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째, 재가와 출가의 구분은 바로 계율에 의한다. 출가의 조건이 계율이라 함은 승려가 되는 기본 조건이 계를 받는 것임을 뜻한다. 계를 받는 순간 그는 승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승려가 되면 그 계가 율이 되므로 계율은 승려가 되는 기본 조건이다. 계율이 승려가 되는 기본 조건이 되지 못하면 승가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율 제정의 첫번째 뜻을 “승가에로 거두어지게 한다(攝取於僧)” 한 것이다.
도법스님의 주장처럼 계율이 현실에 불필요하다면 승가는 세속과 다를 바가 없다. 즉 승增과 속俗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변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둘째, 화합이다. 계율은 승가를 화합시키는 근본이다. 화합을 위해서 계율을 파해도 된다는 것은 승려로서의 근본을 잃은 사고의 발상이다. 왜냐하면 계에 의해서 승려가 되는 것이므로 계율을 파하는 것은 승려가 될 자격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율을 파하고 화합하는 것은 승가공동체가 아닌, 일반사회의 정당이나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승가의 계율은 국가의 헌법에 근거한 법률과 같은데 국가에 법률이 없으면 국민을 결속시킬 수 없듯이, 승가가 계율을 파하면 승려를 결속시키거나 화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분율四分律」43을 보면, “계율은 오로지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안락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있음을 알아라. 이것이 곧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의 공경하고 순종할 법이다” 하여, 그러한 계율의 성격을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계율을 제정한 뜻을 “승가를 기쁘게 하고(令增歡喜), 승가를 안락하게 한다(令增安樂)” 한 것이다.
승가에는 계율로 승가를 결속시키고 화합하게 하는 구체적인 의식이 있다. 그것은 보름마다 설계說械하여 포살하는 일이다. 즉 「중아함경中阿含經」 제36권 중아함 범지품에 나오듯이, 불멸佛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난존자카 마가다국 왕사성 교외의 농부 구묵목련련의 집을 방문하여 마가다국의 대신 우세와 나눈 대화에서도 이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가다국의 대신 우세가아난존자에게 물었다.
“첫째, 어느 한 비구라도 부처님과 동등하게 견줄 만한 이가 없고, 둘째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내가 열반한 뒤에 이 비구에게 의지하라’ 고 지시한 어떤 비구도 없다. 셋째, 어느 한 비구에게 모여서 함께 화합하며 예배하고 ‘이 비구는 부처님께서 열반한 뒤에 모든 비구들의 의지처이므로 모든 비구들은 마땅히 의지해야 한다’ 라고 할 수 있는 비구도 없다면, 어떻게 의지처가 없는데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처럼 함께 화합하고 다투지 않고 한 가르침을 동일하게 받이들이고 우유와 물처럼 화합하는 승가를 존속할 수 있습니까?”
아난존자가 대답했다.
“우리의 의지처가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우리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법에 의지할 뿐이오. 우리가 촌읍을 의지해 유행할 때면, 15일에 바라제목치(從解脫)를 설할 때 한곳에 모여 앉아서 법을 아는 비구를 청하여 우리를 위해 법을 설하게 합니다. 만약 대중이 청정하다면 우리들은 설계說戒하는 비구의 소설所說을 모두 기쁘게 받들어 행하고, 만약 모인 대중 가운데 청정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포살하여 설한 바의 법을 따라 우리들은 이 포살을 행하여 알게 합니다.”
아난존자는 이렇게 계를 설하여 포살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승가의 결속과 화합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화합을 위해서는 계율을 파해도 된다고 인식하고서, 계율을 지키는 스님들을 오히려 화합을 깨뜨리는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함께 생활하기를 꺼린다 하니, 주객이 바뀌고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 참으로 종단의 앞날이 염려스렵다. 이는 포살을 행하여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도법스님의 계율 불필요성의 주장은 승가를 파화합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 수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계율을 지켜야 한다. 수행의 첫걸음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믿음은 바로 계율을 지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믿음은 선악의 인과因果를 믿는 것이다. 선인善因을 심으면 선과善果가, 악인惡因을 심으면 악과惡果가 따르므로 악을 지어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을 싫어하고 선행을 하여 좋은 과보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이치를 알기 때문에 선업을 일으키고 생사고를 벗어나 무상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발심이 일어나게 된다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설하고 있다.
