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멀려서 심복사를 찾는 사람들을 천 년 동안 한결같이 푸근히 맞아주시는 분은 대적광전 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이다. 불전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소개되어 있으나, 연전에 문명대 교수를 비롯한 문화재 관리국 사람들 일행이 김천의 수도암과 봉화 축서사의 비로자나불과 조성시기가 비슷한 신라 말기의 것으로 고증한 바 있다. 석불은 조선조의 훼불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입었을 듯 싶은 상처가 희끗희끗 보이는데, 아파도 그 옛날에는 법당 안이 아니라 볕이 쬐고 바람이 부는 바깥에 모셔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력은 알 수 없고 그 비롯됨이 전설로만 전해지는데, 지난해 월운스님이 초안한 사적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수원군 광덕면 어은동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세 어부가 그물로 석불 한 분을 얻었다. 뭍에 오르니 석불이 입을 열어 신복사新福寺로 가자고 한즉, 한 길이 넘는 석불이 가랑잎 같이 가벼워져 수이 업일러 준 곳을 찾아나섰는데, 이 터에 이르러 갑자기 무거워지니 속절없이 내려놓게 되었다. 뒷날 신복사는 어떤 까닭으로인지 ‘심복사深福寺’ 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석불은 영험하여 그 분 앞에 엎디어 빌어 자식 얻은 사람이 많아, 대대로 이 곳서 살다가 서울 등의 외지로 떠나게 되었어도, 심복사 부처님 떠나지 말라는 뜻이 유지로 받들어져 십대째 이 곳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정견스님이 십오 년 좌복 생활 걷고 85년, 용주사 말사인 이 곳 주지로 부임해 왔을 때만 해도 신도 수가 삼사백이나 되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천 세대가 훨씬 넘는다. 인근의 현덕과 안중, 그리고 평택말고도 서울 등의 외지인도 많다. 인구가 늘고 수월해진 교통편을 감안하더라도 정견스님의 덕화를 짐작하게 하는 일인데, 그는 한사코 겸양했다.
‘심복사 주지는 뒷방에서 잠만 자도 됩니다. 법당의 원만하신 부처님이 일을 맡아 온전히 다 해주시니까요.”
그러나 잠커녕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십여 년 전 이 곳에 오자마자 부처님이 앉은 법당마저 깡그리 철거될 형편의 송사부터 해결해야 했다. 토지 소유권을 두고 어느 문중과의 사이에 빚어진 송사는 이미 2심까지 패한 형편이었고, 이쪽 변호사마저 “지는 싸움이니 합의를 보라’는 조언을 해 올 지경이었다. 질러 가는 길은 에둘러 먼 길 돌아온 먼 뒷날에서야 파악된 것이었다. 산중에서 도만 닦던 납자가 세상사를 송두리째 알게 된 혹독한 통과 의례를 치른 셈이었다.
법당이 구존하는한 사용권이 확보되는 것으로 삼 년만에 송사가 마무리되자, 퇴락한 법당과 요사채를 헐어 27평 법당을 짓고 부처님을 안돈시킨 것이 90년도 말이었다.
기존의 사찰 경지인 이천 평에 삼천삼백 평 땅을 사서 보태 경내지를 넓힌 다음, 진입로를 닦고 석축을쌓아 도량을 안정되이 했다.
지역별 나이별 등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람끼리 자생적으로 조직한 여덟 개의 신행 단체 간부들과 자주회합하면서, 일부나마 살림 공개를 시도해 본 것은 이미 예닐곱 해 전의 일이다. 신도들을 사찰 운영에 참여하게 함은 삼보정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의 하나일 터이나 아직 참여 의식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아 시간이 걸릴 일이라 판단한다. 수입과 지출에 관심을 두는 일조차 열적어 하지만 제대로 참여하게 되기를 꾸준히 유도해 나갈 작정이다.
지금 현재 기독교계와 함께 평택시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직을 맡고 있는 정견스님에게 환경 문제 또한큰 관심사다. 인근에 건축 자재 폐기장 시설이 들어서게 되어 지난 겨울은 정신없이 보냈다. 분진 따위로 심복사가 입을 피해는 치명적인 정도는 아닌 듯해 보여 한 발 양보해 마무리되었지만 문제 제기는 끊임없이 해나가야 할 일이었다. 평택시에서 관련 정책을 입안할 때는 정견스님을 의식할 만큼 그의 환경보존에 대한 관심은 두텁고도 깐깐하다.
