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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내놓고 정진하라 이르시던 은사 효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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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1997년 07월 185호
출가사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라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머릴 깎았다. 마침 그곳에서 홀로 정진하던 일타스님께였는데, 그 때 내 나이 스물아홉이었고, 일타스님은 서른하나였다. 일가족 마흔 명 이상이 출가한 집안에 이미 열다섯에 출가 해 단지斷指까지 해가며 구도의 정열을 불사르던 일타스님은 정성스레 내 머리를 밀어 주었다.
머리를 깎고 “부처님께 절하고 기도하는 공덕이 많다”며 내게 기도할 것을 권하는 일타스님의 말씀에 따라, 일만배를 서원하고 히루에 삼천오백 배씩 사흘을 했다. 삼복 더위에 히루 삼천배를 하고 나면 땀이 흘러 때가 다 빠져 버릴 지경이었으나, 그렇게 절을 하며 부처님 제자될 것을 발원했다.
불심이 돈독했던 어머니와 ‘반야심경’ 을 주야로 독송하시던 아버지의 무릎에서 컸으니 초등학교 시절 절로 소풍을 가면 법당의 부처님이 그렇게 푸근하고 좋을 수밖에 없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학시절 인민군에게 몇 번이나 끌려갈 위기를 관세음보살 주력으로 모면했던 것이나, 대학 시절에도 아침 저녁으로 절에 들러 예불을 빼놓지 않고 들었던 걸 보면 내게 와 있던 오랜 불연을 알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바로 다음 해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대승사 산내 암자인 묘적암으로 가 머리를 깎고 발심을 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은덕이리라.
묘적암에서 일타스님과 둘이 살며 절 일도 익히고 공부도 했다. 일타스님은 채공을 맡고 나는 밥을 지으며 세 달을 났는데, 스님께 ‘초발심자경문’ 을 배웠다. ‘순치황제 출가시’ 와 ‘부설거사 사부시’도 공책에 적어가며 배우던 어느 날, 일타스님께서 “해제 하면 나도 이 절을 떠날 테고 동화사에 가면 인곡스님과 효봉스님이 계시니 그 곳으로 가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동화사에서 인곡스님을 모시고 있던 혜암스님께 소개장을 써 주었다.
해제가 되자 나는 소개장을 가지고 묘적암을 떠나 동화사를 향했다. 동화사로 가는 도중 대구 버스정류장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그분께 어느 절에 계시냐고 물으니 동화사에 있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분꼐 물었다.
“그 절에 혜암스님이라고 계십니까?”
“그렇소만 무슨 일로 그이를 찾아가오.”
지초지종을 얘기하자 그 스님이 다짜고짜 그 편지를 좀 보자고 했다.
“아니 스님이 누군줄도 모르고 제가 그 편지를 보여드립니까?”
한번 보자느니 안 된다느니 실랑이를 했는데, 그분께서 웃으며 그랬다.
“이 사람, 내가 혜암이오”
동화사 원주 소임을 보면서 대구로 장을 보러 나왔다가 들어가던 혜암스님을 그렇게 만난 것이다. 나이들어 요즘 혜암스님을 가끔 뵐 때면 편지를 보자커니 안 된다커니 실랑이하던 그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동화사에 들어간 다음 날, 효봉스님을 뵈니 그분께서 대뜸 그러셨다.
“얼굴이 중상인데 어찌 이제까지 속가에 있었느냐”
내 생년월일을 물의시곤 또 그러셨다.
“신미생 유월이면 불도가 들었구나”
하시며 이직 행자이니 큰절에 가 심부름 잘 하고 있으라 일렀다.
그 무렵 동화사엔 효봉스님, 인곡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이 머물고 계셨고, 스무명 남짓 되는 선방스님네가 정진중이었으며 열 분쯤의 대중스님이 강원에서 경을 익히고 있었다. 그분들을 보니 빨리 계를 받고 중이 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묘적암에서 석 달을 있으면서 어지간히 절 일을 익히기도 했거니와 세속 공부를 좀 익혔다 하여 공양간에서 허드렛일을 하지 않고 서기일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효봉스님께 “스님의 상좌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시월 보름날 계를 설해 주겠다시며 쾌히 허락하셨다.
내 은사 스님이신 효봉스님은 서른 여덟에 늦깎이로 출가하자마자 금강산 신계사에서 여덟 해를 장좌불와와 오후불식으로 도를 깨친 분으로 계행과 출가정신이 철저하셨는데, 내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중 되었으면 참선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더 있겠니. 강사는 죽을 때 후회하고 죽는다.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우고 바로 외워도 생사해탈할 수 있겠느냐. 기도와 주력은 모두 제 욕심 때문에 한다. 수좌는 모름지기 화두를 들어야 한다. 중 되고 나서 애써 참선하다 죽었는데 지옥가겠느냐. 묵숨 내놓고 정진해라.” 스님께선, 대근기는 참선하고 중근기는 경보는 강사 노릇하고, 하근기는 기도나 염불해 절밥 얻어 먹고산다며, ”법흥에는 문자 들여다 보는 중근기는 되겠다” 하고 허허 웃으시면서도 참선에 힘쓸 것을 당부하셨다.
동화사에서 석 달 동안 행자생활을 끝내고 그 해 가을 효봉스님을 은사로, 인곡스님을 계사로 계를 받고, 이듬해 “내 밑에 삼년만 있으라” 는 은사스님 말씀따라 통영 미래사로 가 그분을 모시고 살았다. 내가 세 해 동안 그분께 익히고 배운 것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
검박하기 이를 데 없었던 스님은 촛농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이 긁어 모아 접시에 담아 심지를 박아 불을 밝히곤 하셨다. 걸레도 너무 짜면 빨리 떨어진다고 꼭 짜지 말라고 이르셨다.
“이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으나 계, 정, 혜 삼학을 닦아 생사해탈하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다” 하시던 은사 스님 생각이 요즘들어 부쩍 난다. 굉목이나 무명옷을 입고도 눈 푸르게 ‘목숨 내놓고’ 정진하던, 그리고 중노릇 잘못하면 가차없이 신문 밖으로 내쫓아 버리던 그 시절이 되돌아 보아지는 것은 늙어가는나이 탓일까.
“계율 청정히 지키라”던 은사 스님의 말씀처럼 나 또한 내 제자들에게 “계정혜 삼 학을 잘 닦아 늘 청정히 수행하고 계율을 생명같이 여기라”고 이른다. 파계破戒는 곧 파기破器다. 깨진 그릇에 아무리 물을퍼부어 보았자 물이 담기지 않는 것처럼 계율을 어기면 결코 성불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지금 내가 있는 송광사엔 짧은 출가 긴 깨달음의 기치를 내걸고 많은 수련생들이 눈을 빛내며 산문을 들어선다. 나는 그들을 보며 도원 선사 ‘정법안장’ 의 이런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젊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사람의 일생은 꿈과 같고 세월은 빨리 흘러간다. 이슬의 목숨은 꺼지기 쉽고 시간은 나를 위해서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어서 빨리 중이 되고 싶어 행자시절 몇 달이 지루하기만 했던 그 시절로부터 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 ‘목숨내놓고 정진하라’ 시던 은사의 말씀을 나는 얼마나 지키며 살아왔는지 반문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