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남짓, 다큐멘터리 고려대장경 2부작을 서둘러 제작하다 보니 미처 들춰 보아야 할 자료며, 만나보아야 할 전문가며, 찾아가 확인해 보고픈 장소 따위를 가슴속에 접어둔 채 방송을 내보내야 했다.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추후에 끊임없이 프로그랩을 꼼꼼하게 수정해 보자는 다짐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애당초 집 지을 때 번듯하게 짓지 못하고 비 새고 곰팡이 슬면 그 때 조금씩 손보자고 생각하는 황당한 발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개태사도 그렇게 접어둔 아쉬움의 장소였다. 프로그램을 끝내 놓고야 미뤘던 숙제를 풀어야 할 의무감 하나 달랑들고 논산으로 향했다. 개태사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사춘기 시절 읽은 책에 나오는 여인의 체취를 찾아 나선 사내의 심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수기스님, 이 땅의 위인 백 명의 명단에는 이름조차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되찾아 복원해야 할 소중한 이름, 수기스님. 그 어른이 오래도록 머무셨다는 절 개태사로 향하면서 그 곳에는 수기스님의 향기가 어떻게 서려 있을까, 수기스님의 흔적을 그저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가람이었으면… 하는 설레임이 가득했다.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에 있는 절,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한 뒤에 창건한 절이다. 왕건이 손수 지었다는 개태사 창건 발원문의 내용을 두고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후백제 유민을 휘어잡기 위해 세운 절이라 해석하지만 내 소견으로는 정반대인 듯하다.
‘생민들이 백 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해 생민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고장에서 임의로 할수 있게 하겠나이다 했더니…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 위로는 부처님의 가피력에 보답하고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의지해 특별히 명하여 불당을 창건했으니,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開泰라 하였나이다.’
마치 아쇼카 대왕이 인도땅을 평천하한 뒤에 곧바로 부처님 전에 참회하고 그 넋들을 기렸던 것처럼, 우리의 문무대왕이 삼국통일 전쟁에 동원돼 숨져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영혼 천도를 위해 가장 먼저 무장사를 세웠던 것처럼 왕건 역시 후백제의 유민, 그 떠도는 넋을 기리기 위함이었지 후백제를 격파했음을 길이길이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통일의 위업을 이룬 왕어 세운 절답게 개태사는 호국대찰로서 유감없는 면모였던 것 같다. 이 무렵 개태사 경내는 ‘촌락’ 을 이뤘고 스님의 숫자만도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의 몇 차례 침입으로 번창하던 절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조선 초기부터 급격히 퇴락하기 시작해 뒤에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잠시 조선 세조의 불교 중흥책과 더불어 중흥의 바탕을 보이는 듯 했을 뿐이었다. 자취조차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되찾은 것은 일제시대라고 역사책에는 기록돼 있다.
논산에서 택시로 달려간 개태사. 맞은편에는 비둘기열차만 서는 자그마한 간이역이 서 있다. 반갑게도 개태사 역이다. 나즈막한 천호산을 병풍삼아 아랫자락 평지에 자리한 자그마한 절. 그 옛날엔 이 일대가 전부 가람이지 않았을까, 그 시절 수기스님은 어느 곳에 머물고 계셨을까, 식견이 정밀한 수기스님을 뵙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을 것인가 개태사 경내를 거닐면서 수기스님은 대장경의 바르고 잘못됨을 교감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을 하셨을까, 수기스님과 대장경사이에 자리한 이 개태사는 스님의 비밀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참배하기 위해 들어선 대법당 입구,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개태사 창건 당시에 조성됐다는 석조삼존불 입상. 거대한 석조부처님이 정겨운 모습으로 우뚝 서 계신 법당이었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리 따사롭던지. 생의 시름과 고통을 달래 주기 위한 손짓일까. 높이가 4.8미터인 장육상 본존불의 원통형 몸 비례와 맞지 않는 크디 큰 손이 첫눈에 들어온다. 양발은 든든하게 안정감을 이루고 있어 하염없이 의지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듯한 부처님이시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 하지만 개태사 부근에서는 모두 미륵삼존불로 부른다. 아무려면 어떨까.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웃들의 의지처가 되고 민간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어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리라. 지금처럼 법당을 짓지않고 노변에 세워둔 삼존불 옛 사진자료를 보자 그 느낌이 더 강렬했다. 마치 백제의 미소로 불리우는 태안삼존불이 지붕을 이고부터는 그 미소를 잃은 것처럼.