그의 불행佛行은 참신하고도 성실하다는 평을 받는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불행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자리를 힌순간 놓침이 없이 챙기어 스스로를 경책해 온 일관된 자세에 관한 얘기일 것이다.
그런 그가 요즘 심란하다. 아니, 서너 해 전부터 그러했다. 그 심란함 추려 보려고 얼만 전에도 연곡사 뒷방에서 한 열흘 묵다 돌아왔다.
아침 공양 뒤 오전은 꼬박이 사중 일처리로 부산하고, 오후도 밤 시간도 혼자 시간 내기가 어려워 겨울이면 솔갈비가 더욱 푸근히 쌓이는 뒷산 숲길 포행마저 여의치 않다. 틈틈이 틀고 앉아 보지만 좌선은 잘 안 된다. 그의 일을 도와 주는 스님이 한 사람뿐이니, 한 시간 틈을 내기가 쉽지 않은 형편 때문이다.
사유의 시간이 절실했다. 자신이 애써온 바, 아我가 공空한 자리에서 한 일인지로 되짚어 보니, 열심과 성심을 다했다고는 하나 모든 일이 먼지처럼 여겨진다.
법당 옆에 바투 지어진 그의 방은 서향이다. 당신 방에 머무를 때는 서쪽을 향해 앉아 지낼 수밖에 없는터임에도 마음이 어찌 그리 편치 않으신가. 신라의 의상스님, 오로지 마음의 안양安養을 구하기 위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는 법이 없었다는데, 바라보기만해도 안양이 구해지셨던가. 서방정토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러하셨다는 것인가. 제 마음의 비롯됨에 대한 그의 천착은 선방이 따로 필요없을 지경으로 보인다.
“주지 소임 십여 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아상을 다시금 확인했어요. 앉은 자리 다시금 되짚어 보니, ‘선방 공부 헛했다.’ 싶게 ‘나’ 라는 것이 응어리가 져서 단단히 뭉쳐져 있는 그대로이니, 이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이건 모두 생사윤회의 근본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든 거에요. 요즘 들어 더욱 강렬해졌어요. 이제는 정말 다 털어버리고, 열아홉 생사 문제로 출가했던 그 심정으로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내 마음이 요즘 그래요.”
출가할 때 마음이 어떤 것이었나. 71년, 두어 군데 절 거쳐 찾아간 용화사의 전강스님은 멥게 이르셨다.
“한번 들어쉰 숨 안 나올 때,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그처럼 한순간에 온다.”
경북 의성군 구천변의 속향에서 가까운 정수사에서 맞닥뜨린 스님은 그를 보고 대뜸 “너 중 되겠다” 했었다.
까닭 모르게 아파 견딜 수 없는 머리로 소를 먹이러 나가서, 그 스님 이른 대로 관음 주력을 하다가 어느 순간 몸뚱이가 없어지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하나뿐인 손자를 무척이나 귀히 여기시던 할머니를 떠나 보낸 뒤였다. 그 할머니를 한여름에 칠일장으로 모시면서 관 밑으로 물이 되어 줄줄 흘러나오는 모습도 고스란히 지켜 보았다.
생사 문제 풀려고 찾아간 그에게 전강스님은 죽음의 문제를 한순간도 놓쳐지 않도록, 피할수 없는 제 문제로 마주 껴안도록 혹독하게 내모셨다.
도회지였던 만큼 한밤중에도 잠 안자고 주장자 들고 도량을 돌며 수좌들을 챙기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철저히 본을 보이는 데다가 법문마저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어서 발심이 안 될 도리가 없었다. 서른 명쯤의 은제자 가운데 막둥이로서 서너 해쯤 손수 모셨던 그 기간이 지금껏 정견스님을 버티게 한 근력이 되어 주었다. 강원에도 못 가게 했고, 책도 못 보게 하셨다.
스님의 제접 방식이기는 했으나, 유독 그에게 혹심하였다.
“올 겨울만 나와 함께 지내고 떠나거라.”
평소대로 누지르듯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머물렀을 터였다. 그러나 세 번씩 이르기는 했으나 말씀에 틈이있어 떠난 해 겨울에 은사 스님은 입적하시어 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 일로 그는 부모 떠나 보내는 것 이상의 깊은 상실감을 겪었다. 그리고 제방 선원을 여일하게 찾으니, 그가 다닌 수많은 선방 가운데서도 극락암에서 경봉스님 모시고 살던 때의 마음의 희열을 잊을 수가 없고, 차가 일쑤 끊어져 사십 리 길을 걸어 들어기곤 했던 법흥사에서 지호스님 모시고 산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큰 복이었다. 지금은 보궁을 크게 손질하여 옛 맛을 많이 잃었지만, 그 때만 해도 지호스님이 아침에 참배하고 무설전으로 내려가고 나면 보궁은 하루 종일 혼자 차지였다.
