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 화합, 헌신의 공동체인 승가는 안팎의 내실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계율을 생명처럼 중시한다. 계율을 통해서 자신의 신, 구, 의 삼엽의 악습을 고쳐서 선업으로 전환시킨다. 또 교단이 도덕적으로 청정한공동체임을 대중에게 인식시켜 대중교화의 믿음을 굳건하게 다진다.
계율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세속적인 이해 관계 유지를 위한 강제적 규칙이 아니다. 계율은 지혜를 기르고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 단순한 규제를 넘어서 지혜와 자비를 성취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자의 덕목이다.
불교는 무아와 연기법의 가르침이다. 무아와 연기법은 경직성과 고정성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창조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계에 대한 우리의 입장도 결코 무아와 연기법의 세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원칙에 의해 이제까지 계율에 대한 그릇된 견해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형식 논리에 입각히여 계율을 이해하고 지켜나가는 태도다.
“계를 가진 이는 지혜가 있고, 지혜를 가진 이는 계가 있다”는 「아함경」의 가르침을 새겨 보면 강제적 규범에 얽매이거나 수행의 성숙으로 승화시켜 나가지 못하는 태도가 계율 준수의 취지에 어긋남을 알수 있다.
둘째, 계율을 전면 부정하고 경시하는 태도다.
여기에는 수행자로서 확고한 신념이 결여되어 계율을 부정하는 측면이 있다. 또 마음만 걸림이 없으면 계율쯤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며 오히려 마음의 자유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는 측면이다. 이는 선禪과 대승을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셋째, 자신의 입장, 이해관계, 취향에 따라 계율을 임의적으로 해석하여 지키고 범하는 태도다.
이는 확고한 원칙에 따라서 자신의 행위를 판가름하지 않고 제반 상황에 따라 원칙과 신념을 편리한 대로 바꿔나가는 태도다.
계율에 대한 위의 세 가지 그릇된 견해를 극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이다.
계율은 수행의 근본이다. 확고하게 지켜야 함은 새삼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가 편협한 형식 논리에 얽매어 있거나 지혜와 자비의 성취라는 궁극적 이상으로 승화하지 못하는 풍토와 태도를 극복해 나가는 일이 가장 절실하다.
형식 논리에 입각한 계율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지칫 수행자 지신과 대중에게 경직성을 불러올 위험성을 갖고 있다. 경직성은 늘 편협하고 폐쇄적인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계율에 대한 논의에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핵심은 사회의 변화에 따른 계율의 새로운 폐지와 제정, 이에 대한 필요성과 정당성, 원칙과 기준의 부여다.
여기에서 4바라이나 13승잔법 등 교단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계율이 논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상황변화에 따라 늘 제기되는 세세한 계율에 문제라 할 수 있다. 불필요하고 모호한 항목이 많기 때문이다.
교단 또한 현실적으로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존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처님이 계실 때에 계율의 모든 항목들이 일괄 제정된 것이 아니라 교단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또 사회 일반에서 교단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교단의 청정과 화합을 위하여 수시로 제정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날에 교단 안으로나 그리고 변화하는 사회 상황에 따른 계율의 제정과 개정, 폐지는 불가피하며 절실하다.
먼저 폐지와 개정이 문제된다.
세세한 계율에 대해 폐지하거나 개정하지 말자는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교단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수행자의 품위와 처신, 역할이 새로이 요구되어 만들어진 계율은 교단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폐지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사회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계율의 재정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승가의 의, 식, 주와 소유물, 행동, 사회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교단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계율에 대해 폐지, 개정, 재정을 반대한다면 출세간의 승가가 세간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창조적 지도력을 앓게 되는 것이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세속의 논리와 풍조에 휩쓸리자는 것이 아니다. 교단이 분명한 불교적 원칙과 입장을 가지고 교단과 사회 안팎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지는 것이다.
무아와 불이적不二的 연기의 세계를 주장하는 교단이 변화의 흐름에 경직되어 있지 않은지를 반성해 보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계율을 지켜야 되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궁금합니다. 우리 종단에서는 현실적으로 지킬 수도 없고 지켜지지 않는 보살계, 비구계를 주고 받고 합니다’ 하는 도법스님의 계율에 대한 대략적 문제 제기는 그 글 전체의 논조와 흐름을 정확히 읽어낼 때 올바른 진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교단은 계율에 대한 논의를 더욱 분명하게 열어 놓고 검토해야 한다. 계율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아예 금기시되고 파계자, 파화합자로 매도되는 풍토는 없어져야 한다. 부처님이 계실 때와 그 뒤의 교단이 끊임없는 논란과 논의를 거쳐 계율과 청규가 제정되어 왔음을 새겨 보아야 한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흐르는 변화 속에서 교단은 더욱 새롭고 바람직한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먼저 세세한 계율에 대한 폐지와 개정 여부는 유보한다 하더라도 수행자의 은처, 도박, 경전과 어록의 자의적 해석, 호화부도, 분수에 넘치는 소유와 축재 등과 각종 산업사회의 병폐에 대한 바른 원칙과 입장을 가지고 계율과 청규로서 제정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이 절실하다.
강제적으로 금지하는 차원을 넘어 모든 생명이 대자유와 대안락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계율관과 실천이 절실하다.
이런 점에서 교단과 사회는 원로 스님들과 율사 스님들의 지도적인 역할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