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수덕사에 가면 한국 제일의 비구니가 살고 있다. 그 분을 은사로 삼아 공부하도록 해라.”
출가의 뜻을 비치자 청담스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고 김용사로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수덕사로 갔다. 청담스님께서 찾아 뵈라고 하신 스님은 수덕사 말사인 보덕사에 주석하고 계셨다. 보덕사에 도착하니 그 분은 마침 고양이 밥을 주고 계셨다. 초가을 명징한 햇살 아래 맑고 청초한 노비구니가 고양이 밥을 주고 계신 모습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관음보살의 화신 같았다. 그 분 앞에 다가가합장한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입산하고 싶어 왔습니다.”
조용한 눈길로 나를 찬찬히 바라보던 스님께서 입을 여셨다.
“나무 밑에 난 풀잎같구나. 수행자란 오만 일을 다 해야 하는데, 그 손 가지고 어떻게 모심고 밭매며 중노릇 하겠느냐.”
열네살 때부터 서른이 가깝도록 벼르고 벼르던 입산이 아니던가. 모심고 밭매본 적이야 없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진주가 고향인 나는 속가어머니가 불연이 깊으셔서 자연스레 절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청담스님 법문은물론 고암스님 같은 스님들께 법문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진주 연화사에 다니면서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을 드렸다. 혹여라도 아침 예불을 빠트리는 날에는, ‘오늘 할 일을 다 못했으니 무슨 밥을 먹으랴’싶어 아침을 굶곤 했다.
진주 연화사에 다니며 예불과 참선을 하던 나는 그 절에 주석하고 계시던 유명한 강백인 성능스님께 「화엄경」을 배웠다. 일 년을 꼬박 「화엄경」을 보고 난 뒤 마음 가득 차오르던 환희심을 어떻게 말로표현할 수 있을까.
「화엄경」을 끝낸 뒤, 다시 「열반경」을 보기 시작했다. ‘부처님 팔상록’ 을 읽을 때는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쁨과 솟아오르는 선심으로 「열반경」을 달달 외우고 다녔다. 그리고 발심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산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처님 도량에 가서 부처님법 공부해야겠다. ’ 그러나출가하는 것이 쉬 용납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곧바로 집을 떠나지는 못했는데, 「열반경」을 읽고는 부처님법의 그 무변광대함과 깊은 맛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새벽 예불을 해인사로 다녔다. 몇몇 도반과 함께 빌린 짚차를 타고 진주를 떠나 밤새 가면 새벽 두시 반, 또는 더 이른 시간에 가닿기도 했다. 그렇게 꼭 일 년을 하루도 거름없이 해인사로 새벽 예불을 다녔다. 날마다 장엄한 새벽 예불을 드리며 신심을 다졌던 것이다. 그렇게 날마다 쉼 없이 타오르던 신심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집에는 알리지도 못하고 나왔는데, 논매고 밭매는 일이 어찌 문제가 되었으랴.
보덕사는 비구니 참선 도량으로 그 당시 네 분의 노스님과 서른 명쯤 대중 스님이 있었다. 행자 생활이란 지금이나 그 때나 공양주 노릇부터 시작하는데, 공양주를 하면서 백일기도에 들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앉아 참선했다. 비록 행자였으나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으로 들어가 눈에 뜨이지 않게 탁자 밑에 몸을 숨기고 참선을 하곤 했다.
보덕사에 딸린 논 다섯 마지기를 농사지었다. 농사철이 되면 대중스님이나 행자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모를 심었다. 논 다섯 마지기에 모를 다 심고 나면 꼬박 사오 일이 걸렸다. 농사 지을 손도 손이려니와 늘 물이 부족해 그렇게 오래 걸려 심을 수밖에 없었다. 자급 자족하는 생활이었으니 채소 심어 밭매는 일이랑 나무하는 일들이 모두 스님들 몫이었다.