삼배를 마치고 가람을 돌았다. 태조 왕건이 오백 명 스님의 공양을 위해 하사했다고 전하는 지름 3미터, 높이 1미터, 둘레 93미터나 되는 큰 무쇠가마솥을 매만지며 또 다시 우리 수기스님을 떠올렸다. 스님께서도 이 가마솥으로 공양을 드셨을 것인가.
우리 가람 구조로서는 보기 힘든 ‘단군전’ 이 한 곁에 자리하고, 그 옆에는 팔각정 양식의 전각에 ‘나반존자’상이 모셔져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묘하다는 생각을 안고 주지 스님을 찾았다. 노보살님이 반겨 맞아주며 자신이 주지라 했다.
그는 수기스님이 뭐하던 양반인지 모르는 분이었다. 일자무식이던 자신의 어머니(김광영)가 계룡산에서 도를 닦다 깨달음을 이뤄서 이 곳에 자리잡고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어머니의 꿈에 삼존불이 나타나 그 자리를 왔더니 삼존불의 두상이 발견되어 지금 복원해 놓았으니 빈터 위에 이나마의 공간이라도 마련한 것은 어머니의 공이라 했다. 그제서야 알 듯했다. 대웅전 현판이 ‘삼천일지개태도광사’인 것이나 단군을 모신 창운전이 있는 것이 모두 용화세계의 개벽을 맞는다며 유불선 삼교합일을 주장한 중창주 보살에 의한 것임을.
졸도할 듯이 머리 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휘청거리며 경내에 다시 섰다. 김광영 보살이 이 절을 중창했다는 먹빛 안내문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데 수기스님의 사라진 역사는 어떻게 되살려 놓어야 하는지, 왜 이토록 버려진 절이 되어야 하는지, 왜 수기스님은 야속하게도 역사의 기록 속에 몸을 숨기고 계신 것인지, 오늘의 난 왜 이렇게 무능할까, 무엇부터 해야 할까… 속이 타드는 심정이었다.
절 뒤편의 논두렁을 따라 올랐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입구에 ‘개태사지’ 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지금은 사람들의 목숨을 유지해 주는 논밭이 되고 있지만 칠백 년 전 그 곳은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땅이었을터이다. 그 곳에서 맑은 눈빛의 수기스님은 얼마나 청량한 가르침을 뿜어내셨을 것인가. 느티나무에 온몸을 의지하고 서서 소설 속의 그 사내가 찾던 ‘자스민 향기’ 보다 더 짙고 깊었을 수기스님의 향기를 더듬어 보았다.
비록 오늘 우리의 신섬은 미력하지만 저 개태사 호국도량에 수기스님의 팻말 하나라도 달아야 하지 않을까.
계룡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보살의 전설 같은 사연보다 더 진실된 눈 밝은 스님의 일화가 작고 작은 도량에 남아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개태사 삼존불 그 곁에, 고려의 오층석탑 그 곁에 이렇듯 간략하게 씌여진 자그마한 비석 하나 세워둘 수는 없는 일일까. 대리석 비석도 필요없다. 손바닥만한 표지판인들 어떠랴.
‘이 곳 개태사는, 이제 세계 인류의 문화 유산이 된 고려대장경의 조성에 총책임을 맡았던 수기스님이 오래 머무셨던 절이다.’
아니 그보다 더 짧아도 된다.
‘이 곳에 고려대장경의 수기스님이 머무셨다’ 라고.
절의 역사가 지금처럼 왜곡되느니 차라리 이끼낀 기와장이 나뒹구는 잡초더미의 폐사였더라면 좀 나았을까. 천호산을 뒤로 하고 돌아나오는 발길은 천근만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