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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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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이혜경 1997년 04월 182호
사진 주명덕 · 글 이혜경

한때 그 산골짜기의 내에는 하얀 물이 흘렀다. 냇물 상류의 절집이 어찌나 크던지, 거기서 흘러 나온 쌀뜨물을 먹으러 충청도의 쥐들어 다 모여든다는 말이 나돌았다. 임진왜란 때, 그 냇불은 ‘빨간색’ 이었다. 절집에 모여들었던 승병, 의병 들이 왜군의 손에 죽임을 당해 흘린 핏물이 골짜기를 빨갛게 물들이며 흘러내렸다. 천여 칸에 이르는 큰절을 태우는 불길이 거기에 더해졌다. 세월의 자정작용으로 냇물은 투명해지고 그 투명함으로 무심히 흐르더니, 이번엔 검정 물이 흘렀다. 근처에 사는 이이들은 미술 시간에 냇물을 검게 칠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갱도에서 목숨을 건 노동으로 캐낸 탄가루가 냇물을 어둡게 물들였다.
세상의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 물빛깔을 바꾸던 내는 가뭄으로 잔물만 고여 있다. 탄광은 폐광이 되었고, 내는 검정물의 기억을 가만히 잦히며 투명해지고 있다. 충남 보령시 미산면 성주산.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이 바다로 잦아들면서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운 산. 제 몸에 이리저리 뚫린 굴로 속앓이가 심하련만 성주산은 내색 없이 담담하고 그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성주천은 무심하다. 내와 나란한 포장도로에서 몇 걸음 안쪽으로 다그면 널따란 빈터가 펼쳐진다. 어른 허리쯤에 미치는 높이에 너비 일 미터 남짓한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빈터는 어수선하다. 이리저리 파헤쳐진 땅, 쌓인 흙더미, 빗살무늬와 삼베무늬 기왓장 조각, 나무에 기대어 세워둔 손수레, 녹슨 드럼통. 아기 공룡처럼 작은 포크레인이 쉬고 있다. 이직 발굴중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그 빈터에 드문드문, 석탑 네기와 비각에 둘러싸인 탑비, 시멘트로 땜질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불상이 서 있다. 신라시대 선문 구산 가운데 가장 번성했던 성주사, 사적 제307호 성주사터의 오늘.
성주사는 백제 법왕(599~600)때 창건한 오합사鳥合寺에서 유래된다. 오합사鳥含寺 또는 오회사烏會寺로도 불리었던 오합사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뒤 죽어간 병사들의 혼령을 천도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그래서인지,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오합사부근에는 기이한 일이 생겨난다. “오합사에 커다란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없이 절을 돌았다.” 「삼국유사」l권의 기록이다. 비슷한 내용이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다. “말이 오합사에 들어가 불우를 돌며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
나라의 멸양을 슬퍼하는 넋이 떠돌던 절 오합사는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돌아온 무염 국사가 주석하면서 오히려 번성한다. 무염스님은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애장왕 원년(799)에 탄생한다. 그 어머니가 호법천인이 연꽃을 내려주는 태몽을 꾸고 임신해서인지, 어렸을 적부터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를쌓을 때에는 불상이나 탑의 모양을 본뜬다. 열세살 때 설악산에 있는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출가해 법성 선사에게 「능가경」의 중심사상을 익히고 부석산의 석등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운 뒤에 헌덕왕 13년(82l)에 입당한다. 대흥성 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 얼굴 검은 노인을 만나 ‘멀리 모든 물건에서 취하려 하니 어찌 불佛을 알수 있으랴’는 말을 듣고 대오한 뒤, 낙양의 불광사로 가서 여만스님을 만나 법담을 나눈다. 백낙천의 도우이기도 한 여만스님은 마조에게서 심인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무염스님을 보고 찬탄한다.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었다. 뒷날 중국 땅에 선이 쇠미하게 되면 장차 동이에게 묻게 될 것이다.” 그뒤 마곡사 보철스님을 찾아 정진한다. 보철스님은 ‘남달리 실천하는 사람’으로 대중의 칭송을 받던 무염스님에게 법을 인가하며 자신의 스승 마조스님의 예언을 전한다. “저 해뜨는 곳 신라의 선남자들의 근기가 거의 무르익은 듯하니 네가 만약 동방 사람으로서 마음으로 통할 자를 얻으면 잘 지도하라”던 말씀을. 이는 육조 혜능이 입적하기 전에 남긴 예언-칠십 년이 지나면 동방에 두 보살이 와서 자기의 법통을 이을 것이다-과 아퀴가 맞아떨어지니. 무염스님은 육조 혜능-마조도일-마곡보철로 이어지는 선종의 법맥을 이은 것이다.
