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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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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행자 1988년 10월 80호
부처님!
떠나기 싫은 듯 유난히도 우렁차게 울어대는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또한 하루하루가 다르게 맑아지는 산자락과 높아지는 하늘을 보면서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낌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제 머리 위에는 당신이 성불하시고 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당신을 해친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셨다는 글이 액자로 걸려 있읍니다. 저는 이 글귀를 밤낮으로 대하면서 늘 회의에 빠지곤 합니다.
부처님!
개인을 해친 자는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와 민족을 해친 자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 나라가 지금 이 지정이 된 것도 1945년 팔월 십오일 이후 나라와 겨레를 해친 자들을 그대로 살려 두었기 때문이 아닌지요?
당신의 말씀 중에서 재가 가장 따르려고 애를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해하는 말씀이 ‘살생하지 말라’입니다. 서로 죽이지 않으면 원수가 생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전쟁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권력에 미쳐서, 돈에 미쳐서 형제들을 총칼로 죽이기를 서슴치 않는 무리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들에게 \"살생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고 말로 타일러야만 합니까?
부처님!
당신도 들으셨겠지요? 지난 여름 지글지글 끓고 있는 아스팔트 바닥에 드러누운 채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고 외치는 우리 아이들의 절규를. 이들에게 독가스를 쏘아대고 곤봉으로 마구 두들겨 패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들도 용서해야만 합니까.
부처님!
대자대비하신 모습으로 미소만 띠고 계시지 말고 이제쯤은 무슨 말씀이라도 좀 해 주십시오. 두 눈 부릅뜨시고 그들에게 역사의 철퇴를 내리칠 수는 없으십니까?
1988년 구월 팔일.
부처님, 당신은 아십니까. 이 날이 무슨 날인지 ··. 지금으로부터 사십사년 전인 1945년 구월 팔일. 이 날은 미국 군대가 점령군으로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날입니다.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다 암초에 얹혀서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된 ‘셔먼호’는 부족한 물자를 대주는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조선 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리고 말았읍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사건을 빌미로 삼아서 1871년에 강화도로 쳐들어 왔읍니다. 한국과 미국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읍니다.
그러나 당시의 봉건 정부는 이런 그들과 전쟁을 치르고서도 미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나라를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리라고 믿었지만….
그들은 1906년 칠월 일본과 ‘태프트-카쓰라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병합을 인정하고 그 대신에 미국은 필리핀 지배를 보장받았읍니다.
그로부터 사십육년이 지난 구월 팔일, 그들은 다시 점령군으로 온 것입니다. 이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다른 못된 짓은 모두 제쳐 놓고라도 오늘은 부처님 당신께 두 가지 사실 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재주4·3 민중항쟁’입니다. 전체 도민수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칠, 팔만 명을 학살한 사건 말입니다.
1948년 사월 삼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주위의 각 봉우리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시작된 ‘제주 4·3 항쟁’은 1957넌 사월 이일 최후의 유격대인 오원균이 생포될 때까지 만 십년에 걸쳐 계속되지만, 사실상의 진압과 저항은 항쟁이 일어난 지 일년쯤 뒤인 49년 봄까지의 사이에 집중되었읍니다.
미군은 즉각 물러가라, 망국 단독선거 절대 반대, 투옥중인 애국지사를 즉각 석방하라, 유엔 한국위원단은 즉각 돌아가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 한국통일 독립만세 등의 주장을 하며 제주민중들은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읍니다. 그런데 미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흑심대로 이 땅을 분단국가로 탄생시키기 위해 그들의 하수인 이승만 우익반동세력으로 하여금 제 민족을 학살하도록 조종했읍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민중을 개·돼지 때려잡듯 하는 것도 부족해서 심지어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조차 남겨 놓지 않도록 삼광작전을 폈읍니다.
‘4·3 항쟁’은 2차대전이 끝난 뒤 식민지, 반식민지에서 전개된 최초의 반미 투쟁이며, 그 뒤로 그리스, 베트남 동남아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국가의 민중들이 미국을 상대로 투쟁한 비정규전의 최초의 사례가 되기도 했읍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1980년 오월’입니다. 제도교육과 관제언론에 눈이 먼 어리석은 백성들은 미국을 혈맹이요 맹방이라고 굳게 믿고서 ‘80년 오월’에는 5공화국을 탄생시키기 위해 군인들이 광주를 피바다로 만드는 순간에도 ‘평화의 나라, 인권의 나라인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겠지’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읍니다. 오히려 이 때 그들은 194,년 구월 팔월 이 땅에 들어와 이승만으로부터 영광스럽게 넘겨받은 군사작전권을 마음껏 휘둘러댔읍니다.
부처님, 당신도 아시죠?
1980년 오월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은 반미의 무풍지대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반동정권에 눈이 어두워 금수강산을 빌려주고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읍니다. 한 가족이 사십여 년 동안 생이별한 것도 억울한데 내 핏줄을 찾겠다는 말만 꺼내도 빨갱이로 몰려서 철창 신세를 지기도 했읍니다.
부처님,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구상의 인종이 모두 모인다는 잔치에 한 핏줄인 이북의 동포들만 이 땅에 오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북의 동포들과는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철창 속에 갇혀있는 양심수만은 석방해서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잔치가 아니겠읍니까. 양심수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해서 통일과 민족의 이익,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해 온몸을 던져 실천한 우리의 형제 자매가 아닙니까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손에 피를 묻히고 물고문과 전기고문과 성고문을 서슴없이 하는 독재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의 ‘살생하지 말라’는 말씀이 담긴 액자가 머리 위에서 견디기 어려운 무게로 눌려옵니다.
부처님 !
가슴이 너무도 답답하여 불교를 믿지도 않는 제가 오늘 이렇게 무릎 꿇고 당신에게 애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참자유 세상, 참 평등의 세상을 이루게 해 주십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