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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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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현응 1988년 10월 80호
가을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시월에 접어들면서 이 땅의 가을은 갖가지 예감과 징후를 드러내며 스산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감나무 잎새처럼 반짝인다. 오랜 세월을 농경시대로 보낸 우리에게 가을은 기쁨과 보람의 계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씨를 뿌리지 아니한 자와 김매고 가꾸기를 게을리 한 자는 후회와 비탄에 빠지고 마는 심판의 계절이다.
지난 무더운 계절을 힘겹게 보낸 사람에겐 가을은 새삼스럽게 두렵다. 가을은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과 보람을 안겨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슬픔과 좌절에 빠뜨릴까. 우리는 어느덧 인간의 눈어림과 짐작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계절의 이름과 시기의 구분에 스스로 함몰하고 마는 것을 느끼며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앞산과 뒷 계곡의 단풍과 낙엽 속에서 지새는 산중의 수도자나 이 거리 저 사람들 속에 부대끼는 시정의 생활인도 가을을 맞는 정서는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거대한 계절의 바뀜 앞에 운명처럼 숙연히 목을 드리우는 그 자태라니.
자연의 변화와 그 분위기에 쉽게 동화되곤 하는 산중사람들의 버릇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도회 속의 일상인도 늘상 계절의 속임수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버릇을 깨고 속임수를 알아채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거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이 일년의 후반이며 인생의 황혼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비약해서 말하면 이는 지배자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치 숙명처럼 여져 지는 가을쯤은 단호하게 거부해야만 한다. 아니면 웃음짓는 여유로움으로 밀쳐버려야 한다. 인생은 가을에서 겨울로의 변화처럼 일회적으로 끝장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일년이라는 것과 사계절이라는 것도 기나긴 변화와 진행의 한과정일 뿐이며 생멸과 윤회의 도상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래서 우리 앞에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다. 씨앗-싹-줄기-열매, 다시 씨앗으로 이어지는 콩의 생태에서 어디가 시작이며 어디가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느 과정에 도달했을 때 특별히 콩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과 진행 과정의 매순간을 우리는 콩이라 부른다.
올림픽이 끝났으니 모든 게 끝장인가? 그렇지 않으며, 이제부터 시작이다. 5공 비리도 시작이고 광주도 다시 시작이다. 민주화도 시작이고 통일도 또 다시 시작이다 내년의 나라살림을 찌는 예산 국회도 시작이고, 부끄럽고 한심한 불교의 개혁과 중흥도 이 가을에 다시 시작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가을은 이제 시작으로 인하여 마음 설레는 계절이다.
한편 이러한 가을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 할, 시작하는 사람들이 또 생겼다. 지난 9월 5일부터 사흘동안 조계종단이 주관하여 진행된 제9회 단일계단에서 배출된 삼백 명의 비구, 비구니스님들과 일백육십 명의 사미스님들이 그들이다. 개인 저마다의 삶에 있어서도 실로 의미깊은 새출발이겠지만, 교단으로서도 불법의 혜명을 이어가야 할 훌륭한 사람을 승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 크게 축하하고 격려해야겠다. 특히 지금의 불교현실과 사회현실의 어려움을 살펴볼 때 이들의 용기와 결단은 더없이 소중하고 값지다. 아무쪼록 종단은 이들을 잘 교육하고 수련시켜 인천(人天)의 사표가 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초발심 스님들도 두 눈을 똑똑히 뜨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사회 속의 일원으로 있을 때는 잘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우리 삶의 문제들을 이제 한걸음 물러선 객관적인 입장에서 차분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대들 앞에 크나큰 과제로 놓여 있는 난마처럼 뒤얽힌 중생사와 불교계의 문제를 그대들의 가을하늘처럼 투명하고 맑은 마음에 비추어 끌어ds기를 바란다. 그래서 절 집안의 선배들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중생들을 이고득락케 하라. 그대들로 인하여 이 맑은 가을에 승가는 자중자애, 자참자회해야 할 것이고, 우바새와 우바이는 삼귀의 수오계(三歸依 受五戒)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가을에 이제 다 끝났다고 자포자기해서는 안 될 것이고,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초조해 하거나 조급히 서둘러서도 안 될 것이다. 올해로 다 끝내려고 하지 말자. 또 내년이 있지 않은가. 가을 뒤에 겨울이 있다면 겨울 뒤엔 또 봄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의 노력과 실천은 앞을 내다보는 전망 속에서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을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의 시작이요 출발인 것이다.

현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