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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주경(阿摩晝經) 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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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8년 10월 80호
사람은 개성을 가진 생명체이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명이 저마다 위대함을 인정하고 또한 그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한없는 존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없는 생명은 없다. 더욱이 인간의 생명은 저마다 지닌 아름다움과 신비함으로 그 의미와 가치가 더욱 드러난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다. 그리고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인간은 한 생명체로 존재하게 되는 경우와 그 존재의 의미와 표현을 잃어버리는 경우에 생명의 개성을 드러낸다. 또한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른 희망과 기쁨 슬픔과 괴로움에 대한 표현과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을 지닌 것을 존중하고 애지중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제 자타의 생명을 존중함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 행동의 근본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생명을 존중함이 불교의 근본이요 도덕의 원리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의 생명도 사랑한다. 자신의 존엄성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가벼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존엄하게 여길 일이다. 그럼으로써 생명을 촉진하고 발전시켜서 그것을 완성시킬 수 있다
남의 생명을 파괴하는 살인이나 전쟁을 악이라고 한다.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고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목숨을 죽이거나 해하지도 말게 하며, 간음이나 도둑질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생을 하여 생명을 기쁘게 하고 보시하여 친절을 베푸는 까닭은 맑고 깨끗한 몸가짐을 가져 성실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남의 생명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일컬어 선이라 하고 또한 자비라고도 한다. 자비는 남의 고통을 대신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태도와 행동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한편 남을 가볍게 보아 허망한 짓을 하지도 않는 것이다.

마납아 수행하는 사람은 성계(聖戒)를 닦아 염착(梁着)하지 않는다 안으로 희락을 가지며 눈은 빛깔에 얽매임이 없이 견고하고 고요하여 탐착하지 않는다. 걱정이나 근심이 없어 악에 빠지지 않으며 귀, 코, 혀, 몸, 뜻도 또한 이와 같아서 육촉(六觸)을 제어하고 보호하여 항복 받아 안온을 얻게 하나니, 이는 마치 여섯 마리를 멍에 한 수레에서 좋은 마부가 채찍을 잡고 억제하여 수레바퀴가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도 또한 그와 같아 육근(六根)의 말을 몰고도 안온하여 실수가 없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자학자멸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해칠 뿐만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도 해친다. 또한 마음이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서 되는 대로 행동하여 마치 날뛰는 말과 같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아주느냐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남을 어떻게 보고 대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내가 나를 바르게 보고 바른 태도로 살아간다면 남을 보는 눈도 올바를 것이다. 이와 같이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게 하며 자기의 목표를 기어이 달성하려는 씩씩한 정신과 기상을 가지게 한다 그리하여 무사안일주의와 무위도식의 생활은 사라지고 강한 의욕과 불타는 신념을 가지고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전진함으로써 승리와 성공을 얻게 될 것이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걷는 자가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만이 저 넓고 깊은 대해에 이르른다. 그래서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자아관을 가진 사람은 생명에의 개성을 알고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마납아 깨끗한 성계를 가지고 수행하는 자는 음식이 족한 줄 알고 또한 맛에 탐착하지 않으며 몸에 괴로움과 근심이 없게 한다 거만하지 않고 그 몸을 잘 조절하여 옛 괴로움을 없애고 새 괴로움이 생기지 않게 한다. 힘은 있고 일은 없어 그 몸을 안락하게 한다. 사람이 부스럼에 약을 발라 곧 병이 낫게 함과 같고, 모양은 내나 스스로 잘난 체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수레에 기름을 쳐서 잘 돌아가게 한 뒤 운전하여 갈 곳으로 가는 것과 같이 음식을 몸을 지탱하는 것으로 여기며 도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 사람의 은혜 속에서 성장하였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하나의 생명체가 지금 이 시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정성과 수고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또한 모든 이들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해야 한다. 배은망덕은 인간으로서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배은망덕할 이치도 없겠지만 부단히 자각하고 노력하여 수행함으로써 지혜와 자비의 덕을 가득 채운 큰그릇으로 될 수 있다. 우리는 네 가지의 큰 은혜를 알고 보답해야 한다. 첫째는 국가의 은혜다. 