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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처로운 아이들에게 만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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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조태일 1988년 10월 80호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높고 푸른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맑기도 하지만 소슬하다. 따분한 일상생활을 벗어나 잠시라도 이런 바람을 맞으며 높은 하늘과 아득한 땅이 맞닿아 있는 저 지평선을 향해 한껏 내닫고 싶다.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생활을 박차고 뛰쳐나와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다. 중년이 된 나이인데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변화 있는 생활을 갈망하는 발랄한 성장기의 청소년들 마음은 어떻겠는가.
십여 년 전 나는 이제 겨우 철이 들기 시작한 세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은 적이 있었다. 삼십여 년 간 고향을 떠나 국민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타향에서 마치고 떠돌다가 아내를 얻고 세 자녀까지 얻었으니 한번쯤 고향을 방문해서 내가 어렸을 적 자랐던 산천경개를 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고층 건물과 시멘트벽과 거무튀튀한 아스팔트길과 그 위를 총알처럼 달라는 자동차와 소음과 공해와, 그리고 온갖 이기심과 경쟁과 불신으로 숨통이 막히는 도시를 벗어나 고향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세 아이들은 연신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쉴새없이 지껄이고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내외를 몹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들판에 심어 놓은 모를 가리키며 무슨 풀이냐고 물었으며 들판에 드문드문 보이는 원두막을 가리키며 무슨 동물이 사는 집이냐고 묻기도 하고, 들판에서 우장을 걸치고 일하는 농부들을 보고 무슨 거지들이 저렇게 많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홈쳐보면서 속으로 한없이 슬퍼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농사일을 하며 공부를 했던 우리들 세대에서 불과 한 세대를 거치는 동안 벼를 무슨 풀이냐고 묻고 원두막은 어떤 동물이 사는 집이냐고 묻고 농부들을 거지라고 하는 이놈들을 꼬집어버리고 싶었으나 애들 탓만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 세대의 잘못이라고 반성하며 꾹 참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기회가 닿는 대로 고향이거나 시골 어디든지 얘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이 얘들이 점점 자라서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들어가더니 이제는 부모의 뜻대로 따르지를 않는다. 방학이 되거나 연휴를 맞아 도시를 떠나 어디어디를 가자고 제안을 하면 모두 반대를 한다. 각자 행동하겠다는 것이다. 취미대로 놀고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 가정에서나마 고향의 이야기와 시골의 풍습 등을 이야기해 주기도 하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지 않는 말만의 설명이 그리 효과를 볼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안팎이 직장에 나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늘 생활에 쫓기다 보니 말만의 이야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과 대화를 한다거나 함께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오순도순 오가는 정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가정의 예절이라든가 가훈 그리고 집안의 내력 등을 소상히 가르쳐 줄 기회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마주앉을 기회가 있을 때도 아이들에게 한다는 말이 고작 \"책 많이 읽고 공부 열심히 해라\"는 정도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소리는 \"일 부지런히 해라. 일하지 않는 놈은 굶긴다\"였다. 한 세대가 바뀌면서 부모의 관심사는 ‘일’에서 ‘공부’로 바뀌었으니 오늘의 아이들이 할 일은 ‘공부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흔히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는 물음을 심심찮게 던지기도 한다. 물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학생들은 부모를 향해서 사회를 향해서 어떠한 물음을 속으로 던지고 있겠는가. \"학생은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하느냐, 공부를 위해서 사느냐\"고 묻고 있을 것이다. 물론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지 공부를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닐 테지만 공부에 진절머리가 난 학생들은 능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혼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함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무릇 모든 종교나 학문이나 과학이나 예술은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나 학문이다 과학이나 예술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들 이리 야단들이냐? 공부아니면 인간이 끝장난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급기야는 많은 학생들이 자살이라는 극한의 길을 택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삶을 위해서 있는 ‘공부’ 라는 것이 인간의 죽음을 부른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공부’를 때려치우는 것이 인간을 살리는 길일 수도 있다.
나는 요즘집에서 애들과 마주치면 ‘공부’하라는 말은 일체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슬슬 웃어주면서 \"오늘 재미있게 지냈느냐? 학교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이 고작이다. 나의 큰애는 이제 고1이다. 아첨 일곱시에 무거운 가방을 한쪽 어깨에, 도시락 두 개를 또 한쪽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서면 저녁 열시반이 넘어야 집에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부엌에 들어가 무엇인가를 찾아 먹고 공부를 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자는 모양이다.
