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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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리영희
1990년 06월 100호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기독교(신·구)의 ‘신자’도 아니다. ‘아직은’ 의 단서를 부쳐도 좋고, 어쩌면 ‘영원히’의 수식어를 부쳐도 좋다. 다시 말해서, 사찰이나 암자, 교회나 성당의 건물에 가야만 신도라는 규정에서라면 나는 ‘신자’의 자격이 없다.‘아직은 또는 영원히…’
그런 내가 지난 1월 물푸레나무 홍두깨에 음각한「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을 나로서는 거금이라 할 일금 20만원을 주고 샀으니 조금은 이상타 하겠다. 나 같이 아둔(癡)한 죄많은 중생의 마음에도 불심이 깃든다는 징좌인지는 알 수 없다.
한겨레신문사 기자단의 북한방문취재 구상을 도왔다는 이유로, 천하에 해괴한 법률에 묶여서 반년간을 감옥에서 지내고 나온 직후였다. 심신의 고통을 달래고 풀 생으로 얼마동안 시골에서 휴양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전(大田)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역전 지하도의 가게 사이를 급히지나, 막 역광장으로 나오려는 마지막 가게(민속품전문)의 한 구석에 시선이 끌렸다. 급한 발걸음을 멈추고 뿌옇게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제법 큰 홍두깨에 새겨진 글은 분명 「반야바라밀다심경」이었다.
팔목시계로 기차시간을 재면서 자세히 보니, 주인은 물푸레나무라고 하는데 나의 눈과 촉감으로는 박달나무 같았다.(새겨진 글본은 秋史 金正喜의 작이었다. ) 홍두깨는 세 자댄[尺] 높이에 다섯 치[寸] 두께, 아래 위 끝쪽으로 한치쯤 빠르게 다졌고, 그 표면에 “…色郞是空空卽是色…”을 중심으로 한 고귀한 274글자가 파여 있다. 밤색깔로 색처리를 한 표면의 음각을 흰색으로 칠해서 선명하다. 각자의 묘(妙) 또한 흔히 볼 수 없는 솜씨이다.
나는 한눈에 혹해버렸다. 집에 갖다 세워놓고 매일 아침 외워보고 싶어졌다. 게다가 물건은 하나밖에 없다. 직지사(直指寺)인가 해인사(海印寺)의 누군가가 신심으로 두 개만을 만들었는데, 하나가 나가고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주인의 말 때문에 더했다.
“얼맙니까?”
“20만원입니다.” !
“예 ? 20만원이요 ! ”
“다시 이런 귀품은 안나올 겁니다.”
“조금만 깍아 주시지요. 여행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조금 모자라는데…”
“미안합니다. 한푼도 짝을 수 없습니다. 물건이 귀한 것이라서 …”
주인과의 흥정을 몇 차례 거듭한 끝에, 결국 빈손으로 기차를 탔다. 정말 돈이 부족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매일 생각은 대전역 지하도 민속품가게에 가 있었다. 그 때마다 스스로 타이르면서 중얼거렸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다름아닌 ‘色郞是空’이 아닌가 아무리 심경(心經)이 귀한 말씀이라도 홍두깨에 새긴 심경은 한낱 물체이고 물건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색(色)이다.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없었던 것으로 하자.”
한 일주일을 그런 갈등으로 지낸 어느 날, 나는 대전역전 지하도의 그 민속품점에서 주인에게 돈을 세어 주고 있었다. 크고 굵고 무거운 각자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등에 메고 서울행 기차에 올라탔을 때의 마음의 흡족감은 글로써 표현하기 어렵다. 274 글자의 「반야심경」은 그후 안방 한쪽에 모셔져서 나에게 “…色郞是空空郞是色…”의 진리를 쉬임없이 말해 주는데도 나는 색(色)의 세계에 묻혀서 한치도 벗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다. 그런 한탄을 반복하면서 생각하곤 한다.
“결국 나는, 나무에 새겨진 「반야심경」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야심경」에 새겨진 물푸레나무 홍두깨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하에서 정치적 이유로 여러 차례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묶였었다. 주로는 나의 저서들 때문이다. 별로 시원치도 않은 책들과 대수롭지도 않은 글들인데도 이 나라의 폭자기관들은 그때마다 되풀이 조서(調書), 진술서(陳述書)라는 것을 강요한다. 누구나가 거쳐야 하는 고역이다. 그런데 언제나 다른 칸들에 기입한 내용은 그대로 넘어가는데 「종교」라고 인쇄된 빈칸에서 실랑이가 불었다. 어떤 목적의 어떤 서류이건 그 난을 빈칸으로 비워 놓거나, 아니면 ‘예수님, 부처님’또는 ‘석가모니, 크리스트’라고 써온 터이다.
“이게 뭐요? 기독교이면 기독교, 불교이면 불교라고 쓸 것이지. 종교가 뭐냐고 묻는데 석가모니니 크리스트니, 이게 무슨 소리요? ! ”
그 경우의 나의 대답은 언제나 한가지다. “나는 평소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 하고, 그 진리를 깨우치려고 애쓰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와 예수가 말로써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한 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것은 간절한 염원일 뿐, 아니 차라리 꿈일 뿐이오, 감히 발심하는 일부터가 불손하고 교만할 만큼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돼요. 그러기에 나는 성경을 읽고 불경을 읽으면 ‘기독교 신자’ ‘불교신자’라는 이름을 낯이 뜨거워서 감히 자신에게 불이지를 못해요. 나의 행동을 돌이켜볼 때 남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부처님과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하물며 오래도록 기록에 남을 문서에 ‘불교신자’니 ‘예수교신자’로 적는 것은 위선자의 짓만 같아요. 그래서 ‘신자’의 이름을 참칭하는 대신, 다만 진심으로 받들고 따르고자 하는 부처님과 예수님의 이름만을 기입하는 거에요.”
