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의 사회적 역할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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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시명
1997년 10월 188호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제까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변화로 가득 찬 미증유未曾有의 세계이다. 첨단의 매스미디어와 엄청난 지적 팽창으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등등. 그래서 현대를 한마디로 다원화된 사회라고 일컫는다.
이렇게 다원화되고 빠른 변화 속에 있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 종교에 속해 있는 종교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비단 불교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종교인에게 던져진 사회적 질문이자 종교인 자신에게는 영원히 풀어야 할 자기성찰이며 더불어 화두이자 실천의지이다.
부처님께서 재세在世하던 초기 교단에서부터 부파불교, 대승불교 등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습의 사장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의 명제에는 변화가 없었으니 그것은 수행과 교화, 곧,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었던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결코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영원한 불교의 두 실천강령인 것이다.
수행과 교화! 어떻게 수행할 것이며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 이 두 문제는 불교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제까지 있어 온 무수한 논의들이 이 두가지 문제를 역사를 통하여 거듭거듭 제기해 왔다.
이제까지 시대적 사회적 변화와 상황에 따라 수행이 더 강조되거나 교화의 시급함을 더 강조한 적은 있지만 이 두 문제의 범주를 떠나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문제가 제기된 적은 별로 없었다.
각설하고 이 글에서 ‘승려의 사회적 역할’ 이란 수행의 측면에서 전개해도 충분히 어떤 결론에 도달하겠지만 편집자의 의도가 다분히 교화적인 측면에서 전개해 줄 것을 요청했으므로 교화적인 측면에서 ‘승려의 사회적 역할’ 을 살펴볼까 한다.
얼마 전까지 사람들에게 비친 불교의 모습은 다분히 정적靜的이며 은둔적이고 염세적이며 비사회적인 경향에 가깝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시각의 한편에는 초세속적인 고고하고 탈속한 수행자의 분위기가 강조되어 정신적 평화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등으로 좋게 보이는 점도 있지만, 변화하는 사회 속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역사와 사회에 대하여 적극적인 실천 의지가 없거나 나약하다는 인상을 준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조선 오백 년의 배불과 억불, 해방뒤의 급속한 사회 변화, 전통이란 미명 아래 자행되어 온 구습과 악폐,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진 종단분규, 물밀듯 들어온 외세와 결탁한 외래 종교의 급성장 등 이러한 모든 원인이 그동안 불교에 대한 인식과 인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불교 내적인 요인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승려는 이러저러한 삶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구체적이고 번쇄한 이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승려의 바른 사회적 역할을 위하여 세 가지의 인식전환이 필요함을 피력하려 한다.
먼저 불교 교단을 포함해 해는 역사적, 사회적 존재라는 인식부터 새롭게 해야한다. 이직까지도 승려들 가운데 상당수가 수행하고 출가하는 것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인간사회를 떠나 홀로 유유자적하고 은둔하며 초세속의 탈속한 경지에서 지신을 포함한 불교가 무슨 안개나 마시고 구름똥이나 싸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반사회적인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삶은 사회를 떠나 홀로 사는 삶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실현하고 사회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삶임을 자각하지 못한 승려들이 만일 있다면 사회적 역할운운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터이다.
“모든 존재하는 현상은 반드시 상호연관 속에서 변화한다.(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緣起)” 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 현상은 시간적, 공간적 관계를 규명하는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사회와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없는 관계를 갖는 상호의존적인 양태를 갖는다. 그래서 인간은 늘 사회로부터 새로운 삶의 방법과 의미를 제시받고 사회는 인간의 끊임없는 실천에 의해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 과정을 거듭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둘째는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간과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인식이다.
교화할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파악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중생을 교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중생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며 무엇이 그들의 고통과 기쁨이며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 없이는 적절하고 바른 교화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의 교화 방편은 당연히 전문화되고 다양하며 적절한 교화 방편의 구사가 불가피하다. 안이하고 전근대적인 방법은 지양되어야 한다. 또 다양하고 전문적인 교화방편을 위해 거기에 알맞는 적절한 교육과 정보와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치 관세음보살이 삼십이응신과 천수천안으로 이 세상을 교화하듯이 환경과 상황에 따른 적절하고 다양한 교화방편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교화할 보살은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처럼 일체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회향하는 마음처럼 아름답고 거룩한 자세는 없다. 이는 공덕의 성취가 어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밑바탕이 되어 일체의 공덕을 모두 일체중생에게 돌리는 마음이다.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성취감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지거나 교만한 마음이 되기 쉬운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세상은 상의상관相依相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결코 혼자사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어떤 일의 성취를 자신이 혼자 이룬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승려들이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해내려면 먼저 승려 자신이 이 역사와 사회 그리고 현실 속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하며, 세상과 현실을 정확하고 냉철하게 파악해야 하며, 교화와 중생구제를 충실히 이행했다 하더라도 그 삶을 사회와 역사에 회향시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중도中道는 연기緣起이며 연기는 중도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