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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대각교(大覺敎)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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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한보광 1990년 06월 100호
2. 선(禪)의 대중화
용성선사의 본회심(本懷心)은 과연 무엇이었을는지 심히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험악하고 어두운 암흑기에 살다간 한 구도자로서 이 민족이 갈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분명한 민족의 진로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선사는 대각인(大覺人)로서 온민족이 스스로 각자(覺者)가 되었을 때 갈길이 바로 나오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재정신을 차리는 길이요, 바른 마음과 초월을 갖는 길이 있으리라 본다. 그는 이민족의 살길과 중생의 고뇌를 건지기 위해 22세 때 확철대오 한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오후(惜後)의 수행과 틈을 내어 여가에 경전과 조사어록의 열람과 납자의 접인에 전념하였다. 18년 동안의 오후수행(惜後修行)을 교화의 생활로 돌이킨 것은 1903년 그의 나이 40세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해 2월에 처음으로 상비로암에서 선회(禪會)를 연 것을 필두로 해서 1904년 보개산 성주암에서도 선회를 열었으며, 많은 납자들의 잘못된 견해를 경책하고 바로잡아 주었다. 그뒤 보개산에 관음전을 세우고 『선문요지(禪門要旨)」를 저술하였으며, 무주·구기 등에도 손수 선원을 건립하였다. 또 중국으로 가서 많은 선사들을 만나 문답도 하였다. 선사의 전기는 주로 산중납자를 중심한 선회를 열었으나 1910년 이후의 후기는 선을 대중화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즉 이에 대하여 『한글화엄경』 서문에서 “신해년(1911) 이월회일에 경성에 들어와서 시대사조를 관한 즉 다른 종교에서는 곳곳마다 교당을 설립하고 종소리가 쟁쟁하며 교중이 만대함을 보았으나 우리 불교에서는 각황사 하나만이 있을 뿐이고 더욱 우리 선종에서는 한사람도 선전함이 없음을 한없이 느끼어 탄식하고 즉시 임제선사의 「삼인구」로 제접함을 본받아 종지를 거량하였을 따름이었다.”라고 하고 있다. 또 『각해일륜』에서도 “나는 본시 교종이 아닌 고로 그 요점만 취하여 간략히 설명하노라”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서 선사는 선의 입장에서 교도 역정도 포교도 대각운동도 선농일치(禮農一致)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사는 산중 선회에서 도회로 옮기므로 인하여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 처음에 강영균이라고 하는 신자의 집에서 선을 지도하였다. 산중의 선사가 서울의 한가운데 신도집에서 선을 지도하므로 겪는 불편함이란 말할 수 없었으나 많은 신도들의 동참이 있었으므로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포교한 지 3년만에 약 3천여 명의 신자가 모였으며, 이로 인하여 안에서 처음으로 참선(參禪)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선사는 산중에는 선종본사가 있어서 도인을 양성하고 도시에는 선종포교방이 있어서 일반 대중을 위하여 선이 산중에서 도회로 나와야 한다고 하교 있다 그는 이러한 뜻으로 선학원(禪學院)도 건립하였고, 대각사도 창설하였다. 특히 망월시에서 참선 만일결사를 단행하였는데 그 「참선만일결사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활구참선만일결사회를 창설하니 나이 63이더라. 생각건데 부처님께서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부촉하셨으니 선율(禪律)로서 그 규칙을 세웠다. 즉 오후불식(午後不食)과 묵언과 산문밖 출입금지의 청규를 세웠으나 이는 부처님의 가피력이 없으면 지키기 어려우므로 성상을 조성코져 하였다. …이리하여 새로운 성상 두분을 조성하고 만일동안 기도하면서 50명이 동참하여 만일결사(万日結社)를 진행하니 만법 중에 불속의 연꽃과 같다.”
