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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진홍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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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8년 10월 80호
서울의 홍인문 밖, 삼각산 남록(南麗)에 위치한 청룡사는 행정구역으로는 종로구 숭인동이되 차를 타고는 ‘창신동으로 갑시다’ 해야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동덕여고 옆길을 따라 한참 오르면 지금은 폐허가 된, 철거민들의 옛 보금자리가 황량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위켠으로 일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청룡사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의 웅장한 규모에 견주어 조금 쓸쓸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오랜 풍상을 견뎌 오는 사이에 깃든 그 고풍스러움 때문이리라.
청룡사는 고려 태조 때 창건된 이래로 지금까지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해 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고려초에, 풍수 도참가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고려 오백년 뒤에 조선이 일어설 것을 미리 내다보았으니, ‘조선의 역사를 늦추려면 한양의 좌청룡 산기슭에 절을 짓되 비구니가 거하게 하라’ 한 그의 유언을 받들어 창건하였으며, 지리적으로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여 청룡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본디 양(陽)의 자리인 이곳에 굳이 비구니 사찰을 건립한 까닭은 그 양의 기운을 누름으로써 이씨조선의 정기를 막을수 있다는, 음양의 이치에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청룡사는 일찍이 왕비 두 명과 공주 한 명이 승려가 되어 수도한 곳이기도 하다. 곧, 고려말 공민왕의 비 혜비가 나라를 잃은 뒤에 출가한 곳이며,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조임금 때 계비 강씨의 소생인 경순공주가 왕자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출가하였다. 또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이곳 우화루에서 왕비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던 바 뒤에 왕비는 후궁과 시녀들과 더불어 비구니가 되어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수도정진하였으니, 곧 청룡사는 ‘비운의 왕조 여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억척스러운 비구니 스님들에 의해 일천 여년의 면면한 역사를 이어 온 오늘의 청룡사는, 한해 전에, 대만에서 학위를 받아 ‘이 나라 최초의 비구니 박사’가 된 진홍(眞弘) 스님이 법랍 삼십여 년을 살아 온 곳이며, 또 진홍스님의 외곬 길을 위하여 갖은 정성으로 뒷바라지한 은사 스님인 윤호스님이 거의 팔십여 성상을 지켜 온 도량이기도 하다.

진흥스님은, 댓돌 위에 놓인 앙증스레 작은 고무신의 주인답게, 체구도 자그마하고, 아직도 고운 손과 발은 희다 못해 창호지 빛처럼 창백하다.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하고 음성 또한 또랑또랑하여, 누구든 한눈에 그 성품이 대단히 꼿꼿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스님은 동국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뒤에 미국에 유학할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송광사의 구산 큰스님의 권유로 대만으로 향했다. 우리의 불교가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 유학길이었다.
중국문화대학 철학연구소에 입학한 스님은 일년 반 가까이 묘덕암자(妙德蘭者) 에 머물면서 중국의 언어와 문화, 생활양식을 익혀야 했다.
본디 학문하는 이라면 으례 지니는, 지기 싫어하는 악착같은 성품이 진흥스님에게도 있는지라, 익숙해질
때까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책을 보고 공부했다 처음에는 ‘과연 내가 남의 나라말로 논문을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러나 막상 부딪치자 예상보다 잘해내게 되더라는 것이다. 논문이 잘 안 되서 고통스러울 때면 왜 이 낯선 고장에서 사서 고생하는가 싶다가도, 술술 정리가 될 즈음이면 신심이 나서 밤을 꼬박 새곤 하였다. \"밥을 방금 먹고도 배가 허전하게 느껴집디다. 공부로 인한 욕구불만이 허기진 느낌으로 나타났던 게지요.\"
낯선 땅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박사학위 논문은 ‘중국 격의(格義)불교의 연구.’ 육백자 원고지 삼백오십 매의 이 논문은 인도불교가 거대한 중국땅에 전입되면서
중국화된 과정을 연구한 것으로, 대만의 학계에서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중국인에 의하여 재창조된 격의불교가 다시 우리나라에 진입되면서 크게 영향을 미쳤기에, 그에 대한 연구는 한국불교의 연구에도 긴요한 것으로서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스님은 올 여름 한철 내내 이 논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머지 않아 도서출판 민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뚜렷한 자가 일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이보다 젊게 사는 법이다. 비구니 스님들이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진홍스님은 같은 또래의 중년 여자들보다 족히 십년은 더 젊어보인다. 그러나 스님은 자기 양심이 가장 잘 아는 법이라며, ‘나이 먹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논문 쓰기 전만 해도 학생들이 모두 저희와 동년배인줄로 여기다가 학생증의 생년월일을 보고 놀라곤 했지요. 그러나 자연을 어찌 거역할 수 있나요?
세월이 가는데 …\"
논문 쓰기에 온 정열을 바친 탓인지 논문을 끝내고 나서 거울을 보니, 눈물이 날 만큼 나이들어 보이더란다. 무척이나 속이 상하여 서울에 오면 문밖 출입일량 일체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며, 다 부질없는 생각이란 듯이 후후 웃으시는 스님은 그래도 여전히 삼십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학 시절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밤샘 때문에 입맛을 잃은 데에다 워낙 기름기 많은 중국 음식인지라, 아침공양 때면 수저를 들지도 못하고 망연자실하여 있다가, 물 한 대접 떠놓고 간신히 물 한 모금에 밥 한술 먹곤 한 시절이 있었다.
\"한 삼년 사니까 음식이 입에 맞습디다. 그 나라 음식을 잘 먹어야 그 나라말도 잘한다지요?\"
묘덕암자에서의 절 생활을 마치고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한 스님은 손수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장만하여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김으로써, 흔히 공부하느라고 해치기 쉬운 건강을 무리없이 지켜나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스님들이 띄운 편지는 온통 잘먹으라는 이야기뿐이었으니, 심지어는 학위는 못따도 좋으니 건강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눈물겨운’ 사연들도 있었다
그런 마음씀이 고마와서도, 하루세끼를 양을 일정하게 재어가며 밥을 지어먹었다. 그렇듯 사실 철저한 식생활 습관이 육년의 힘겨운 유학생활을 건강하게 지켜 주었던 것이다.

