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 어느새 가을이다. 귀뚜라미 노래소리가 한 옥타아브 을라가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한여름도 초가을도 아닌 한가을(한가위)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 가을을 위하여, 이 가을을 맞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준비들이 필요했을까 지금쯤 들녘에는 추수가 한창일 테고, 길가에는 들국화랑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터인데, 그러고 보니 서울은 좀 답답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그저 차바퀴 굴러 가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맡겨두고 싶다. 시골 어느 후미진 곳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흰구름 몇 점 두둥실 흘러가는 맑은 하늘을 보고싶다. 그동안 천일기도 봉행한답시고 86년 겨울부터 아직까지 나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쌓여서 그리된지도 모르겠다. 바랑이나 하나 양어깨에 턱 걸머지고 걷는 기분, 떠나는 기분은 아마 세상사람들은 쉽사리 맛보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혼자라면 더욱 좋다. 누가 곁에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무소뿔처럼 홀로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 해는 더 기다려야 한다. 천일기도회향이 내년 이맘때쯤이니, 마음만 그럴 뿐이지 쉽사리 떠날 수는 없다. 안 떠나는 여행이다.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가든지 가면 되돌아와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집시요, 보혜미안이다. 떠돈다는 것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올 가능성을 항상 갖고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귀소본능을 합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처음 떠날 때와 같은 마음을 갖고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의 갖가지 찌꺼기들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숱한 정보들을 담아올 것이다. 그래서 떠남은 곧 되돌아옴이고, 되돌아옴은 떠남과 다른 되돌아옴이다. 이처럼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불교의 전문용어로는 무등이등(無等而等) 이요, 등이무등(等而無等)이다. 그렇다, 반야심경의 후미에 나오는 무등등(無等等)이다. 중생과 부처는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무엇이 같고 다르다면 어떤 점이 다른가 왜 같지 않으면 안 되고 다르지 않으면 안 되는가. 정말 부처와 중생의 세계는 구분되어야 하는가 아니라고 해서 뒤범벅을 만들어 놓을 수는 더욱 없지 않은가.
떠나는 얘기를 하다보니 꽤나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난다. 같은 도반 스님네와 함께 제주 한라산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리운 친구, 종열스님도 같은 일행이었다. 벌써 만10년이 넘은 이야기이지만 내겐 지금까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그 스님은 백록담에 손을 담근 채 내게 물었다.
\"스님은 반야심경의 ‘무등등주(無等等脫)’를 어떻게 해석하오?\" 나는 이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그가 농담으로 했다면 농담으로 받아야겠지만 그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감했다. 법거량은 시작되었는데 이건 도대체가 깜깜이었다. 대답이 없자 그가 대신 대답하였다. \"부처와 중생이지.\"
그 일이 있은 뒤로 나는 경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토록 고마운 벗은 다시없었던 듯 싶다. 아무튼 그 뒤로 경전을 대하면서 항상 중생과 부처 사이를 왕래하는 습관을 길들였으며, 같고 다를 점에 착안하곤 하였다. 우리가 조금만 눈길을 돌려 딴전을 피우다보면 어느새 우리가 원하고 기다리던 가르침은 슬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 그래서 정신차리고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다. 그렇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시무등등주를 이해하지 못하면 숱한 가르침들을 그냥 건너뛰기가 쉽다. 우선 반야심경의 시무등등주를 올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현재 한글로 번역된 모든 반야심경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견줄 바 없는 주문’이나 또한 이와 비슷한 뜻으로 표현되어있다. 이런 표현이 맞다면 구태여 등(等)자를 두자씩 놓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엔 분명히 또다른 의미가 숨겨있다. 즉 무등이등(無等而等)이며 그 뜻은 ‘견줄 바 없지만 두루한 가르침’이다. 앞의 표현은 어조사 이(而)자가 생략된 것이다.
만일 부처와 중생의 세계가 엄격히 구분되기만 하고 평등해질 수 없다면, 기독교에서 인간이 절대자와 엄격히 구분되어 도달할 수 없는 점과 다를 게 없다.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중생과 부처가 같을 수 없는 열여덟 가지 법이 있지만, 결국 부처는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의 세계에 돌아와 중생과 어울려 중생의 아픔을 위무해야 한다. 부처와 중생의 본질은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무등이등이요, 무등등이다. 견줄 바 없지만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한 가르침[呪]이다. 주문[呪]은 비밀 주를 가리키는 말만이 아니다. 그것은 교설을 뜻한다. 크고 밝고 위없고 참으로 친근감 가는 반야심경의 교설이다.
원각경보안보살장의 ‘원각보조적멸무이(圓覺普照寂滅無二)’는 과연 종전의 번역대로 ‘원각이 두루 비치고 적멸하여 둘이 없는것’일까. 아니다. ‘원각에는 보조[惺惺]와 척멸[寂寂]이 본래 없는 것’이다. 또한 같은 보안장의 ‘각원명고현심청정(覺圓明故顆心淸淨)’은 ‘깨달음이 원만하고 밝으므로 마음의 청정이 나타난다’고 해야 할까. 구태여 마음의 청정을 드러냄으로써 잠정적으로 마음의 오염을 표현해야할까 아니다. 이것은 ‘깨달음이 원명(圓明)하므로 나타난 마음 그대로가 청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금강경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즉견여래(凡所有相皆是虛妄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를 ‘모든 상[諸相]이 상 아닌 것[非相]으로 볼 것 같으면[若見], 여래를 보리라’와 같이 번역해야 할까 금강경은 즉공론[卽空論]이요 즉비룬[卽非論]인데, 그렇게 제상과 비상을 잠정적으로 구분해야 할까 이것은 ‘제상과 비상을 동시에 보면[若見] 곧 여래를 본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러한 번역들을 살펴보면서 불서, 특히 경전을 좀더 본래의 뜻과 본래의 가르침에 다가서도록 번역하려고 힘쓰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벌써 여러 해, 거의 20권에 가까운 역저를내면서 특히 가을이 되면 그 벗의, 시무등등주를 바로 알라던 말이 생각나곤 한다.
동봉/東峰: 혜인 강원을 졸업하고 해인 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지금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중앙지도법사와 대각사 교무일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반야심경연구」,「대각사상과 전개」,「사바세계로 온 부처님의 편지」들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