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란 무엇인가?’ 일견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물음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승려란 불교의 생명을 유지시키며 발전시키는 핵심이고, 여기에 불교란 것이 시간적으로는 이천오백여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인류와 더불어 함께 하고 있고 공간적으로는 인도와 중국을 포함한 전 동양권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세계의 전지역을 망라하여 신행되면서 지역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지역에 차이가 나더라도 그것이 불교인 이상 일관되게 흐르는 승려상은 있을 것이다. 이제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승려가 삼보의 하나로 재가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원시불교부터 불교는 교단을 승가 ‘僧伽;samgha’라고 불렀다. 이 말은 평화를 실현하는 단체라는 의미여서 ‘화합승和合僧’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불교의 목적이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을 얻어 진리와 합일한 생활을 하는 것인 까닭에, 이제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면 거기에는 진실한 평화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 승가를「수타니파타 보경寶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인에게 칭찬되는 여덟 무리의 사람, 곧 예류항, 예류과, 일래향, 일래과, 불환향, 불환과, 아라한향, 아라한이라 하는 이들 네 쌍의 무리는 선서의 성문이니 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보시한 사람에게는 큰 과보가 있다. 이들이 바로 뛰어난 승보이다. 이 진리에 따라 길상 있으리.”
이렇게 보면 승려란 말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승가는 다분히 집단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승가에 대하여 「대지도론」권3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어떤 것을 승가라 이름하는가? 승가는 중국 말에 중이라 하나니, 많은 비구가 한곳에서 화합하는 것을 승가라 이름한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무더기로 모여 선 것을 수풀이라 이름함과 같나니, 낱낱이 서 있는 나무는 수풀이라 이름하지 않으나 낱낱 나무를 제하면 또 수풀이 없나니라. 이와같이 낱낱의 비구를 이름하여 승이라하지 않지만, 낱낱의 비구를 제하고는 또한 승이 없나니 모든 비구가 화합함으로써 승의 이름이 생기는 것이다.”
「대지도론」의 설명은 승가란 분명히 개인이 아닌 단체를 지칭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 속에 개인적인 승려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곧 낱낱의 승려가 바로 승보라는 것이다.
수행자로서의 승려
둘째는 승려가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잡아함경」권33에는 ‘세존의 제자는 선향善向, 정향正向, 직행頁向, 성향誠向으로 수순법을 행할지니, 또는 수다원을 향하여 수다원을 얻고, 사다함에 향하여 사다함을 얻고 아나함에 향하여 아나함을 얻고 아라한에 향하여 아라함을 얻나니, 이들은 이름이 네 쌍 여덟 배라. 이들을 세존의 제자라 이름한다. 승僧은 정계淨戒가 구족하고 삼매가 구족하고 지혜가 구족하고 해탈이 구족하고 해탈지견이 구족하므로 마땅히 받들어 맞이하여 섬기고 공경할 바가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렇게 승려는 진리를 구하기 위하여 가족과 집을 버리고 출가한 수행자이기 때문에 세속인과는 다른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첫번째 조건이 계를 받고 받은 계를 지키는 것이며, 두번째가 선정을 닦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 수행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두타행이다. 수채修治라 번역되는 두타dhuta는 번뇌의 티끌을 제거하고 의, 식, 주를 간편히 하여 수도정진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열두가지의 행법이 있다.
첫째, 인가를 멀리 떠나 깊은 산 숲과 넓은 광야의 한적한 곳에 있음. 둘째, 늘 밥을 걸식하여 생활함. 셋째,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함. 넷째, 한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이니함. 다섯째 발우 안에 든 음식으로 만족함. 여섯째, 정오가 지나면 과실즙이나 꿀물 같은 것도 마시지 아니함. 일곱째, 헌 옷을 빨아 기워 입음. 여덟째, 삼의三衣 밖에는 쌓아 두지 아니함. 이홉째, 무덤 곁에 있으면서 무상관을 생각함. 열째, 주하는 것에 대한 애착을 여의기 위하여 나무 밑에 있음. 열한째, 나무 아래서 자면 습기, 새똥, 독충의 해가 있으므로 노지에 앉음. 열두째, 앉기만 하고 눕지 않음.
보살로서의 승려
셋째는 승려가 출가보살이라는 점이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보살이란 대승불교의 핵심 인물인데, 「반야경」에 등장하는 보살에는 출가한 보살과 재가하는 보살의 두 종류가 보인다. 이두 종류 가운데 승려는 출가한 보살이다. 그렇다면 보살이란 누구인가?
보살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 또는 해탈에 만족해 있는 성문, 연각과는 달리 일체중생의 정신적 안녕과 물질적 행복에 관심을 갖는 수행자다. 그는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그의 최고지위에서 내려와 깨달음이 없고 번뇌에 차있으며 업보에 묶여 있는 다른 일체중생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생활을 함께하며, 무슨 방법으로든 그들을 이익되게 하는 기회를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고행자, 은둔자, 승단에 속해 있는 자로서의 생활을 버리고, 세간에 있고 세간과 함께 머물며 세간의 고통을 받으면서 일체 세간을 구극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고 한다. 보살이 그 마음을 움직이고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는 동기는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고 일체중생을 위해서이며, 보살은 일체중생을 무명과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마침내 그들을 대열반에 안립安立시키려고 한다.
이와 같은 출가보살인 승려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특정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곧 자신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하면 반드시 타인을 거기에 인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타인을 거기에 인도한다는 것은 마침내 자신이 거기에 도달하는 까닭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타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녹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대승의 보살도菩薩道라 한다. 소위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業生이라는 것, 곧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대승의 승려가 소승의 승려와 다른 것은 대승승려에게 이 두가지의 원이 같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승려가 마음을 일으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부처님이 출세할 수 없고, 짧은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고통을 벗을 수없다. 그러나 승려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함은 지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체중생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한 영합적 박애의 주장은 아니고, 실로 보살정신의 근본에서 나오는 필연의 결과이다. 거기에는 보살정신의 출발점인 영원에 걸친 생명의 이상 가운데는 필연적으로 동일 생명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동일 생명이라는 가운데는 필연적으로 일체중생을 전체로서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령 작은 자기가 완성됐다고 해도 완성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있는 한, 아직 그 이상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자기가 본연의 이상을 추구하여 향상의 길을 걸음에는 그 필연적 조건으로서 다른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이 대승 승려의 근본 정신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은 이상적인 국토를 건설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완성시키는 일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래서 인류가 낳은 종교나 철학 또는 경제나 과학 등의 온갖 인류문화는 이것을 향한 부단한 노력이었고, 지금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 불교가 있고, 그 불교를 짊어지고 불교로써 진리를 펴 나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 개인적으로는 미혹에서 벗어나 진리의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저마다 사람들이 선성한 인격을 완성하도록 정진하는 인물이 바로 승려라고 하면 어떨까!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