대만에서 여섯 해를 나면서도 그곳이 계엄령하인지도 모르고 지냈을 정도로 스님의 관심은 오로지 학문뿐이었다. 한번은, 공부에 너무 열중하여, 은사 스님이 보내 주신 선물 상자를 끌러보는 것도 잊은 채로 지낸 적이 있었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비로소 상자를 뜯어보니, 비닐을 몇 겹을 두른 속에는 깨 넣고 볶은 고추장에 재인 김이 차곡차곡 쟁여 있는데 벌레가 하얗게 끼어 있더라는 것이다.
\"공부에 파묻혀 은사 스님의 정성을 그렇게 덧없이 내버리게 되자 죄송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지요. 그러면서도 벌레같은 미물이 그 속에 먹을 것이 들어 있음을 나보다 먼저 알았다 싶으니까, \'영리한 건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즈음 들어 중국 대륙과의 교류가 진전되는 것을 스님은 퍽 반갑게 여긴다. 학자로서 방대한 자료의 수집도 탐나는 일이지만,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돈황, 막고굴 등지를 돌며 선대의 불제자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싶어서이다.
얼마 전에 스님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간, 중국 본토 출신의 한 대만 스님은 이 나라의 사찰을 구석구석 돌아보던 중에 마치 고향 땅을 밟은 듯이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그것은 대만은 기후가 습한 탓에 사찰이 시멘트로 지은 건물에다 법당에는 후불 탱화조차 없는 실정인 데에 반하여, 일찍이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의 사찰 건물 양식이 오히려 중국 대륙의 불교문화와 한층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대만이 중국 본토에 견주어 문화유적이라 할 만한 것은 없지만, 승려든 일반 신도든 한결같이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며 수행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며 강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생활 속에 불교가 깊숙이 융해되어 있지요. 집집마다 위패와 함께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이런 대만인의 신앙은 불교와 유교, 도교가 끈끈하게 혼합된 형태를 그립니다.\"
스님은 귀국 뒤에 모교인 동국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선가귀감\'을 맡았다. 한편 승가대학과 해동불교대학에서도 \'중국 불교사\'를 강의하였다. 강의하는 일 외에, 더러 사찰의 법회에서 법문을 하기도 한다. 진홍스님은 교단에 선 자신의 역할이 결코 단순한 \'지식 전달자\'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잇다. 많은 것을 수용할 나이의 패기 있는 청년학도들과 학생 스님네의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서 책임과 사명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마흔 아홉 해 동안 전법의 일념으로 행하심을 본받아, 배우고 익힌 법을 올바르게 펴는 일에 애써 노력할 따름이다.
그런 스님의 의지가 엿보여서일까, 학부 시절에는 남 놀 때 다 논 뒤에 밤 새워 공부하곤 하였지만, 지금은 피곤하면 시간에 관계없이 푹 자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나깨나 공부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님은 \'잠 잘 자는 것이 최고의 영양제\'라는 건강철학을 펼쳐 보인다.

진홍스님은 비구와 비구니가 능력이나 본성에서는 서로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는 구조적으로 여성이 차별대우를 받고 있음이 또한 사실이기에, 남녀의 차별이 없는 학문의 길을 택한 것이 그나마 여간 만족스럽지가 않다.
학위를 받을 때까지는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 없이 공부에만 푹 젖어 살았다. 주변에서 더러, 계획을 세워 단계적으로 공부를 추진해가라고 훈수를 두곤 하지만, 한번 가면 되오지 않는 이 소중한 시간을 후회없이 활용하고자 함이 스님의 생활신조이다.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정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하물며 그것이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일임에랴.
힘들고 어려울 때면 스님은 합장하여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의 말미에는 단 한번도 빼놓은 적 없는 간절한 서원으로써 원을 세운다.

가사를 머리에 이고 몇 겁을 지나더라도 부처님 말씀 전하지 못하면 다 소용없는 일, 부처님, 한평생 삶을 부처님 말씀 전하게 해주소서.

글/이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