흙과 산과 물 그리고 하늘과 태양과 바람 등과 같은 것이 없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자연과 천지의 은혜에 감사하고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또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 흙과 나무, 물과 곡식이 나의 생명의 원천이 되었으며, 나의 존재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이야 한다. 또한 내가 태어난 자랑스러운 조국과 강토가 분단되어 있는 한을 풀기 위해서도 통일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둘째는 부모의 은혜이다. 나를 낳아 주고 기르시고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신 부모의 은혜는 은혜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은혜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키우려면 한없는 정성과 사랑과 희생과 노력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의 사랑은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다고 하지 않는가. 효는 결코 낡은 도덕일 수 없다.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숭고한 표현이다. 부모의 얼굴에 깊이 자리한 수 없는 주름살을 보라. 효도는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 뿐이다. 생명을 낳아서 키워 본 사람만이 생명의 고마움과 어려움과 소중함과 경건함이 모두 합쳐진 존엄성을 알 수 있다. 자식이 병이 들면 부모의 마음도 병이 들어 슬픔과 아픔으로 함께 고통을 겪는다. 자신이 대신할 수 있는 괴로움이 있다면 자식을 위해서는 모두 받을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 부모이다. 부모의 가슴 속에는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염원이 언제나 절절히 흐르고 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 대하여는 언제나 기원하는 마음이요, 그 손길은 언제나 사랑의 손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라고 한다. 사람들은 여성이 연약하다고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모든 지혜와 용기와 사랑의 화신이다. 여성은 자식에 대한 자비로서 위대해 진다.
세째는 스승의 은혜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요 나를 바르게 살도록 가르친 분은 스승이다. 학교나 서당에서 가르친 선생님만이 스승이 아니다. 나의 정신에 좋은 영향을 주고 나의 인격에 깊은 감화를 끼친 분은 모두 나의 스승이다. 동서고금의 성현과 철학자, 종교인, 예술가, 문학가, 위인 등이 모두 우리의 스승이다. 이러한 분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우리는 우리답지 못했을 것이고 인류의 문화는 지금처럼 높은 수준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네째 사해 동포의 은혜다. 수천만 인류의 노동과 노력의 덕택으로 오늘의 나는 성장한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 입는 옷, 쓰는 물건, 사는 집, 이 모든 것들은 온 인류의 피와 땀과 노력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많은 이들의 은혜 속에 살아간다. 특히 우리는 농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밥 한알한알이 우리의 밥상에 오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농부의 손길이 거쳤음을 생각해야 한다. 봄날의 차가운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땅을 갈고 씨를 뿌려 더운 여름 내내 거름 주고 김 매며 곡식을 추수하는 농부의 노고가 우리의 양식 한알한알에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대인은 개인주의와 권리의식에 사로잡혀서 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콘크리트 벽처럼 메마르고 막혀 있으며 사막처럼 황량해 가고 있다. 정신적인 황폐에다 도덕적인 불감증까지 겹쳐 있는 느낌이다. 우리 모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자. 그래서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하자. 누가 도와 주어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삶에는 행복이 자리할 틈이 없다.
사람의 개성은 생명에 있다. 개성이란 남파 바꾸거나 대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없는 것이요 다른 생명체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물건은 바꿀 수도 있으나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자식이나 부모나 아내나 남편을 바꿀 수 없다. 그 이유는 저마다 개성을 가진 존귀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못난 자식과 부모와 남편과 아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쓸 수는 없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남편 내 아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명의 개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때는 바로 죽음의 순간이다. 사람은 모두 눈, 코, 입, 귀, 몸 동을 가졌으나 체온, 손길, 표정, 마음이 저마다 개성을 달리 해서 그가 없는 자리는 언제나 허전하게 비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허전함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사랑과 자비가 언제나 느껴지기 때문이며 그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은 뒤에 허전하고 안타깝고 절망적인 것은 그 기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는 죽음의 문제부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없이 신비롭고 이름답고 존귀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러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는 화해와 화합의 뜻으로 뭉쳐 축제를 함께 하고 있다. 밖으로 하는 화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에 대해 화합하고 화해함으로써 여섯 가지의 감각 기관을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