라고 하고 있다. 즉 선수행을 하면서 청정한 계행을 겸하였던 것이다. 계행이 없는 정(定)은 그가 선지식이라 하더라도 마군과 같다고 하였다. 그는 혼자의 힘이 부족함을 알고 기도와 성상의 조성을 겸하고 있다. 이를 보면 같은 시대에 불교혁신을 부르짖던 한용운이나 박중빈과는 그 혁신이나 유신의 관점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없다. 그는 전통적인 한국 선종의 특색을 다시 드러내고 그러함으로써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는 것을 불교유신의 첫 과제로 삼았다. 유신에 있어서 불교의 근본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본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도나 운영방법의 개선을 불필요하다고 본 것이 아니며, 다만 전자를 더욱 강조했을 뿐이다.
선사가 일생동안 심혈을 바쳤던 대각교의 근원을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두고 있으며, 석가세존의 깨달음의 근본을 진귀조사(眞歸祖師)설에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귀조사절은 석가모니불께서 설산에서 수행 중에 진귀조사를 만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이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선종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고려 천책(天 )의 저술로 알려진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이야기이다. 천책 선사가 이를 주장한 이유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이때는 고려가 몽고난으로 인하여 국토가 페허되고 우리의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을 시기였다. 그러므로 인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진귀조사설이 아닌가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한국불교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계승은 서산대사에게도 이어졌으며, 용성선사도 이를 계승하고 있다. 여기서 보는 서산대사나 용성선사의 시대에도 모두 외세의 힘에 의하여 나라가 풍전등화격이었으며 전통 한국불교가 도전받던 시기임을 잘 알 수 있다. 이 진귀조사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이는 실지로 존재하였던 인물이 아니라 법신불(法身佛)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여하튼간에 용성선사가 진귀조사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한국전통선에 대한 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귀원정종(歸源正宗)』에서 말하기를 교 이외의 별전[交外別傳]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중생의 심식이 미약하여 처처에 인연을 짓기 때문에 지견을 버리지 못해서 법진이 분비한다고 하면서 중생의 현실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십지성인(十地聖人) 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관문을 넘으려면 그 관념을 부수기 위해 교외선(敎外禪)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선사는 선과 교를 구분하면서 관법을 주로하는 것을 관선(觀禪)이라 하며, 삼처전심을 교외선전(敎外禪傳)이라면서 참구(參究)를 종(宗)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는 화두참구법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화두의 간택을 잘못하면 헛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지해(知解)로서 참구하면 사구(死句)가 되고, 지해(知解)를 끊으면 활구(活句)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화두참구에 있어서 어느 나라 말로하든지 상관없으며, 그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역설하였다. 그는 잘못 선을 지도하는 사람을 꾸짖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알지도 못하고 선각자가 되어 남의 눈을 멀게 하지 마시오. 어찌 조선말로 화두를 참구하면 참의사구(參意死句)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오. 쓸데없는 말로 나의 잘함을 자랑하여 타인의 잘못을 구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하면서 선지식이라고 자처하면서 문자만을 쓰는 이들을 경계하였다. 이는 선사가 선을 쉽고 간편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가질 수 있게 하였으며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선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선의 병폐를 지적하였으며, 병통에 대한 처방도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선(禪)을 바로 펴고 그 병폐를 바로 진단하여 모든 중생의 심법(心法)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파사현정을 내세웠다. 특히 선지식들의 잘못된 지도를 말하면서 우리말로 쉽게 한 화두를 갖게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선사는 자신이 증오(證悟)한
바른법을 대중화하기 위해 많은 선회(禪會)를 열었으며, 선종교당도 도심지에 세우고 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선이라는 말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때 당시 선사들 사이에 유행하던 막행막식(莫行莫食)에 대하여 준엄히 꾸짖고 있다. 청정한 계(戒)에서 올바른 정(定)을 얻을 수 있으며, 이에 의해 날카로운 혜(慧)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선사는 선을 대중화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중생들의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십만여권의 경을 번역 발간하였다. 용성선사의 모든 생활은 선에서 얻어진 각(覺)에서 나왔으며, 선을 통한 중생교화의 구제를 위해 선의 보급에 전력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나라를 잃은 선사로서의 자기실현의 길을 항일 독립운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