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용의 눈물 속에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최세영 1997년 07월 185호
텔레비전을 켰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서 일어나 진노한다. 이방원의 살생부가 펼쳐진다. 이 때가태조 7년 8월 26일이다.
나는 드라마 ‘용의 눈물’ 을 보면서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왜 그 해에 절박하게 고려대장경을 이운했는지를 생각한다.
고려대장경이 강화 선원사를 떠났다. 고려대장경이 강화에서 조성된 뒤, l251년 낙성경천회를 연 지 대략 백사십 년 만의 일이다. 그 동안 나라가 바뀌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고려의 백성이 조선의 백성으로 이 나라의 나무와 풀 한 포기도 예전 고려의 땅이 아니라 조선의 땅에서 자라고 있었다. 바다나 강의 물길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월 22일 태조는 금강산에 있는 도승통 오은스님을 모셔온다. 혜성이 나타났기 때문인데,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태조는 왕가의 재앙을 물리치려는 법회를 지천사에서 연다. 그런데 왜 그해 5월에 고려대장경을 이운해 갔을까? 태조의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 5년에 죽었다. 태조는 신덕왕후강씨의 능침을 정릉에 마련하고 왕비의 원찰로 흥천사를 세운다. 태조 7년 8월 14일, 바로 신덕왕후 강씨의 대상이 끝나는 날이다. 그의 명복을 빌고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태자의 권위가 반석 위에 올라 앉기를 빌면서 태조는 흥천사를 마무리 짓고 한편으로 고려대장경을 이운한다.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들은 조심스럽게 강화 갑곶진의 여울목을 지나 그 뱃머리를 한강으로 향했다. 이제 고려대장경은 그 본향인 강화를 떠나 합천 해인사까지 천 리 여정 길에 오른 것이다. 강화에서 한강물이 합수되는 지점에는 물길이 급변하는 여울이 무수히 많은 곳이다. 이 곳의 여울목들이 천 리 여정의 첫 관문이었다.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들은 선단의 뒤를 이어 다랐다. 여름장마가 시작된 시기였다. 조선 태조는 용잔나루로 향했다.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들을 몸소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1398년 곧 조선 태조 7년 음력 5월 10일의 일이었다.
困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輝源寺.
이 기록을 토대로 하면 강화 선원사에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언제부터 어떻게 모셔져 있었는지는 모른다. 강화성 서문 밖 판당에 모셔져 있다가 고려대장경이 이운되기 위해서 선원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르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텔레비전에서는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경순 공주가 비구니가 되기를 결심하고 태조 이성계와 마주앉아 있다.
태조는 애처로운 경순공주를 가슴 아프게 쳐다본다.
다시 조선 태조실록을 보자.
정사일에 비오다.(丁巳雨) 음력 5월 11일에 비가 왔다.
무오일에 비오다.(戊午雨) 음력 5월 12일에 비가 왔다.
公隊長隊副二天人, 輸經板子支天寺.命檢敎參贊門, 下府事兪光行香.
五敎兩宗僧徒 經儀仗. 經儀仗 鼓吹前導.
이천여 명의 군사가 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 오교 양종의 스님들이 향을 피우고 북을 치며 앞장섰다.

