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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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10월 80호
대각국사의 천태종 성립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의 천태교학과 고려 중기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여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대각국사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다. 특히 정치적인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천태종의 성립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대체로 천태사상의 기원을 살펴보면 개조(開祖)는 중국 북제의 혜문(慧文)선사로서 혜문은 용수(龍樹)의 중론과 대지도론을 읽고 일심삼요(一心三要)의 심요(心要)를 깨쳤으며 그 심요를 남악혜사(南岳慧思)에게 전했다. 혜사는 법회삼매(法華三味)를 증오(證梧)하였으며 그 심요를 천태대사 지의(智 )에게 전한 뒤 천태종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법상, 화엄, 선종 등에 눌려 있던 천태사상은 당나라 중기에 활약했던 담연(港然, 711-782)에 이르러 천태종이라는 종파가 성립한 뒤에 다시 발흥하였다.
천태사상은 법화경을 그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천태의 저술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詢之觀), 법화현의(法華玄義) 등 천태대삼부(天台大三部)라고 하는 점에서도 천태사상은 법화경의 영향 아래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천태사상의 개조(開祖)는 원효대사이며 따라서 고려의 천태종도 원효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국사가 천태종을 성립시킨 시기와는 약 사백 년 정도의 간격이 있는데, 이로써 천태종은 오랜 학파기를 거친 뒤 종파로써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원효에서 출발한 천태학은 유가학의 거장 경흥(憬興)과 태현(太賢)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당시의 불교연구는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이 아니어서 천태학은 유가학과 함께 연구되기도 하면서 학문적인 차원에서 공존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같은 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학문적인 풍토가 보편적인 가운데, 국사가 비록 화엄종의 승려였다고는 하지만 그가 쓴 화엄종 관계의 글을 모은 원종문류(圓宗之類)에는 화엄, 천태, 율, 인명론(因明論) 등과 같은 제(諸) 종파의 연구가 있었으며, 또한 국사 자신도 겸학자로 자처하였다.
그래서 국사는 화엄종의 승려이면서도 여러 불교사상을 연구하였고 특히 화엄종을 통하여 천태사상을 통합하려 하였는데 무엇보다 앞서 제기된 문제가 교리적인 면에서 화엄과 천태를 조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국사가 천태종을 개종(開宗)하려는 의지를 지니게 된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였다. 입송(入宋) 전에 이미 인예태후와 숙종에게 \"천태삼관(天台三觀)은 최상진승(最上廣乘)이나 이 땅에 아직 천태삼관이 널리 펴지지 못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간절히 개종을 하고 싶다.\"고 천태종을 창립하려는 의지를 역설했으며, 인예태후와 숙종은 그에 대한 후원을 약속하였는데, 이 두 사람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천태종을 개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뒤 국사가 입송(入宋)하여 제일 먼저 화엄교학승 유성(有誠)에게서 화엄과 천태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철저히 공부하였으며 이어 정원(淨源)에게서는 화엄과 천태가 대등한 점을 징관(澄觀)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공부함으로써 화엄과 천태가 서로 조화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기존의 화엄종에 천태를 조화하려고 생각했던 국사는 비로소 그 이론적 근거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런 뒤 국사는 천태종의 종간(從諫)에게서 천태교학을 전수받고서 천태산을 찾아가 지자대사의 부도 앞에서 발원문을 올리며 고려에서 천태종을 개창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천태종의 창립은 이념적인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천태종을 개창할 사원과 승려의 교육이 따라야 했으며 그와 더불어 재정적인 지원도 필요하였다. 이미 인예태후와 숙종의 지원을 약속 받은 바 있었지만 사찰을 창건하는 데에는 많은 파란곡절이 따랐다.
천태종의 근본 종찰로서 개경에 창건된 사원이 국청사였는데, 이 철이 인예태후의 발원에 의해서 선종6년에 창건되다가 5개월만에 중단되었으며, 선종9년(1092)에 태후마저 어이없이 죽음으로써 천태종의 개창을 힘써 후원하던 한사람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선종마저 2년 뒤인 1094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국사는 화엄종에서의 영도력까지 상실하는 불행이 겹치게 되었다.
선종이 죽은 뒤 헌종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인주 이씨 이자의(李資義)는 불교계에 대한 주도권까지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법상종의 사찰인 현화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인주 이씨는 그곳에 이자의의 숙부 소현(詔顯)과 동생 세량(世良)이 거주하도록 했으며, 국사가 주지로 있던 홍왕사에는 자신의 작은 아들 지소(智炤)를 주지로 등용하였다. 그래서 국사는 홍왕사를 내놓고 그 당시에 변방사찰이었던 해인사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헌종 원년에 숙종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른 뒤 이자의 일당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에 따라 인주 이씨와 법상종은 크게 타격을 받아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중단되었던 국청사의 공사가 다시 시작되어서 숙종 2년(1097)에 완성되었다. 한편 해인사에 있던 국사는 다시 흥왕사의 주지로 복직하여 화엄종단을 영도하다가 뒤에는 화엄종단과 천태종단을 함께 영도하게 되었다.
국사가 국청사의 주지가 되면서 천태종의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는데, 그 조직의 구성원은 거돈사(居頓寺), 영암사(靈嚴寺), 고달사(高達寺), 지곡사(智谷寺) 등의 승려 천명으로 이들은 모두 고려 초기에 유입된 법안종(法眼宗) 계통의 선승들임이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고려불교의 선교통합, 즉 교관병수(敎觀竝修)의 과정에서 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한 것은 고려초 법안종의 유입과 견주어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 법안종의 승려말고도 덕린(德麟), 익종(翼宗), 경란(景蘭), 연묘(連妙) 등이 삼백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이들이 바로 천태종 개창의 핵심 세력을 이루었으며 이중 특히 익종의 문도가 번성하여 교웅(敎雄)-덕소(德素)로 이어져서 무신의 난 초기까지 천태종의 법맥을 형성해 갔다.
여기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성립함에 있어 고려불교의 선교통합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특성과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국사는 화엄에서 선을 직접적으로 통합하려 하지 않고 화엄의 교관과 천태의 지관을 조화시키려 했던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천태종의 성립은 사상적인 의도에서보다는 정치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귀족들의 불교에 머물고 말았으므로, 문벌 귀족사회가 붕괴된 무신정권 이후에는 사회적 기반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대각국사는 천태종을 창종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화엄종의 승려로서, 당대의 문호 김부식이 국사의 고려불교에 미친 많은 업적을 찬술한 비(碑)와 부도가 화엄종의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 남아 있다.
대각국사의 문집(文集)은 33권 2책인데 원집(元集) 20권에는 서(序), 기(記), 표(表),사(解), 장(狀), 서(書), 소문(藏文), 제문(蔡文), 진찬(眞讚), 시문(示文), 시(詩) 등을 싣고있고, 외집(外集) 13권에는 국사에 대한 서(書), 기(記), 진찬(眞讚), 시(詩), 비명(碑銘) 등이 있으며, 고려 때의 각판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