보철스님이 열반한 뒤, 무염스님은 중국 각지를 유랑하며 선지식에게서 불법을 구한다. 그렇게 주유하면 서 위독한 병자를 돌보거나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을 구휼하는 행으로써 ‘동방대보살’ 이라 불리다가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한다.
법문을 행하며 머물 곳을 찾던 무염스님은 입당할 때 동행이었던 김흔金昕과, 그 친척인 보령 지방의 호족 김양金陽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오합사에 머무른다. 이 무렵은 삼국통일 뒤 번영을 누리던 신라가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중앙 세력이 약화되고, 지방의 토착호족 세력이 득세하던 시기였고 이들은 중앙집권적 지배 이념을 제공한 교학 중심의 불교사상 대신에 선종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여기에다가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승이 귀국하여 선을 보급함에 따라 선종의 세가 급격히 부상하던 무렵이다. 선문 구산은 이렇듯 지방 호족 세력의 뒷받침과 지원을 받아 열리는데, 성주산문 또한 그렇게 열린다. 무염스님이 오합사에 머무르자 불법을 묻는 이들이 혜아릴 수 없이 많이 찾아든다. 한창 때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운수납자가 이천여 명에 이르고, 절은 그 때까지 유례가 없는 삼천불전을 건립할 만큼 규모가 커진다. 당시 기승하던 인근 남포 지역의 도적 떼까지도 감화되어, 그 도적 가운데 머리 깎고 불문에 귀의한 자가 백여 명에 이른다. 이에 문성왕은 산 이름을 숭암산崇農山, 절 이름을 성인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성주사聖住寺라고 지으니, 그 때부터 성주사로 불린다.
숭암산 성주사가 이렇듯 번성한 것은 “직접 뵙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백 배나 낫다. 입에서 말씀이 나오기도 전에 마음에 이미 와 닿았다”고 말하게끔 하던 무염스님의 높은 덕망에다가 수행으로써의 노동을 실천해 자급 자족하는 성주산문의 경제에 힘입은 바 크다. 왕실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 실천 궁행은 무염스님이 마조의 법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 선종은 일찍이 수행과 자급 자족의 생산종교로 보청普請의 법을 실행해 왔다. 이는 산문의 방장에서부터 행자에 이르기까지 전 대중이 생산 노동에 참여하는 공동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청규 생활은 마조문하의 백장스님에 의해 백장청규로 성문화되었으니, 마조의 법맥을 이어받은 무염스님이 개산한 성주산문의 청규도 이와 맥이 닿는다. 함안 영각사, 양평 보리사 등은 성주산문의 큰절이었고 그 문하에 순차, 원장 등의 스님들이 알려져있다.
“대사는 장년에서 노년에 이르도록 스스로 낮추는 것을 생활의 기틀로 삼았다. 먹는 양식은(대중과) 달리하지 않고 옷도 반드시 똑같이 입었다. 절을 짓거나 고칠 때에는 대중에 앞서 노역에 참가하면서 항상 말씀하시길, ‘부처님과 가섭 조사께서도 일찍이 진흙을 이기신 일이 있거늘 내 어찌 잠깐이라도 편안히 있겠는가’ 라고 했으며, 식수를 길어 나르거나 섶나무를 짊어지는 일도 더러는 몸소 하였다. 또한 말씀하시길, ‘산이 나를 위하느라 더럽혀졌는데, 어찌 내가 몸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가 자기 몸을 다스리고 일에 힘씀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에 나타난 행장은 ”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올바른 전법이 아니다’라며, 일체의 언설이나 명상名相이 끊어진 근본경지를 깨닫는 선수행인 무설토無舌土를 강조한 무염스님의 수행을 보여준다. 선과 교의대립이 날로 골깊어지던 그 때, “다른 사림이 마신 물이 내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먹은 음식이 나의 굶주림을 구원해 주지 못하는 법이다. 어찌 힘을 다하여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아니하느냐’는 말로 그 다툼의 부질없음을 경계하고, 오직 자성을 깨우치는 데에만 전념할 것을 이르고 행하던 무염스님을 경문왕과 헌강왕은 국사로 모신다. 상주 심묘사의 주지로 있던 무염스님이 세수 여든아홉을 일기로 입적하니 진성여왕 2년(888)의 일이다. 진성여왕은 이에 시호를 대낭혜大期慧로 내리고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를 세운다. 탑은 지금까지 전하나 절은 임진왜란때 왜군이 불태워 갯더미가 되었다.