적처란 망상이 크게 일거나 끊어지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지만, 그 곳서 그는 아주 잘 살았다.
“좋았지요. 좋았으니까 한 거거든요. 다 떨어진 누더기 옷 입고 서울 거리다녀도 부러운 사람 하나 없었거든요. 안하무인이라, 눈 속에 사람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 시절, 함께 걸망지고 다녔던 도반들을 꼽다 말고 그는 뒷말을 흐린다.
“난 지금 엄청난 외도 하는 거예요. 그들은 아직도 한 철 안 거르고 오로지 선방에서만 지내지요.”
십 년만 넘기면 승부가 나리라 여겼었다. 도만 통하면 나를 보는 사람은 모든 괴로움을 여의게 되고, 내 이름자만 들어도 삼악도가 다 멸해지려라는 발원문이 현실이 되어 줄 터였고, 도만 통하면 하루 저녁에도 천금 만냥와 시은을 다녹이게 될 터였다. 그러나 좌복 위에서 십오 년을 넘기고 난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죄 짓는 중생들이 갖다바치는 시은을 축내며, 은사 스님 그리도 질타하시던 “산중 오입”이나 하고 있는 꼴은 아닌가.
이런 마음으로는 설사 도를 깨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제 경계일 터였다.
공양을 들어도 모래알만 갈던 나날이 이어지나 싶더니 그 틈으로 장티푸스에 걸려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친의 병환 소식을 들었다. 조선조 인조 때의 진묵스님은 효성이 지극한 분이어서 그 스님 떠난 뒤에도 모친의 무덤에는 그에 감복한 사람들의 문향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만대로 모친을 섬기고 있는 셈이다. 불가에서는 피붙이와의 인연을 냉정히 여기어 소홀히 하는 바가 없지 않으나, 부처님 또한 부친의 상여를 손수 메어 극진한 예를 갖추지 않었던가. 정견스님, 부친 떠난 뒤로 혼자 남은 어머님과 함께 산다.
해제철이면 속가로 가서 두 분이서 짓고 있는 농사일을 거들고는 했다. 그 아버지, 새벽길로 아들이 집을 나서면 자전거 뒤에 걸망을 싣고 버스타는 곳까지 두 시간 길을 함께 걸어 주셨다. 그리고 아들이 아주 사라질 때까지 한자리에 그린 듯이 서서 그 뒷모습 지키곤 했다. 예순여덟 되던 해에 암으로 판정 받고, 수술하면 팔십 프로로 살아난다 하더라도 일 없다 하시며 스스로 주사 바늘을 뽑고 병원문을 걸어 나오셨다. 꼬장꼬장한 유생으로서, 후사를 잇지 못한 대죄를 못내 삭이지 못하셨을 아버지는 평생을 땅만 일구던 농부였으되 마지막이 그렇게 당당하셨다. 그 대죄 무릅쓰고 길 떠난 자신이 그 동안 얻은 바무엇인가.
뚜렷한 안목 없이 치러냈던 법당 불사에도 지나친 점은 없었던지, 수준급 법문을 하면서도 그것이 딴 아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던지, 어떤 애매한 일로 그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던 신도들에게 섭한 마음만 들끓었으니, 지신에게 대비심이란 것이 한자락이라도 있었던지 따위를 다시금 되새긴다. 십 년 주지 소임 살면서 소홀히 했던 문제라고 했다. 다시금 자신을 다잡으니 나를 용서하지도, 합리화하지도 말 것이며, 문제가 있다면 그것 인정하고 털어놓는 용기 또한 잃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선방행이든지, 어느 절 한주이든지, 새로운 소엄살이든지, 취해갈 외양은 중요한 일이 아닐 터였다.
정견스님, 색 아닌 색인 회색장삼 자락 아래로 빛깔 고운 염낭 하나 차고 다닌다. 그 속에는 신분증 한장 든든히 들어 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쓰러져도 되게시리 살아보려 한다.
들어쉰 숨 한번 내쉬지 못하면 그 때가 죽음이라던 은사 스님 말씀, 눈을 쏘듯 선연한 빛깔로 그 말씀 간직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