소를 몰고 나가 꼴을 한짐 베어 놓고 소를 나무에 매어놓은 채 태안사가 있는 동리 산의 울울창창한 숲속을 쏘다니면서 노루, 멧돼지, 사슴, 여우, 토끼 등 온갖 산짐승들과 동무삼아 뛰어 놀다가 날이 저물어 집에 오면 저녁을 먹고 식구들과 둘러 앉아 새끼를 꼰다든가 짚신을 삼는 일을 옆에서 거들거나 어머니의 베틀일을 돕는다든가 아버지가 목탁을 치며 하시는 염불을 들으며 잠자기 전에 대충대충 숙제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던 일, 학교 갔다가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팽개쳐 놓고 논에 나가 못줄을 잡아준다든가 아니면 일손이 딸리는 듯 싶으면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논으로 뛰어들어 모를 심는다든가 때가 되면 쨉싸게 집으로 돌아와 새참을 나른다든가 두레질을 한다든가 상머슴처럼 볏짚을 지게에 지는 등짐을 한다든가 추수가 끝나면 밤이나 머루 다래를 따러 온 산을 헤맨다든가 겨울이 되면 흰 눈밭을 헤치며 토끼몰이를 해서 몇마리씩 산토끼를 잡는다든가 하면서 자랐던 나와 아이들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애처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실컷 일하고 실컷 논 다음에 축제 정도 하는 공부를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는데, 지금의 아이는 일과 놀이의 구분이 완벽하게 배제된 채 공부만을 하고 있으니 애처롭다는 말이다. 내 아이만의 일은 분명 아니다. 앞으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담당할 아이들이 반쪽만의 민족을 위해 반쪽만의 성공을 위해 절름발이 생활 속에서 성장을 한다면, 끝내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옛날과 지금의 생활 패턴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생활 패턴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가치관이나 성장하는 방법까지 판이하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애처로운 아이들을 풀어주자. 인간답게 성장하도록 자유롭게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성숙되고 확립되도록 웬만한 통재나 간섭으로부터 풀어 주자.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교와 가정과 사회에서 똑같은 비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의 보충수업을 대폭 줄이거나 아예 폐지해서 아이들을 가정으로 일찍 되풀려 보내는 일이 바람직하다. 원래 보충수업은 학습 결손이나 학습부진 학생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학생간의 실력 차이를 줄이고 학습 낙오자가 없도록 하기 위한 제도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보충수업은 상급학교 진학만을 위해서 실시되고 있는 듯하며, 또한 청소년 문제가 사회적으로 확대되자 아이들을 폐쇄되고 안전해 보이는 학교라는 공간에 묶어 두기 위해서 실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보충수업은 고득점 전략을 위해 획일적으로 국어, 영어, 수학만을 치중해서 다루고 있으며, 보충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학생들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 들이다.
첫째로는 입시 위주로만 실시하기 때문에 청소년 시절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정서는 뒷전으로 밀려난 채 주체적인 자아를 잃어버리며 건강까지도 망치기 일쑤다. 두번째로는 선생님들에게는 어려운 교육환경 위에 보충수업이라는 업무까지 겹쳐서 진정한 교육은 커녕 사제간의 인간적 교환도 힘든 상태며, 셋째로는 성적이 좋은 학생을 위주로 해서 실시되고 있으므로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열등감과 소외감까지 안겨 주고 있는 실정이다. 정서가 없다는 말은 인간이 목석과 같다는 말이다. 희노애락얘오욕은 인간의 칠정이다. 기쁠 때 기뻐하고 화날 때 화를 내고 슬플 때 슬퍼하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고 좋을 때 사랑을 하고 싫을 때 싫어하고 욕망이 있을 때 채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평범한 인간들이 갖는 정서들이다. 주체적인 자이를 잃어버리면 자기의 삶을 포기한 채 항상 남을 따라다니는 노예의 근성을 갖게 된다. 또한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흔히 말하지 않는가. 재물을 잃는 것은 적게 잃는 것이요, 명예를 앓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는 것은 모두를 잃는 것이라고, 또한 선생님은 기계와 다름없는 기능을 존중하며 충전시켜주는 기능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교육현장을 열등감과 소외감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열등감과 소외감을 말끔히 씻어내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천재 교육도 중요하겠으나 열등감과 소외감 때문에 학교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살아서 많은 화제를 남겼던 김관식 시인은 모든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선생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성적이 형편없는 학생들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고 한다. 한번은 반에서 매번 골찌를 면치 못하는 한 학생에게 느닷없이 국어 점수를 95점이나 주었다고 한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날마다 공부 못한다고 지청구만 듣던 그 학생은 \'못난 나를 인정해 주는 선생님도 계시는 구나\' 하며 감격한 나머지 처음으로 좋은 점수를 맞고 난 그 학생은 주멱세계에서도 손을 떼고 모범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난생 처음으로 성취욕을 맛보았으며 인간대접을 받았던 그 학생이 김관식 시인이 작고했을 때 가장 깊고 크게 슬프게 통곡하는 모습을 나는 옆에서 지켜보았다.
주눅이 들어 있는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95점이 아니라 공평하게 백점씩을 안겨 주자, 전국의 모든 학생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전과목에 걸쳐 백점씩을 안겨 주자, 나라를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실의에 빠져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만점을 안겨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