발심이 되어야 불과佛果를 얻기 위한 수행이 된다. 즉, 수행은 발심의 동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발심은 믿음에 의해서 생기는 것인데, 믿음이 결여되면 진리의 깨달음에 회의가 일게 되어 무상의 깨달음을 이루려는 발심이 생기지 않는다. 발심을 일으키는 이 믿음은 인과의 이치를 잘아는 데서 비롯된다. 선악의 인과는 삶과 죽음의 괴로움이니, 계율에 의하여 악업을 막고 선善을 증장하게 되고, 생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리심을 내면 계율로써 믿음이 일어나고 증장되어 수행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믿지 않는 이를 믿게 하고(令未信者信), 이미 믿음이 있는 이는 믿음이 더욱 자라게 하고 (五己信者令增長)”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진의 가속은 자신의 거친 마음을 조복하고 참괴慙塊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마음도 모두 계율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길들이기 어려운 이를 잘 길들이게 하고(難調者令調順),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고(者得安樂)”라고 한 것이다. 또 계에 의한 정진의 가속이 고苦를 유발시키는 유루有浩의 번뇌를 소멸시키고 각覺을 성취케 하는 수행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유루를 끊게 하고(斷現在有漏), 미래의 유루를 끊게 하고(斷未來有漏)”라고 한 것이다. 유루는 번뇌이다. 수행은 바로 이 유루를 제거하는 데에 있다. 제거하는 방법은 수행이고 계율을 지킴으로써 유루를 사라지게 한다면 계율 그대로가 수행이며 그리하여 궁극에는 대각大覺을 이루게 된다. 이에 대해 「범망경梵網輕」 보살심지계품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노사나께서 송하심이라. 나도 또한 이와같이 송하노니, 너희 새로 배우는 보살들도 이 계를 받들어 가져서 청정하게 수지한 다음에는 모든 중생들에게 전하여 줄지어다. 분명히 듣고 바르게 송하는 이 계법은 불법 중의 계장械藏으로 따로따로 해탈하는 법인 바라제목차니라. 대중은 마음을 다하여 믿어라. 너희는 당래에 이룰 부처요 나는 이미 이룬 부처이니, 늘 이와같이 믿을진대 계품戒品이 이미 구족한 것이로다. 마음을 가진 일체 중생은 모두 다 불계佛戒를 섭攝해 있음에 불계를 받은 일체 중생은 부처님의 지위에 들게 되나니, 위치가 대각大覺과 다름없어 진실한 불자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계械 없이 정定과 혜慧만으로 수행이 가능하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계정혜 삼학三學은 분리되지 않는 한몸이다. 즉, 수행의 요체가 계, 정, 혜이니, 정과 혜는 계가 없으면 결코 성립할 수가없다. 마치 그릇이라는 계가 금이가거나 깨지면 정이라는 물이 새어 고이지 못함과 같다. 계라는 그릇이 새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정이라는 물도 움직임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되어 물이 맑아지면 수면에 상相이 비치거나 밑바닥을 볼 수 있게 되는 혜라는 각覺이 나타난다. 이처럼 계라는 그릇이 깨어지면 정과 혜는 발현되지 못한다. 이에 대해 「불유교경佛遺敎經」은 수행은 정계淨戒를 가지는 것부터 시작됨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여기서 계를 가지는 모양을 대략 설하니 계란 해탈하는 근본을 바르게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제목차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 계를 의지하면 모든 선정을 얻어 고苦를 없애고 지혜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은 마땅히 깨끗한 계를 가져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 만약 사람이 계를 가지면 능히 좋은 법을 가질 수 있거니와 만약 계가 없으면 모든 선공덕善功德이 생길 수 없다. 그러므로 계는 가장 편안하게 공덕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계가 인因이 되고, 성불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수행임을 보여준다. 원효스님도 「범망경梵網經」 보살계본 사기私記에서 “네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것은 계를 가짐에 연유하므로, 그 계가 능히 성불의 인因이 되는 까닭이며, 인因이 괴果를 정하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다하는 것이다” 하여, 정각正覺은 계를 가짐에서 비롯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계는 곧 인因이 되어 불과佛果를 이루는 수행의 첫걸음이다. 계가 정이나 혜와 분리된다면 결코 불과를 이룰 수 없다.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도 “계율이거나 선정이거나 지혜이거나 그 중 하나만 들어도 셋이 구족하여 있어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계, 정, 혜 삼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 하나에 각기 셋이 함께 갖추어져 있음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수행이든 이 계, 정, 혜 삼학의 근본적인 수행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또 「동어서화東語西話」는 “계, 정, 혜의 세 무루학無遍學이 나의 맥이라면, 교종과 선종과 율종은 나의 신체와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삼무이종三武二宗의 폐불廢佛 사건을 만났던 것은 내 몸이 병들었다가 이옥고 계, 정, 혜 삼학의 근본 맥이 뛰게 되자 살아날 가망이 생겨, 그 뒤 오래지 않아서 병은 사라지고 몸은 더욱 건강해졌다”고 저자인 중봉선사는 비유를 들어서 설하고 있다. 