하루는 자갈을 깨는 일을 하다 잠시 쉬고 있는데, 정혜사에 주석하고 계시던 벽초스님께서 지나다 우릴보시고 다가와 그러셨다. “중은 그저 늘 신심으로 공부해야 한다. 신심이 없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만도 못하다.” 벽초스님은 평소 말씀이 없으셨고, 행동이 곧 법문이셨던 분이셨는데, 그 날 지나시다 문득 우리에게 들려준 그 말씀은 지금도 엊구제처럼 새롭다. 날마다 일 속에 파묻혀 있어도 그렇게 모든 게 좋을 수가 없었다. 부처님 도량에서 일하며 짬짬이 참선을 할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환희로웠다.
행자시절을 돌아보려니, 문득 ‘감자’가 떠오른다. 한창 보릿고개이던 여름철, 날마다 보리밥으로 공양을하는데, 나는 보리밥만 먹으면 배탈이 나 보리밥 공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쩌랴. 노스님은 물론 고참 스님들도 보리쌀로 공양을 하는데, 행자인 내가 감히 다른 방법을 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굶을 수는 없고 감자를 삶아 한 끼에 한 알씩 하루 세 알을 먹고 살았다. 배고프면 우물가로 가 바가지에 물을 하나 가득 떠서 물로 배를 채웠다. 보릿고개로 여름을 나던 중 여름기도가 들어왔다. 쌀밥을 지어 부처님께 마지를 올리고 노스님들께 쌀밥을 공양으로 을렸는데, 내 사정을 아시는 은사 스님이 당신의 밥그릇에서 밥을 덜어 내게 주셨다. 당신 것도 몇 숟갈 안 되는 양이니 내게 퍼주는 것이라야 그저 몇 숟갈뿐이었다. 이를 보고 대중스님이 이런저런 서운한 말씀을 하셨다. ‘아, 어찌 스님들이 저리도 인정이 없으신가.’잠깐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 마음은 그 때뿐, 물로 배를 채우고도 참선 공부하는 즐거움에 배고픈 줄도 모르며 살았다.
지금이야 과일이 지천이지만 그때는 일 년에 몇 번 특별한 날이나 되어야 과일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주먹만한 사과, 그것도 한 알도 아니고 육분의 일쯤 먹어보곤 했다. 그래도 많이 먹으면 공부 안 된다는 생각에 더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으니, 그저 부처님 법이면 족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잠자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는다. 늘 하루 두세 시간 잠을 잘 뿐인데, 본래 잠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지만, 은사 스님 공부하시는 것을 보며 더 공부에 정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분명히 잠자리에 드시는 은사스님을 보았는데도 새벽에 얼핏 보면 깨어 앉아 있곤 하셨다. 그러는 은사스님을 뵈며 ‘나도 어서 정진해 우리 은사 스님처럼 도인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낮엔 일하느라 참선할 시간이 모자랐으니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행자들과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가 그들이 잠들면 살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 행선行禪을 하곤 했다.
내 은사 스님이신 법희스님은 네살에 절에 들어오셔서 스물여섯에 수덕사로 만공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내가 이런 수좌 올줄 알았다’며 맨발로 나와 걸망을 받아들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만공스님께 전법계를 받으셨고, 평생 참선으로 일관하시다 법랍 여든다섯 해로 열반하신 분이다. 평소에도 가만 있지를 않고 방선 시간에는 산에 올라 솔방울을 주워 오거나 경내를 돌아다니며 풀을 뜯곤 하셨다. 공부 안 하고 잡담하는 제자라도 보는 날엔 주장자를 내리치시곤 할 만큼 엄격했다. 한평생을 참선으로 일관하신 선객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속가에선 좋은 부모를 만났고, 출가해선 더 할수 없이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며, 게다가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는가.
일 년 남짓한 행자생활 동안 신심으로 그저 하루하루가 기쁨으로 넘쳐 흘렀으며, 칠십평생을 지낸 오늘까지도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거우니 이 모두가 다 부처님 법을 만나고 스승을 잘 만난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승가사 선방에는 늘 스무 명에서 서른 명의 선객이 머물며 참선을 하고 있다. 내가 행자시절 내 스승을 보며 거울로 삼았듯, 오늘날 내 제자들에게 나또한 그런 스승으로 남아 있는지 돌아보며, 그 옛날 내 스승이 나에게 들려주었던 말씀을 제자들에게도 이르며 하루를 마감한다.
“계행 청정해야 하고 신심 돈독해야 중노릇 잘한다. ”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