성주사터가 처음으로 발굴된 것은 1968년의 일이다. 그 해에 ‘숭암산성주사사적’ 이라는 사찰자료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절의 유래도 알 수 있게 되었고 동국대 박물관에서 실측 조사도 했다. 1974년에는 삼천불전지가 발굴되었고 91년도부터는 충남대 박물관에서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성주사터는 동서가 이백 미터, 남북이 약 일백사십 미터에 이르는 장방형 터이다. 너비 일 미터쯤 되는 석축 담장이 어른 허리께에 이르는 높이로 절터를 빙 둘러싸고 있다. 원래 성주사터는 팔천팔백여 평이나, 절터 정비 사업을 벌이던 보령시가 매입한 석축 바깥의 토지도 절터에 편입해 명목장의 절터는 만여 평이 넘는다. 절의 중심부는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남쪽 담장의 동쪽 끝 육십팔미터 지점에서 문이 열린다.
맨 앞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중문지가 있고 그 뒤쪽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으로 추정되는 금당지, 금당지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정면 아홉칸 측면 네 칸의 삼천불전지가 있다. 삼천불전지는 동, 서 양 회량 가운데 동회랑이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었음이 발굴 과정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금당지 앞쪽에는 보물 19호로 지정된 성주사지 오층석탑이, 금당지 뒤쪽에는 정광여래사리탑, 가섭여래사리탑, 약사여래사리탑으로 알려진 삼층석탑 세 기가 나란히 남아 있다. 삼층석탑 뒤쪽, 절터 서북쪽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를 비각 안에 모셔두었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 가운데 신라불교를 연구하는데 가치가 높은 비문을 사산비명이라 하는데,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명,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문경 희양산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과 더불어 이 탑비명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글씨는 신라말에 유행하던 구양순체의 명필인 최인연이 썼다. 절터 뒤쪽 산기슭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최치원과의 인연을 기념하여 세운 최치원 신도비가 야트막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아직 발굴중인 성주사터 입구, 서편에 한옥 한 채와 공중화장실이 세워져 있다. 성주사터를 발굴해 복원하겠다는 백제문화권의 의지를 드러낸 관리소지만 아직은 비어 있다. 문에 바른 창호지는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뚫어 놓았고 마루엔 먼지가 수북하다. 먼지 낀 마루가 사람들의 발을 타서 맨들거릴 때면 성주사 범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는지. 물이 말라고인 듯한 저 내가 다시 한번 쌀뜨물 빛깔로 흐르게 될지.
빈터를 바람이 거침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산 속이라서,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듣기에는 가까운말소리가 바람소리에 실린다. 살아 있는 목숨들의 알길없는 두런거림을 들으며 고개 들어 산마루 푸른 그늘을 보다가 무언가 사무쳐온다면, “산이 나를 위하느라 더럽혀졌는데, 어찌 내가 몸을 펀안히 하겠는가’라며 노동과 수행을 하나로 여기던 수행자가 새삼 그리워져서 일 것이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움직이 것은 종처럼 하되 마음을 임금처럼 받들었던’ 무염스님. 깊은 우물처럼 어두운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 그 속에서 거칠 것 없이 환한 지경을 찾아내 마침내 자유로워진 이들. 오늘 그런 수행자를 그리워하는 중생의 마음은, 산사 어귀, 하늘을 향해 곧게 치솟은 아름드리 전나무들 사이에 갓 뿌리 내린 아기 전나무의 마음을 닮았을 것이다. 제 몸을 흔드는 세상의 바람을 맞을 때마다, 그 어리고 여린 나무는 곧게 치솟아 을라간 큰 나무를 우러러보며 곰곰 생각할 것이다. 바람에 몸을 맡겨 흔들리거나 엎어지는 게 차라리 낫다 싶을 때도 많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듯 곧게 뻗어나가는 걸 보니 저게 우리의 본성인가보다. 나도 저렇게 곧게 자라나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