중봉선사는 또 “이러한 근본을 견고하게 하려 하지 않는 자는 외호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환다. 이것은 맥과 원기가 깎이고 상하면 생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짓이다.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재앙이 발생하는 것을 모르는 짓이다.” 라고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도법스님의 “우리 수행자들은 계를 받는 즉시 위선자 또는 파계한 죄인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라는 주장은 적반하장으로 수행자의 잘못을 계에 덮어 씌우는 것이다. 계는 수행자가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게 하는 근본 맥인데 어떻게해서 계율이 잘못이라고 하는지 알수 없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계, 정, 혜 삼학보다 더 근본적인 수행의 방편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수행지에게 보살계와 비구계가 현실에 맞지 않다”는 도법스님의 주장은, 참된 수행자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오늘날에 수행과 정각을 포기하자는 말과 다름이 없으며 수행자가 되지 말자는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계율을 포기하고서 어떻게 수행을 하며 또 수행자라고 할수 있겠는가?
(3)
넷째, 정법正法이 구주久住하는 것이 계율에 있다. 따라서 계율의 부정은, 승과 속의 경계선이 사라진 세속화와 파화합破和合으로 화합 종단을 불안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수행자가 수행을 포기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자신의 실존적 본질에 대한 깨달음과 중생 구제의 자비가 사라지는 비극을 불러올 뿐이다. 그리하여 정법의 깨달음을 실현할 수행자와 정법을 유포할자가 사라지게 되어 정법이 구주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영원히 부처님과 조사의 혜명慧命을 끊고 중생의 불종자佛種子마저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계율을 부정하는 도법스님은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는지 의아스럽기만하다.
물론 비구 250계 하나하나를 지키면서 수행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부적격하므로 부정한다고 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법률 등에 비교해 볼 때, 250계는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중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사분율四分律」 43에 보면 이렇게 설하고 있다.
“부처님은 사맛티에 있는 비구와 코삼비에서 온 비구들을 한데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제정하여 놓은 모든 계율은 곧 너희들의 보호자요 스승이다. 바로 너희들이 믿고 의지하며 목숨이 다하도록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법대로 다스림을 받고 참회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계율은 오로지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안락하게 수행하게 하려고 있는 것임을 알아라. 그러므로 많은 계율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제하고, 그 나머지 사소한 계율에 대해서는 너무 고집스럽게 범하고 범하지 않은 것을 따짐으로써 시비를 일삼지 않도록 하여라.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두루 살펴 삼가며,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은 사랑하여 서로서로 화합하고 예의와 법도에 맞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곧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공경하고 순종할 법이니라.”
비구 250계를 사분율에 의거하여 그 중요 벌칙 규정을 보면 크게 열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그 첫째가 바라이波羅賣(parajika)이다. 이는 가장 무거운 죄로 극악極惡, 타불여의처墮不如意處, 단두斷頭, 기棄, 근본죄根本罪 들로 번역되는데, 이를 범하면 머리를 자르듯이 비구, 비구니의 자격을 잃고 교단으로부터 파문당한다. 그래서 이것을 범한 사람을 단두자斷頭者, 불법사인佛法死人이라고도 하는데, 비구에게는 음淫, 도盜, 살殺, 망妄의 네 가지가 있다.
둘째는 승가바시사僧伽婆尸沙(僧:samghavasesa)이다. 바라이 죄 다음가는 중죄로, 이 죄를 범하면 일정 기간 비구(니)의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 죄를 범한 비구. 비구니는 마나타磨那唾(兌衆意)라고 하는, 죄를 용서받는 참회법을 행해야 한다. 죄를 은폐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사실대로 인정하는 비구는 11주일, 비구니는 15일 동안 행하며, 20인-비구니 경우는 비구와 비구니 각 20인씩 모두 40인-의 대중 앞에서 고백, 참회하고 근신하는 뜻을 표해야 한다. 죄를 부인할 때에는 그 잘못한 날짜에 따라 별주법別住法으로 대중과의 별거를 명하며, 그 기간을 마치고 나면 마나타를 다시 행한다.