이 때 경판을 실은 배가 용산강에까지 올라왔다면 이 배들은 강배로 볼 수 있다. 그 무렵 바다배를 이용했다면 서강까지 밖에 거슬러 올 수 없었다. 한강 수심이 얕아서 바다배는 서강에 정박하고 북한강이나 남한강을 이용한 강배들은 물자들을 싣고 와서 용산강나루나 마포나루에 정박하고 물자들을 풀었다. 강을 이용한 수운길이 그 때는 육로를 이용한 길보다 훨씬 쉬웠다. 그 서강 바로 옆에는 마포나루가 있었다. 아직도 이 곳에는 강배들이 바로 객주들의 집으로 뱃머리를 대었던 수운집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강 수운길을 이용해 왔던 쌀, 나무, 밀린 생선, 새우젓 등 그 품목이 다양했다. 한때 성시를 이루었던 마포, 마포새우젓이란 말도 이 때 생겨난 말이다. 심지어 창덕궁이나 경복궁을 지을 때 썼던 기둥이나 대들보 같은 황장목들도 뗏목으로 묶어 이 한강물길로 오대산에서 마포나루까지 운반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 곳은 사통팔달로 강남과 북, 동서로 서울시내의 교통길을 열어 주고 있다. 그리고 용산나루는 지금 원효대교를 생각하면 된다. 원효로 방향쪽 윗부분 쯤에 조선 태조실록에 기록된 배들이 정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까지 온 고려대장경은 연 이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여름장마가 시작되던 때였다. 고려대장경판은지천사에서 여름 우기를 나고 이운되었을 것이다. 합천 해인사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배를 이용해야 되는 문제가 있는데, 강이든 바다로든 이 때 부는 바람은 모두 역풍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느 길로 어떻게 이운되었을까? 어떤 배를 이용해 옮겨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먼저 지천사까지만 생각해 보자. 용산강에 배를 댄 뒤 고려대장경은 육지로 옮겨진 것임에는 틀림없다. 지천사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육로의 수송이 필요하다. 이 때의 광경을 다행히도 조선 태조실록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군사 이천여 명이 고려 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겨 가며 오교 양종의 스님들이 향을 피우고 큰 북을 치고 옮겼다면 그 의례가 얼마나 장엄하고 정성스러웠을까. 팔만여 장의 방대한 분량의 고려대장경을 정성스럽게 옮기기 위해 몇 대분의 수레가 필요했을 것일까? 또 아니면 조선의 백성들이 고려대장경판을 한장 한장씩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품고 그 이운길을 따라 갔을까? 그러나 그 이운의 방법에 대해서는 상상해 볼 수있을 뿐이다. 다만 이운의 장엄한 의례를 갖추어 진행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 때 베풀어진 의례는 지천도량으로 보고 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관장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혀 주었다.
지천사에서 마리지천도량을 베풀었을 것이다. 마리지천이란 일광 천, 곧 햇빛을 상징하는 천신이다. 일천자의 이들로서 신통자재력이 무궁무진 하고 모든 재앙을 물리쳐 주는 천신이다. 몽고병란이나 거란병란 때에도 마리지천도량을 베풀었다. 고려대장경의 안전한 이운을 빌고 나라의 인위를 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육지로 이운되어 보관하던 지천사는 어디였을까? 태종 8년 기사에 지천사를 없애는 기록이 나온다. 지천사는 태평관 옆에 있다. 태평관은 지금의 조선호텔자리다. 이 태평관은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숙소로 쓰고 명나라 사신의 수행원들이 머물 숙소로 지천사를 쓴다. 세종조에도 지천사 기록이 나온다. 서울도성을 쌓으면서 동서로 나누어서 왕이 도성을 쌓은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는데, 동쪽성을 쌓은 무리는 흥천사에서 위로연을 베풀고 서쪽성은 지천사에서 위로연을 베푼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조선호텔 서쪽편이면 지금의 프라자호텔 자리다. 과거엔 남대문을 거쳐서 미도파 종로 1가 광교통으로 오는 길이 정로였다. 남대문으로 올 때 그 첫길에서 만나는 절이 바로 지천사다. 지금의 프리자호텔 자리에 고려대장경이 모셔졌다가 이운되었다. 그려면 고려대장경은 어느 길로 어떻게 이운되었을까?
다시 조선 태조실록을 보자.
幸西江. 觀全羅道漕.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왕이 서강에 나가서 전라도에서 올라온 큰 배를 살펴 보았다는 기록이다. 전라도 조박-전라도에서 올라온 큰 배. 왜 태조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큰 배를 살펴보았을까? 그것은 바로 고려대장경을 싣고 갈 배였다. 이 배들은 바다배였다. 고려대장경 이운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단서였다. 고려대장경은 이제까지 알려진 육로의 길이 아니라 해로를 택한 것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태조 이성계의 공덕은 무산된다. 무학스님은 태조에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고 한다. 모든 것을 방하착하라. 태조는 퇴위한다. 그는 경순 공주와 함께 함흥으로 향한다. 그는 여기서 고려대장경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을 남겨준다. 언제 고려대장경은 바닷길을 이용해 합천 해인시에 도착했던 것일지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방하착하지 못한 내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