이며, 이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민주적 질서가 와해瓦解된다. 또한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성원들의 도의와 자발적 협조가 필수적이다. 사회성원들의 자발적 협조는 게임의 규칙이 민주적으로 결정되고, 또 그 규칙이 공평하고 엄정하게 실행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불교윤리佛敎倫理
요즈음 우리 사회는 도덕성이 상실된 채 계층간의 갈등과 적개심, 무질서와 혼란만이 난무하는 위기의 사회이다. 말초적 향락을 추구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벌이며, 끔찍하고 즉흥적인 범죄가 빈발하는 살벌한 사회,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애정이나 신뢰보다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앞서는 황폐한 사회, 무질서한 교통문화와 돌이킬 수 없는 환경오염에도 불감증이 되어버린 사회, 왜 살아야 할 것인지 차분히 생각해 불 여유도 없는 들뜬 사회,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다.
만일 어느 종교든 이런한 현실사회와 인간심성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 종교가 외향적 성장을 이룬다 하더라도, 결국 급속한 위축과 쇠퇴를 모면할 수 없게 된다 . 따라서 종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고,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는 그 종교의 내부 문제를 얼마나 빨리 극복하고 급변하는 현대산업사회의 당면 문제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치유해 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한 사회의 공존윤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소외의 해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까지 누차 지적되어 온 산업화 과정의 모든 문제들은 결국 「인간소외」로 귀착된다. 물질의 불공정한 분배, 인간의 기술에의 예속화 또는 부품화, 도시생활에 의한 정서적 황폐화 등은 모두 인간답게 살려는 의지를 말살시키는 철저한 인간소외의 요소들이며 이 인간소외야말로 모든 범죄나 악행의 근원지가 된다 .
이와 같은 인간 소외에 대한 불교의 답은 비교적 명쾌한데 외적 소외에 대해서는 연기론이요, 내적소외에 대해서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으며, 이 우주 안의 그 어느 하나도 서로의 연관성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이른바 연기론이다 .
그러기에 인간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은 단지 그 행위가 무아적 또는 연기론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아니면 아직 자각되지 않은 소아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하는 기준밖에 있을 수 없다. 전자의 경우가 업을 녹이는 행위가 될 것이요. 후자의 경우가 업을 쌓아가는 행위가 될 것이다. 한편 이 우주 안의 그 어느 하나도 부처님의 성품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 것은 없다는 절대 평등의 대선언인 실유불성悉有佛性은 떠오르는 태양 아래 이슬이 사라지듯 인간심성의 구석진 곳까지 훤하게 밝혀 주어 인간 소외의 마지막 찌꺼기마저 남김 없이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인간해방을 선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불자들은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
우선 소극적으로는 남을 해치지 않고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계를 지키고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며 탐진치貪瞋痔 삼독을 여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너와 내가 하나」라는 동체대비 사상으로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함께 나눔으로써 너와 내가 동시에 이롭게 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을 실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 방식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조화와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원리는 바로 중도中道가 될 것이다. 불교의 중도관은 단순히 양극단을 피한 어정쩡한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행위의 시기와 방법 그리고 대응정도 등에 있어서 이르지도 늦지도 않고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가장 알맞게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중도를 터득함에는 슬기로움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지혜증득을 위해 부지런히 수행정진이 불자의 필수적인 생활원리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생각에만 머무르고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듯이, 불교철학이 함축하고 있는 무궁한 생활 원리가 추상적인 가르침에만 머무르게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불자들이 부단한 정진과 함께 현실문제에 구체적이면서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불교의 참된 모습을 존재로서 보여줄 수 있을 때만이 동체대비의 연기론적 윤리관은 빛을 발할 것이고 불교는 현대산업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