참회하고 소정의 처벌을 받고 나면 비구로서의 생명은 다시 회복되어 승가 안에 머무를 수 있다. 비구에게는 열세 가지 승가바시사가 있다.
셋째는 이부정二不定(aniyata)이다. 비구에게만 있는 죄로 두 가지가 있어서 이부정법二不定法이라 한다. 곧, 으슥한 곳이나 으슥하지 않은 곳에서 여인과 나란히 앉아서 법답지 않은 행동이나 말을 할 때, 신심 있는 우바이가 보고 말하는 바에 따라, 바라이 죄, 승가바시사 죄, 바일제 죄의 어디에 해당되는가가 결정된다. 다만 보지 않고 듣지 않았기에 미리 결정할 수 없어 이부정법이라 한다.
넷째는 니살기 바일제尼薩耆波逸堤(捨墮naihsargika-prayascittika)로, 진사타盡捨墮 또는 기타棄墮라고 번역된다. 두 가지 바일제 죄의 하나로 의발 등에 대해서 법으로 정한 것 이상의 양을 소유하는 잘못이다. 이 죄는 그릇되이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참회해야 한다. 또 불법으로 소유한 물건의 경우에는 그 물건이 교단에 몰수되므로 사捨라 하고, 4인 이상의 대중 앞에서 참회하지 않으면 죽어서 삼악도에 떨어진다 하여 타墮라고 한다. 비구, 비구니 모두에게 서른 가지 니살기 바일제가 있다.
다섯째, 바일제波進提(單墮: suddhaprayascittika)는 가벼운 죄에 해당되는데, 다만 지옥에 떨어지는 죄가 된다는 뜻이다. 이 죄를 범하면 포살할 때에 대중 앞에서 참회해야 한다. 비구에게는 아흔 가지, 비구니에게는 일백일흔여덟 가지 바일제가 있다.
여섯째는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pratidesaniya)로서, 대타설對他說, 향피회向彼悔, 각대응설各對應說이라 번역한다. 한사람에게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만으로 죄가 소멸되는 가벼운 죄이다. 모두 먹는 것에 관한 것으로 비구는 네 가지 바라제제사니, 비구니는 여덟 가지 바라제제사니가 있다.
일곱째, 백중학百聚學은 학습해야 할 많은 규정계칙規定械則이란 뜻이다. 중다학법衆多學法이라고 하고, 중학계법衆學職法, 중학법衆學法이라고도 하며, 또 식차가라니(siksa-karaniya)라고도 쓰고, 응당학應當學이라고도 번역한다.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설법 등 기타 예의에 관한 세칙을 규정한 것으로 이에 반대되는 행위를 저질렀을 때에 돌길라突吉羅라고 하는 죄를 준다. 고의로 범했을 때는 상좌上座 비구 앞에서 참회해야 하며, 고의가 아닐 때는 자기 마음으로만 참회하면 된다. 백중학百覆學이라고 할 만큼 많은 규정이 있는데, 비구와 비구니의 내용이 다소 다르나 수효는 같다.
여덟째, 멸쟁滅諍은 승가 내의 분쟁을 그치게 히려고 마련한 규정으로, 일곱 가지가 있다. 분쟁이 적당한선에서 그치지 않을 때에는 상좌上座가 분쟁을 일으킨 사람에게 돌길라突吉羅 죄를 준다.
아홉째는 유란서倫蘭避(sthulatyaya)로, 대죄大罪, 중죄重罪, 서죄序罪라고 번역된다. 바라이나 승가바시사외 미수죄, 또는 그 예비 음모죄에 해당된다. 이 죄를 범한 사람은 사찰 경내의 모든 대중에게, 아니면 적어도 네 사람 또는 한 사람에게라도 참회해야 한다.
열째는 돌길라突吉羅(duskrta)이다. 악작惡作이라 번역하고, 소과小過, 경구輕拘, 실의失意, 응당학應當學이라고도 한다. 나쁜 소행이라는 뜻의 가벼운 죄이다. 구체적으로는 백중학의 죄, 멸쟁의 죄, 이부정의 죄 들과, 바라이, 승가바시사, 바일제, 바라제제사니의 네 가지 죄의 미수죄 및 서품의 규정에 위반되는 행위들을 돌길라라고 한다. 이 죄는 한사람의 비구 앞에서라도 참회하는 것으로 죄가 소멸된다.
