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르침의 통로를 여는 방편의 필요성 경전은 책이다. 책으로서의 경전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우리는 책을 읽고 지식 따위를 얻는다. 가르침의 기록인 경전을 알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우리는 왜 경전을 읽으며, 그 읽음을 통해 어떤 경로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가.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읽고 느끼는 가르침에의 견해들은 참으로 값어치있고 믿을만한 것들인가. 초기의 論書인 대비바사론이나 順正理論에는 이미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언어문자 개념 사이의 연관될 통해 어떻게 의미가 전달되는지를 보여주는 해석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는 경전상의 개념을 통해 말하는 사람(부처님)의 생각을 온전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가. 편견으로 글자에 막혀 망령된 해석들에 집착하지는 않은가 부처님의 참뜻을 이지러뜨림 없이 수용하고자 시작된 그같은 노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며, 이보다 조금이라도 개선된 정전 해석의 지침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가.
色郞是空, 空郞是色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애독하고 즐겨 인용하면서도, 또 이만큼 다양한 논란을 불러 일으킬 귀절도 없을 듯 싶다. 반야심경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들이 있으며 또한 그만큼 서로 다른 해석들이 뒤섞여있다. 예를 들면, 窺基는 二種의 집착을 깨뜨려 주는 귀절로, 圓測은 眞俗의 二諦와 相依相郞으로, 賢首는 郞色郞空의 관계로 각기 해석했다. 후대의 교학자들은 相宗, 空宗, 性宗 등으로 해석상 분류하고 자신들의 체계 안에 한데 얽어 들이기도 했다. 이런 異說들은 모순되기도 하고 서로 맞물리기도 하면서 복잡한 오해와 논쟁들을 유발시켰으며 이런 오해와 논쟁들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문자로된 책일 뿐인 경전을 읽고, 오해의 소지 없이 자유롭게 가르침으로 나아가 이를 생활 속에서 구현할 방편이 우리에게 있는가.
言語道斷, 心行處滅이라는 말이 있다. 不立文字, 直指人心이란 말도 있다. 유마경 제자품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문자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자의 성품을 떠나 문자를 두지 않는 것이 곧 해탈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肇論에서는 \"무릇 문자를 짓는 것은 미혹에서 비롯한다. 법을 취함에 가히 취할 것이 없으니 바로 문자의 相을 말한다. 허망한 거짓이름을 떠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반면에, 解深密經 第四에서는 \"言說文字를 버려서는 안된다.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유마경에서는 \"음성과 언어로써 불사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전자가 언어의 한계와 병폐를 지적한 것이라면, 후자는 언어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한 걸음 나아가 다음의 귀절들은 언어의 한계를 주목하면서 유용한 측면을 활용하는 방편을 시사한다.
攝大乘論 卷一에는 \"여러 불세존께서는 十相殊勝殊勝語를 갖고 계신다. …의미의 원인이 수승한 까닭에 언어의 결과가 수송하다\"고 했다. 이는 세속적인 나아가 聲聞乘의 한계를 넘어 수승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수승한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연한 태도와 언어관인 셈이다. 또 喩伽師地論 卷八十一에서는 \"契經의 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文이요 하나는 義다. 문장은 의미를 담고, 의미는 문장에 담긴다.… 곧 여섯 종류의 문장〈형식)에 의지하여 열가지 종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문장형식과 의미형태를 분류하여 경전을 해석하는 구체적인 방편을 보여준 것이다.
十地經論에서는 \"가르침이 이뤄지는 통로[敎道]\"로서의 언어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음성이나 名字들은 한계가 분명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부처님과 우리 사이에 가르침이 수행되는 통로가 열리는 것이니, 음정이나 언어나 개념 따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가르침을 수용하는 자세를 제시했다.
경전의 언어문자와 이의 해석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은 지금 우리들에게 어떤 본보기를 보여 주는가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갖고서 가르침에 임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의 다양한 현대적 해석들은 이 같은 견해들을 충분히 딛고 믿을 만한 해석의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가. 가르침의 통로는 열려 있는가.
끊임없이 佛性, 法性, 眞性, 覺性 따위를 문제삼는 가르침의 전통이 있다. 예를 들면, 見性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性을 본다\"라는 뜻의 이 말은 무엇을 말하자는 것인가. 불자들은 이런 표현을 들으면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가 그렇다면, 비슷한 유형의 표현을 가지고 간단한 추론을 한 번 해 보자
\"眞性을 迷하다, 迷眞性 : 진성을 깨닫다, 悟眞性\"이라는 가르침의 한 방식이었다.
㉠이 두 표현은 모두 \"깨달음이 현전 함\" 이후에야 가능한 언명들이다.
㉡깨달음은 체험이다. 그것은 분석하여 이해할 대상이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동사는 목적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 \"깨닫지 못한 상황\"은 깨달음과 대립되어 인식된다.
