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재속(在俗)의 성재(聖者), 유마
이상은 어느 날 숲속의 정적 속에서 좌선에 몰두하던 붓다의 고제(高第) 샤리푸트라를 질타하는 유마의 발언이다. 치밀한 희곡적 구성을 바탕으로 대승불교 사상의 진수(眞髓)를 설하는 유마경의 주인공이며 우리에게는 유마거사로 더욱 친근한 그는 붓다의 재세(在世)시 랴자그라하에서 가까운 바이살리성의 시중에 살면서 석존의 십대 제자보다 깊은 경지에 도달한 재속(在俗)의 성자(聖者)이다. 그는 무구청(無垢稱), 정명(淨名), 이구(離垢)라고 한역(漢譯)되는 이름처럼 번뇌 속에 있으나 번뇌의 물듦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자유인이다. 유마는 ‘인간은 번뇌의 오물에 의해 더럽혀져 있으나 더러움 그 자체는 아니다 ’라는 고타마 붓다의 선언을, 술판에 끼어들고 시시한 일로 싸움질을 하는 범부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도 자유롭고 당당하게 구현시키는 불교적 자유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마는 어느 날 자리에 누워 병을 앓기 시작한다. 유마경은 유마 자신의 코멘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병(病)의 의미를 해설하고 있다. ‘중생의 무지[痴]가 남아있는 한, 형태에의 집착[有愛]이 남아 있는 한, 나의 병도 계속되리니 만일 일체중생이 병들지 않는다면 나의 병도 곧 나으리라.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에 들었고 생사가 있음에 병도 있거니와 만약 중생이 병들지 않는다면 나의 병도 곧 나으리라’는 것이다. 옛부터 유마경의 주석자들은 이 유마의 병을 ‘방편시설(方便施說)’이라고 불렀다. 곧 유마경의 입불이(入不二) 정신을 거양하기 위한 유마 자신의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유마가 중생과 함께 앓는 병은 인혹(人惑)의 병이며 물혹(物惑)의 병이다. 우리의 모든 갈등과 위선, 폭력과 저항, 슬픔과 고독은 이 인혹과 불혹에서부터 싹트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인혹과 물혹이 아니라 오히려 유마가 설파하고 있는 ‘도법(道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일상생활을 누리는 것은 참다운 좌선이다[不捨道法而現凡夫事是爲要坐]’,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든다[不斷煩腦而入涅槃]’라고 하는 대승경전 특유의 반어적인 진술이다 이 구절은, 아무래도 경전번역자들의 손길이 닿기는 했겠지만, 인도불교의 종교적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세 초월적인 열반이 구체적이고도 섬세한 감각을 지닌 중국인들의 자유정신에 스며들어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해석학(解釋學)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분석함은 이 글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아뭏든 반야계 경전은 모든 개념적인 집착을 피하하기 위해 다양한 변증법적 부정방식을 전개한다. 그리고 이 부정의 원리와 그 근저에 깔린 체험 속에서 이미 불교의 실천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든다’라는 유마의 선언은 이미 더 이상 반어적 명제가 아닌 것이다. 즉 종래의 불교가 이루어 놓은 계(戒) →정(定) →혜(慧)라는 삼학(三學)의 수행 방향을 역전시키면서 지혜를 삼학의 주요 포인트로 떠올리는 것이다. 번뇌나 윤회는 끊어 버려야할 인간의 원죄가 아니라 오히려 성취해야 할 역동적인 삶 그 자체로서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번뇌나 윤회를 끊지 않고 오히려 성취한다는 것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프레임Frame을 체득함으로써 항상 새롭게 인간의 숙업(宿業)을 투시하고 삶의 근저에서부터의 투탈자재(透脫自在)한 자유를 실현해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 긍정의 시각은 혜능(慧能)을 기점으로 하는 중국선의 실천에도 크나큰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그만큼 유마경은 중국선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2)선(輝)의 종교적 패러독스Pradox
우리는 샤리푸트라의 좌선에 대한 유마의 비판을 되새길 때마다 한국불교의 선불교 운동, 넓게는 혁신 운동에 대한 방향성과 과제 인식, 그리고 변혁주체의 혁신 의지를 당연히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선불교를 불교적 체험과 그 실천행법(實錢行法)의 대표적인 양식이라고 전제한다면 오늘날 한국 선불교는 ‘선(輝)은 있지만 선의 구상적(具象的) 실천, 즉 선바라밀(禪波羅寶)의 존재는 없다’는 것이 나의 일차적인 지론이다. ‘선(輝)은 모든 불교적 실천의 근본[禪是波羅蜜之本]’이라는 나가르쥬나의 언명처럼 선의 깨달음과 세계인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는 불교적 실천의 근본적인 패러다임paradigm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사변에 머문 채 영원히 결론지을 수 없는 선과 교, 순수와 참여, 이론과 실천이라고 하는 이분법적(二分法的)인 한정(限定)이 바로 불교 특유의 총체적 실천을 가로막는 우리 자신의 한계이다 승가의 불교 인식은 이데올로기에 종속됨을 거세게 부정하는 직현심성(直顯心性)적인 가치와 실천에 투철함으로써 여타의 강단교학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오늘 이 시점에서도 선이 한국불교의 숨은 저력이라고 인정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선수행이 갖는 개인적 실존에의 투철함, 불교적 의식의 생산을 위한 반권적(反權的)사유, 출세간적 행동양식의 유연성이라는 전통 때문이다. 즉 선은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끈질기고 치열한 종교적 패러독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 중국 혁명사상사에서도 관찰되는 바이지만 사회 변혁의 급진적인 이념과 불교를 연결시키는 공통적 기반도 역시 선이 갖는 종교적 패러독스의 논리에서 출발한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선불교 운동의 실천 주체로서 한국 승가는 이 종교적 패러독스를 어떻게 수용하고 풀어 나가야 하는 것일까? 깨달음의 성격이 개인의 내면적 체험이라는 이유로 언제까지나 이 종교적 패러독스를 미화시키고만 있는 채로는 구상성(具象性)을 갖춘 실천적인 선불교 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깨달음이 개인의 사유품(私有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일 수 없으며, 또한 자유를 향한 길일 수도 없다. 이미 폭력적 체질이 굳어버린 절뺏기 싸움, 권모술수에는 능하지만 정작 한오라기의 불교적 의식도 생산할 수 없는 교단은 이미 병들어 죽은 목숨과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제도나 기구가 완벽하더라도 창조적인 의식을 창출할 수 없는 집단은 조만간 부패하여 자멸(自滅)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입만 열면 ‘깨달음, 깨달음’ 하면서도 구상적 실천은 없으며, 전체 승가를 하나의 운동체로 결속시키는 선불교적인 과제인식이 부족한 우리의 현실은 바로 유마가 염려하고 질타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의 종교적 패러독스와 광대한 포섭적 화해정신을 갖춘 화엄의 종교적 세계관을 구상적(具象的)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고리가 아직도 미약하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깨달음의 새벽을 향해 묵묵히 그러나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거세게 나아가자.
일지/一指. 1974년 백양사로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자운율사에게 비구계를 수지했고 해인강원과 율원을 수료했다. 한때 \'선사상\'과 \'월간법회\'의 편집일을 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낙산사 교무로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