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옵니다. 그 잔인하고 흉폭한 성격은 이미 말로써는 형언할 수가 없나이다. 어둠을 다 갖다 모았다 하겠으며, 또 금수보다도 훨씬 더하다 하겠나이다. 그러니 어찌, 천하가 다 존경하는 것에 불법(佛法)이 있는 줄을 알 리가 있겠읍니까? ---제불성현(諸佛聖賢)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은 이 간절한 발원을 들으사 신통의 힘을 빌어서 완악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멀리 달아나 자취를 감추게 하여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이규보,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 중에서
이때가 고려 고종 23년(1236)이니, 그 뒤로 16년 동안에 걸쳐서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하 이제 염려하시지 않아도 될 줄 믿사옵니다.\"
\"부처님의 가피력이 있을 것이야.\"
\"그러하옵니다. 어둠이 결코 밝음을 대적하지 못한다 하였사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부처님의 땅이었사옵니다. 용기를 잃지 마옵소서.\"
2
\"이제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침묵이 도(道)라 했으나, 수 십년 동안 몽고 오량캐들이 강토(疆土)를 유린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는데, 왕실은 이미 몽고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귀족과 대신들은 서로 앞다투어 그들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영화만을 도모하고 있으니, 어찌 도를 핑계삼아 이를 외면하고만 있겠는가. 고종 때 대장경을 판각하면서 부처님께 바쳤던 그 맹세를 벌써 잊었단 말인가. 이 땅이 불국토임을 말하지 않았던가.
이 땅이 부처의 땅임을 우리가 불가의 후손들임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녕 그것을 잊게 된다면 민족의 혼을 다시 찾을 수 없으리라. 썩은 선비 김 부식의 「삼국사기」가 어찌 우리 혼의 전부란 말이던가. 우리 역사가 어찌 신라·백제 ·고구려의 삼국에서 비롯한단 말인가. 단군의 고조선(古朝鮮)을 어찌 지워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하긴 묘청(妙淸)스님의 자주독립운동을 외세를 등에 업고서 짓밟은 인물이니 더 기대할 것도 없을 테지.
아 애닮도다 파묻힌 역사의 진실들이 춘추(春秋)의 필(筆)을 기다리고 있구나.\"
충렬왕(忠烈王)대를 살았던 선승(禪僧) 일연(一然)스님은 마침내 붓을 들어 묻히고 외면당했던 민족의 역사를 다시 복원한다. 충렬왕 7년(1281)경에
완성되니 이것이 바로 「삼국유사」다. 그 머리말에서 우리 민족의 신성함을 들어 이 땅 부처의 땅이며 우리 민족이 불가의 후손임을, 이렇게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옛날 공자가 말하기를, 예의와 음악으로 나리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써 정치를 베풀어야 하며 괴이함, 폭력, 어지러움, 귀신 등과 같은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아니한다 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나라가 열릴 때에는 하늘로부터 상서로운 조짐이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한 나라를 이끌 사람이 보통사람과 다름이 드러나는 법이니 그런 뒤에는 능히 큰 변화를 일으키고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럴진대, 우리 삼국의 시조들이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괴이하다고 여겨서 역사의 기록에서 제외시킴은 고루한 유학자들의 그릇된 사안(史眼)에서 비롯된 것이니 지금 바로잡지 아니하면 장차 이 나라 이 민족의 정기(正氣)를 상하게 될 것이다.\"
3
\"큰스님. 이또록 많은 책들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그리 베껴 적으시나이까? 무엇에 쓰시려는지요?\"
\"나라가 외적에게 침략 당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수록 자기 나라의 말과 역사를 지켜야 하네. 그것이 다시금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이지.\"
\"그렇지만 그것은 세간의 일이 아닙니까 스님. 이미 세간을 떠난 스님으로서는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읍니까? 여기(餘技)로 즐기신다면 혹 또 모르겠읍니다만.\"
\"그대는 세간과 출세간이 둘 아닌 이치도 모른단 말인가? 유마경에서 그토록 간절히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지 않았던가. 또 육조스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함은 토끼뿔을 구함과 같다’ 고.\"
\"더욱이, 이 땅이 부처의 땅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가 애당초 부처의 역사임에랴.\"
\"말씀이 사실이라면 좋겠읍니다만, 아무래도 그 말씀은 큰스님의 독단인 것 같습니다. 무슨 증거가 있어야지요.\"
\"그래 그렇겠지. 증거 없는 역사는 역사라고 할 수 없지. 이 책들은 「위서(魏書)」라는 중국 역사책인데 여기 좀 보게나.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이라 일컬으니 요임금과 동시대이니라’ \"
\"그럼, 우리나라의 처음이 단군왕검의 조선이라는 말씀이신지요?\"
\"암, 그렇지. 여길 또 보게나. 이것은 단군왕검의 조선이 부처님의 땅, 바로 불국토였음을 나타내는 것이지. 또 있지. 이것은 중국의 역사책 「고기(古記)」라네. 자세히 한번 읽어보게나.\"
\"고기에 이르되,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어 항상 하늘 아래의 세계에 뜻을 두고 세상을 그리워하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세상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각각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을 데리고 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렇지. 그 환웅의 아들이 단군인 게지. 단군은 환인의 손자고. 그런데 환인은 바로 석제환인(釋帝桓因) 즉 제석천이야 제석은 원래 천축의 토속신이었지만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교의 수호신이 된 게야. 그런 제석의 후손이 곧 우리 민족인데, 어찌 불가의 후손이라 함이 사견이고 독단이란 말인가?\"
\"제석천은 지금도 왕궁이나 사찰에서 종종 ‘제석도량(帝繹道場)’을 열어서 인간의 선악을 살피는 제석에게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알게 모르게 제석을 숭배해 온 것도 다 까닭이 있는 일이야.\"
\"그래서 이 땅이 부처의 땅이고 우리 민족이 불가의 후손이란 말씀이신지요?\"
\"그렇지. 또 아까 고기에서 읽었다시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다는 것은 곧 온 중생세계를 일컫는 말일세. 즉 널리 중생을 이익케 하여 부처님의 세계[佛國土]롤 실현해 가는 역사가 바로 우리의 민족사란 것이네.\"
\"왕실과 귀족, 대신, 온 백성 모두가 그러한 믿음을 투철하게 가진다면 오량캐인들 어찌 물러나지 않겠읍니까?\"
\"이래도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선승의 본분사에 벗어난다 하겠는가?\"
김호성/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며 불일회보 기자 및 보조사상연구원 간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