㉢이 \"깨닫지 못한 상황\"은 깨닫다라는 동사에 대하며 \"迷하다\"라는 동사로 개념화된다(表詮化). 즉, 迷라는 개념은 悟에 대한 상대개념으로서 悟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 동사화된 迷는 동작의 상대로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언어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깨달음의 체험에는 能所, 主客이 없기 때문에 迷를 통해서야 동작의 대상이 규정될 수 있다.
㉤그 이유는 迷한 결과로서의 현상에서부터 惜의 체험을 유도하기 위해 迷의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고의 경향들은 \"迷하다\"라는 동사를 통해 \"무엇을 迷j했는가\"라는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迷 또는 違의 대상에 대한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眞性이 迷의 목적어로 세워지고, 悟에 매개되어 悟의 목적어로도 상정된다.
㉦그러나, 애초에 迷는 행위가 아니다. (悟라는 체험을 통해서 본 悟 이전의 상황을 \"迷했다\"라고 표현한것 뿐이다.) 만약 그것이 집착이나 번뇌 등과 같은 어떤 종류의 동작을 기반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能所로 나누는 법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迷와 迷의 대상에 대한 분석의 과정이 생략된다면 悟의 대상으로서의 진성 따위는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또한 필요하지도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성이란 개념은 잘못된 분석의 과정에서 파생된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 見性이란 말도 비슷한 논리적 함정을 안고 있다. 아뭏든 이 추론을 다음과 같은 \"전통 교학자\"의 추론과 비교해 보는 일은 매우 유익해 보인다. 이는 특수한 개체의 相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性法을 벌어 \"無相性\"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옮아가는 추론의 과정을 보여 준다. (法藏 述「華嚴義海百門」第一緣起會寂門의 觀無相…新修大藏經 卷 p627 하단)
㉠티끌의 작고 둥근 모습은 마음이 變起시킨 것이어서, 거짓으로 세운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티끌의 相은 허무한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생긴 것은 자성이 없을 것이니, 이를 無相이라고 이름한다.
㉢經에서도 \"諸法의 본정은 空하다. 털끝만큼의 相도 없다\"고 했다.
㉣ 그러나, 개체의 相을비록 얻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상이 없다\"라고 하는 보편적인 표현의 뜻마저 끊어진 것은 아니다.
㉤相에 體가없기 때문에性의 法이 곧 세워진다.
㉥이 性의 法이 \"相이 없다\"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云云
이 敎證과 理證, 비유를 갖춘 추론은 眞空의 理性이 화엄교학 체계 전반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볼 때 매우 허술한 추론으로 보인다. 어떻게 티끌 하나로부터 無相性이라는 보편적인 원칙이 도출될 수 있겠는가. 性法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만, 그 근거는 실로 애매하다. 그래서인지 이 추론은 비유로서 끝을 맺고 있다.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하지만, 그 뱀은 사실 뱀이 아니다. 뱀이라는 것은 원래 없다 (無蛇), 티끌을 보고 마음은 相으로 착각하여 變起시키지만 그 相은 사실은 허무하다 (無相) 새끼줄이 나중에 뱀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근거인 것처럼 性法도 無相임을 확인시켜 줄 근거가 된다.
이런 추론은 心識說이나 緣起法 등의 이론들을 뒤에 깔고 있어서 이 추론 자체만으로 타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적인 사고방식이나, 논리적인 해석이론의 입장에서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현실적으로 이런 표현방식이 현대적인 논리나 해석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유형의 논리 위에, 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표현방식 위에 근거하고 있는지 조차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닌가. 예를 들어 中論의 논술방식이 \"변증법적\"이라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비슷한 유형의 논리를 사용하는 天台나 華嚴의 교학에도 비슷한 선입견들이 작용하고 있다. 또한 현대적인 학문방법론을 활용해서 해석하는 풍토들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세간에서 공언된 방법론들이 아무리 믿을 만한 영향력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이 가르침의 통로를 여는 방편으로도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은 성급한 것이다.
天台敎學에 소위 七番五重이라는 해석의 원칙이 있다. 이는 각 해석의 부분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실제적인 장애를 물리치고 수행을 통해 三脫門에 들게 하는, 이해와 실천의 구체적 전략의 과정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해석의 입장은 의미와 이해의 문제에만 몰두하는 서구적 해석이론과는 발상에서부터 다른 것이다.
어쨌거나 앞에서 의문과 실례들을 장황하게 나열한 것은 언어로 된 경전을 통해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일이 단순한 \"읽음\"을 통해서는 이뤄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읽음\"파 더불어 \"어떤 방편\"을 활용함으로써 부처님과의 사이에 좀더 믿을 만한 \"가르침의 통로\"를 열어 두어야 한다. 이 가르침의 통로를 열기 위한 \"어떤 방편\"을 모색해보려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첫째 이유이다.
혜묵/혜묵. 경기도 봉선사로 출가하였다. 해인지 사무장을 지낸 바 있으며 지금은 토굴에서 정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