세상의 잡탐 속에서 매일 매일을 허등지둥 살다보면 종교적 체험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너나없이 화택(火宅)에서의 몸부림과 다름없어 보인다.
형무소라는 곳을 가고 싶어서 가는 사람은 없지만, 특히 소위 ‘정치범’이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에게는 징역의 감방은 절일 수도 있고, 성당 또는 교회일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전일 수도 있고 시나고그일 수도 있다. 정치적, 사상적 양심수들에게 있어 징역은 일단 화택(火宅)의 불속에서 나와 종교적 심경을 되찾는 명상의 시간이 된다. 종교적 경험을 기능케 하는 생존의 변질이다.
여러 차례의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워낙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에 깊이 빠져 있는 까닭에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말과 행적에 관해서 읽기도 하고 제법 생각도 하는데도 말이다. 누구나가 ‘신도’가 될 수는 없는 성싶다. 여러가지 불경과 선지자들의 해설서를 읽은 뒤에 나에게 행동적으로 흔적을 남긴 것은 조그마한 일 한 가디밖에 없다. 너무 무명(無鳴)의 껍질이 두껍고 딱딱해서 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부처님이 글을 모르는 무식한 열일곱살의 젊은이를 깨우쳐서 득도케 한 이야기가 마음 깊이 남아 있다. 그 이야기로 말미암아 나의 감방생활에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지금 그 이야기의 출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쨌든, 부처님이 어느 겨울 3백명의 높은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던 때이다. 어느날 열일곱살 난 무식한 소년이 찾아와 읍하고 소원을 여쭈었다.
자기도 부처님의 설법의 자리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배움을 받고 싶은데, 유식한 제자들이 “글도 모르면서 어찌 감히 우리와 어울리려 하는가 ! ”라고 번번히 쫓아버렸다는 말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부처님이 말한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거든 오늘부터 매일 불자들이 강당에 들어간 뒤에 토방에 버려진 신발을 닦아라.”
소년은 매일 3백 컬레의 흙투성이의 신발을 닦았다. 그냥 닦았을 뿐 아니라 3백 컬레의 험악한 신발을 티끌 하나 없이 닦았다. 거울처럼 깨끗이 닦은 뒤에 가지런히 바쳐 놓곤 하기를 한 겨울을 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고, 숙덕거리고, 때로는 비아냥거리고, 음해하기마저 하던 제자들도 마침내 소년의 지성스러운 지성에 감탄하였다. 소년은 드디어 그들과 함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못배우고 못깨친 소년이 3백 컬레의 신발을 티끌 한 점 없이 닦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의 거울에 티끌이 한 점도 없기 때문이다. 신발에 남은 때나 티끌은 바로 마음의 거울에 때와 티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때가 묻어 있으면 신발의 때가 보이지 않는다. 신발에 남은 때는 바로 마음의 거울에 남은 때다.”(그때 감방에서 읽은 경전의 구절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줄거리는 그러하다.)
나에게는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을 밝히는 이 방법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오른쪽 눈 동공에 미세한 자욱이 두 개 있다. 어렸을 때 눈에 껄끄러운 먼지가 들어간 것을 비빈 뒤에 생긴 현미경적 상처이다. 그렇게 작은 현미경적 흠집인데도 하늘을 바라볼 때, 희미한 두 개의 티끌이 하늘에 보인다. 과학적으로는 당연한 현상이다. 나의 눈의 동공의 티끌과눈에 비치는 객체에 생기는 티끌의 관계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도 쉽게, 그리고 신선하고도 감동적으로 나를 깨닫게 하였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하나는 마음의 눈이지만 이치는 같다.(예수님의 “자기의 눈에 든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보려는가?”의 가르침을 생각케 한다.)
그 작은 깨달음이 있은 날부터 나는 형무소 감방의 구더기 우글거리는 변소를 닦는 일에서 각별한 의미를 찾았다. 감방, 그것도 정치범을 처넣어두는 0.9명의 관과 같은 숨막히는 독방속에서, 세 끼 들어오는 ‘가다밥’을 먹고, 치우고, 20분간 운동 나갔다 들어오면 하루23시간은 그 속에 갇혀서 산다. 취침시간을 뺀 낮 시간의 식사와 운동 이외에는 정좌하고 불경을 포함한 종교적 독서와 명상이 일과이다.
책 읽다 명상하고 나면 일어나서 변소를 닦았다. 대한민국 형무소의 감방 변소는 그속에 살아 본 경험이 없는 이에게는 설명해도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상상을 절하는 더러운 상태를 상상하면 된다. 두 자 사방의 콘크리트 바닥 중앙에 직경 14cm가량의 구멍이 트여 있다. 오줌과 똥을 나누어 떨어뜨리는 구멍이다. 조준이 정확해야 한다. 그 구멍은 구더기 무리의 자유로운 출임문이다. 나는 그날부터 하루에도 몇번, 부처님과 글 모르는 소년의 가르침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닦았다. 그 공간과 표면 어느 점에 남은 때나 티끌은 바로 나의 마음의 때로 인해서 보이지 않았다는 진리를 날이 갈수록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그 일은 즐거움이 되있다. 일을 마치고 반들반들 윤나고 깨끗한 변소를 서서 내려다 볼 때, 부처님이 누구인가를, 부처님이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때로 그것은 희열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생각은 간절하지만 나는 너무 많은 허물 때문에 영원히 ‘불교신자’도 ‘기독교신자’도 되지 못하고 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