이들 중에서, 사 바라이四波羅夷, 십삼승가바시사十三僧伽婆尸沙, 이부정二不定, 삼십 니살기 바일제三十尼薩耆波逸提 등이 중요한 계율이다. 그 밖에 포살할 때 대중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해야 하는 바일제, 바라제제사니 등은 사소한 계율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살펴볼 때, 계율을 ‘현실적으로 지킬 수도 없고 지켜지지 않는 보살계, 비구계를 주고 받고 있다’ 는 주장은 계율에 대한 평가의 근거를 ‘현실’ 에 두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한 근거가 현실이 아니라 ‘법’ 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실은 변화하는 생멸이 속성이다. 그러나 계율은 불생멸不生滅의 법에 근거한다. 계율을 현실에 비추어 논하는 것은 그 계율이 언제든지 변해도 된다는 것이며 또 그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계율은 엄연히 법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통용된다. 말하자면, 첫째는 법을 위해 화합함이요, 둘째는 수행으로 법의 깨침과 중생 구제요, 셋째는 정법이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물게 하는 것이므로 계율은 법에 근거하고 있다.
특히 음행, 도둑, 살인, 거짓말 등의 네가지 바라이 죄는 범하지 말아야하는 근본 계율이다. 이 네 가지 죄를 「능엄경嚴經」에서는 생사윤회의 원인이라고 했고, 사회 도덕에서도 큰 죄로 다스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음행에 대해서는, 사회에서는 사음部淫만 죄악시하지만, 출가자에게는 일체 음행을 금하셨다. 그 이유를「능엄경」 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만약 음淫을 끊지 않고 선정을 닦는 자는 마치 모래를 쩌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단지 뜨거운 모래일 뿐이니, 왜냐하면 이것은 밥의 근본이 아니라서 모래만 이루기 때문이다”
도법스님은 또 은처승과 도박승에 대한 기강 문제 운운하였는데 그런 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근거하여 계율을 부정함으로써 출가 수행자에게 거짓말하는 위선, 도둑질, 살인 등을 권장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열세 가지 승가바시사와 두 가지 부정법은 화합을 파함과 여인과의 접촉이 주된 내용이다. 이 또한 승가의 존속을 위해 파화합을 금하는 것이니, 여인과의 접촉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사랑이 전제되므로 역시 파화합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 사랑은 윤회의 원인이라고 설하고 있다. 열세 가지 승가바시사와 두 가지 부정법 역시 승가의 존속을 위해 계율에l 의한 화합을 강조하는 것이므로 이 또한 법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4)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도법스님의 계율의 불필요성에 대한 주장에는 네가지 오류가 있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 오류는 계율의 부정이다. 출가의 조건이 계율인 만큼 계율을 부정하면 승과 속의 구분이 없어지므로 승가의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리 되면 수행정진과 전법교화, 정법이 오래 머물수 없으므로 은처나 도박승의 근절은 불가능해진다. 둘째 오류는, 파화합하여 화합 종단을 불안과 혼란속으로빠뜨리는 일이다. 셋째 오류는, 계율의 불필요성 앞에서는 신심과 발심이 일어나지 않아 수행정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수행자가 수행을 포기하는 것이 되어 선지식이 없어지고 그에 따라 안으로 자신의 깨침과 밖으로 중생구제의 자비가 사라지는 것이다. 넷째 오류는, 정법이 쇠퇴하거나 파괴되어 부처님과 조사의 혜명을 끊고 중생의 불종자佛種子마저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들은 계율의 근거를 불생멸不生滅의 법에 두지 않고 생멸하는 현실에 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율이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지켜질 수 있도록 종단 치원에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율장에 나와 있듯이 결제와 해제를 가리지 않고 보름마다 포살을 행하여 결속과 화합을 다짐으로써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계율법회가 자주 열리면 계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계율이 청정하게 지켜질 때 승가체제는 확고해지고 수행자의 신심은 날로 증징하여 발심 정진하게 되고 많은 선지식의 탄생으로 전법도생傳法度生이 이루어져 불법이 융성하게 될 것이다.
계율은 승가의 생명이요 수행자의 등불이다. 승가 체제가 계율임을 깨달아 다시는 계율 부정을 제기하는 사태가 없기를 바란다. 이렇듯 계율 불필요성의 오류에 대해 논증함은 오직 정법구현을 위해서이다. 이재부터라도 이를 계기로 계율에 대한 논란이 공론화되고 많은 스님들의 관심이 촉발되어 승가와 종단이 발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