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東山)의 능(能) 행인(行人)은 교(敎)와 관(觀)에 밝은 분이었다. 굳은 의지로 정진하여 한번 참실(懺室 : 참회법을 행하는 집)에 들어가서는 추우나 더우나 변치않고 49년을 계속하니 절강(浙江) 땅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자신은 한번도 스스로를 수행인이라고 한 일이 없었고 그에 대해 말하기를 “지자대사는 하루 여섯 차례 예불하고 네 차례 좌선하는 것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는데 하물며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초암(草菴) 인(因)법사가 한번은 함께 수행을 하였는데 무릎을 곁대고 앉아서 보니, 언제까지고 흐트러지거나 기대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혹 병이 나도 며칠동안 밥을 먹지 않았을 뿐, 참선은 그만두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병은 저절로 낫곤 하였다.
능행인은 성격이 강직하고 결백하여 명리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시주물이 들어오면 언제나 대중들에게 나눠주고 털끝만치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다 떨어진 누더기 뿐이었다. 여름이 되면 대나무 껍질을 엮어서 대들보 위에 묶어두었다가 겨울이 되면 그것을 내려서 추위를 막았다. 늘 산에 들어가 호랑이를 길렀으나 호랑이가 해칠 마음을 먹지 않았고, 혹 비바람 치는 캄캄한 밤에 언덕 위 무덤에서 좌선하는 데 심신이 편안하여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절에는 산신이 있어서 영험으로 그 지방을 교화하였는데 능행인은 항상 그 산신과 친하게 지냈다. 어쩌다 향이 다 떨어지면 원주가 그때마다 능행인에게 알렸다. 능행인이 곧 기도를 드리면 이튿날 시주하는 사람들이 문이 메워지게 찾아오곤 하였다. 스님네들이 그 까닭을 물어보면 그들은 “어젯밤에 누군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절에 상주물이 다 떨어졌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기에 공양을 올리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분양 선소(汾陽善昭 : 947∼1024)선사는 태원(太原)사람이다. 도량과 식견이 넓고 깊어 겉치레가 없고 큰 뜻을 품어 무슨 글이든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통달하였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세상이 싫어져 출가하였는데 명망높은 선지식 70여 분을 찾아뵙고 그들 가풍의 묘한 종지를 모두 터득하였다. 또한 가는 곳마다 오래 머물지 않고 산수구경을 즐기지 않으니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선사를 운치없는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러자 선사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옛분들은 행각할 때 성인의 마음과 통하지 못했다는 그것 하나로 말을 달려 스승을 찾아가 결단을 보았을 뿐, 어찌 산수를 구경하는 일로 절을 찾아갔겠는가 ! ”
그 후 수산 성념(首山省念)선사를 찾아뵙고 물었다.
“백장스님이 자리를 말아올린 뜻이 무엇입니까?”
“곤룡포 소맷자락을 떨쳐 여니 온 몸이 드러난다.”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 자취 끊겼다.”
선사는 마침내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만고에 푸른 못과 번 하늘에 뜬 달은 두번 세번 애써 걸러내서야 알 수 있다”하고는 절을 올리고 대중에게 돌아갔다. 당시 섭현 귀성(葉縣歸省)선사가 그곳에 수좌로 있었는데 선사에게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갑자기 그렇게 자긍하느냐고 물으니 “이곳이 바로 내가 신명을 버릴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장사 태수(長沙太守) 장공(張公)이 네 곳의 큰절 중에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선택해서 주지를 해달라고 청했으나 선사는 “나는 오래도록 죽이나 먹고 밥이나 먹는 중일 뿐인데, 부처님의 마음 종지를 전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모두 여덟 차례를 청했으나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에 태자원(太子院)으로 맞이하려 하니 선사는 산문을 굳게 닫고 높이 누워버렸다. 석문 온총(石門蘊聰)선사가 문을 밀어제치고 들어가서는 비난하기를 “불법은 큰 일이고 조용히 물러나 있는 일은 작은 지조인데 그대는 불법을 짊어질만한 힘이 없거늘 지금이 어느 때라고 편안하게 잠만 자려 하시오!” 하니 선사는 벌떡 일어나면서 “그대가 아니면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오. 빨리 가서 여법하게 준비해 두시오. 내 곧 가리다”라고 하였다.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는 한번 선상에 앉아 30년 동안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았다.
용덕부윤(龍德府尹) 이공(李公)이 승천사(承天寺)로 모시려 하여 사자가 세번이나 되돌아와서 청했으나 가지 않으니 사자가 벌을 받을 참이라 다시 찾아와 말하였다. “반드시 선사와 함께 가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니 선사께서는 생각해 주십시오.” 선사는 “하필 같이 갈 것이야 있겠나. 그대가 먼저 가면 나는 나중에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식사를 마련하라 하고 행장을 챙기라 하면서 “나는 간다”하고는 젓가락을 멈추고 입적하였다.
도사 장펑숙(張平淑)은 노장의 도〔淸虛]를 매우 좋아하였다. 신선도를 닦는 곳에서 정여빈자(頂汝貧子)를 만났는데 그가 하도락셔(河圖洛書 : 易書)를 지고 있는 용마도를 꺼내 보이니 마침내 그 뜻을 알았다. 오랜 노력 끝에 공부를 성취하고서 말하기를
“내 몸은 비록 단단해졌으나 본각(本覺)의 성품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불경을 탐구하였는데 「능엄경(楞嚴經)」을 읽다가 느낀 바 있어서 「오진편(悟眞編)」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선종가송(禪宗歌頌)’을 지었다.
그 서문에서는 「능엄경」에 나오는 107가지 신선을 인용하면서 “비록 그들이 천만년을 산다해도 정각(正覺)을 닦지 않으면 신선의 과보가 다해 다시 태어날 때 6도 속에 흩어져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도를 닦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텅 비어[太虛] 안팎이 하나여야 하니, 만약 거기서 티끌 하나라도 세우면 곧 번뇌가 된다. 이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묘한 도리로서 「금강경」과 「원각경」, 이 두 경을 통달하면 금단(金丹 : 신선이 되는 비법)의 뜻이 저절로 밝아진다. 그런데 하필 도교와 불교를 분별할 것이 있겠는가”하였다.
그러므로 장평숙은 생사를 벗어나는 법을 구하는 데에는 반드시 불교에 귀의해야 목적[空竟〕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조스님이 상당하였을 때 백장스님이 앞으로 나가 자리를 말아서 거두자 마조스님은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