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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영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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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이혜경 1997년 07월 185호
사진 주명덕 · 글 이혜경

언제 누가 산비탈을 깎고 다듬어 이룬 것인지.
경남 합천시 가회면 영암사지로 가는 길, 갓 모내기를 마친 산비탈 계단식 논에 가녀린 모가 살랑인다. 논에 관 물엔 능선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논 군데군데 우뚝하게 박힌 바위들은 그 논이 산 자락이던 기억을 안고 흘러가는 시간을, 그 시간에 실려 머물렀다 떠니는 이들을 그냥 바라본다. 풍경은 얼핏 고요해 보인다. 그러나 갓 심어진 어린 모는 그 고요함 속에서 물의 부력을 견디고 있다. 물에 뜨지 않고 뿌리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옆 다랑이, 고무 장화를 신고 안개비를 가리려 비닐을 덮어쓴 채 논두렁을 걷는 노인의 허리는 하늘보다 땅에 가깝게 구부러져 있다. 살아 있는 한 버팅겨야 한다는 의지와 쉼없는 노역에서 벗어나 땅으로 돌아가려는 순명이 하늘과 땅의 중간쯤으로 허리를 굽게 한다.
노인이 걸어가는 논다랑이 옆, 베어진 보릿단은 두평에 엎어져 노랗게 마른다. 막 씨앗에서 싹튼 연둣빛 모와 이제 한살이를 마치고 씨앗으로 돌아가려는 보릿단이 나란하다. 그 사이를 걸으며 노인은 보여준다.
연둣빛 속에 이미 말라 바스라진 누른 색이 깃들어 있다고, 저렇듯 베어져 널린 보릿단은 겨울이면 매운 바람보다 더 새파란 빛으로 피어나리라고. 분별하려는 마음은 부질없다고. 그런데도 마음은 분별하려 든다. 온종일 시야를 가리는 저 물기가 안개인지 는개인지 이슬비인지를.
군립공원 황매산 표지가 있는 길로 접어들어 다다른 영암사지 입구, 두어 세기는 족히 견뎠을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무가 겪어냈을 시간의 무량함을 헤아리기에 앞서 그 나무에 사람들이 붙인 이름부터 궁금해 한다.
이름을 모르는 채 회화나무일 성싶은 나무를 지나쳐 왼편 계단을 올라가면 절터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이 보인다. 흰 바위 갈피에 초록이 무늬를 놓은 산 아래의 터, 황매산 영암사지다.
절에 관한 기록이 남은 게 없으므로 절의 유래에 대한 추측은 여러 갈래다. 신라와 백제가 싸우던 접경지대여서, 전쟁에서 죽은 혼령을 달래는 원찰로 세워졌다고도 추정한다. 절터 근처의 논에서 식물이 군데군데 발견되는 걸로 미루어 어림 되는 절의 규모며 범상치 않은 정성이 깃들인 식물들이 나라에서 세운 원찰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왕이 사랑하는 후궁을 위해 지은 원찰이라는 전설도 있다. 왕이 국경을 순시하다가, 또는 왕의 아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밤은 깊고 길은 어두운데, 멀리 가물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외딴집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어 인연을 맺고 궁으로 데려와 후궁을 삼았다. 뒷날 큰 도적이 잡혔는데 알고보니 그 후궁의 아버지였다. 도적의 딸을 궁 안에 둘 수 없었던 왕은 후궁에게 묻는다. 너를 더 이상 내 곁에 둘 수 없으니 소원을 말해봐라.
후궁은 말한다. 제가 살던 곳에 절을 하나 지어달라고. 그래서 지어진 절이라고. 나라의 원찰이든 사랑했던 여인에게 정표로 세운 절이든, 영암사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에 깃들인 정성은 유난스럽다. 1984년 동아대박물관의 발굴로 금당터와 서금당터, 회랑 등의 건물 유구가 밝혀지고,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조각들이 발굴됨으로써 금당 기단 면석의 조각, 삼층석탑, 쌍사자석등, 귀부등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되었다.
절터 입구마당의 한가운데,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삼층석탑이 있다.
별다른 꾸밈 없이 간결하고 담박한 탑은 보물 제 480호 영암사지 삼층석탑이라 일컬어진다.
그 옆의 맨땅에 불상도 모셔 놓았다. 손을 겸손하게 앞으로 모둔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졌는데 거기에 누가 머리 모양의 돌을 얹어놓았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절을 찾은,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중년 일행이 합장한 채 탑돌이를 한다. 합장, 손바닥을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의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것이라면, 합장한 채 탑을 도는 저들은 지금 자신 안에 깃들인 신을 불러내어 만나는 것인지. 탑돌이를 마친 그들은 세상 천지의 부처에게 빛을 공양하던 쌍사자석등을 보러 간다.
보물 제 353호 쌍사자석등은 탑이 있는 곳에서 도드라지게 석축을 쌓고 그 석축 양옆의 무지개처럼 휘어진 계단을 올라간 곳에 있다.
석축 아래에서 큼직한 돌로 쌓은 석축과 그 위의 석등을 올려다보며 한사람이 말한다.
“그 옛날에 저 돌을 어떻게 들었을까.” 동행이 양팔로 물건을 치켜올리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장사가 이래 들었을기라. 장사가 옛날엔 많이 낫거던. 지금은 없지만.”
보았던 듯이 장사를 형용하던 사내는 계단을 오른다. 부처를 모신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계단은 폭이 아주 좁아서 어른의 발바닥이 다 들어치지 못한다.
자연히 발뒤꿈치는 허공에 들린다. 발뒤꿈치 든 겸손함을 가르치는 계단을 올라가면 사자 두 마리가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은 법주사지 쌍사자석등과 맞먹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사자가 딛고 선 하대석의 무늬도 정교하지만 그 보다는 사자가 지닌 힘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가슴과 두 팔을 맞대들어올린 돌무게를 지탱하느라 긴장한 사자의 뒷다리 근육은 튼실하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그 다리는 부실하다.
나라없는 설움을 온몸으로 겪느라 돌사자는 다리를 잃었다. 영암사지까지는 길도 안 났던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석등을 실어냈다. 일본으로 실려갈 뻔한 석등을 동네 젊은이들이 찾아왔다. 그러는 와중에 다리를 잃었다. 다시 제자리로 오면서 복원하긴 했지만 원래의 다리만큼 성할 순없다. 그 부실한 다리로도사자는 의연히 돌을 떠받들어 권당의 부처에게 빛을 공양한다.
금당은 기단을 면석으로 둘렀고 거기에 계단을 내어 오르게 되어 있다. 계단의 소맷돌은 투각기법으로 조각되었다. 닳아져서 식별이 어렵지만,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가릉빈가라고 전해진다. 사방을 둘러싼 면석에는 안상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거기에다가 뒷면을 제외한 삼면에 동물을 더 새겼다. 각면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씩 배치되었다. 동향한 금당의 남쪽면에는 사자가 북쪽면에는 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해태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자라고도 하는 동물이 버티고 있다. 딱잡아 이거다 이름지울수 없으므로 오히려, 보는 이마다 자기 마음에 담은 영상을 비춰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금당정면인 동쪽의 동물은 그나마 온전한 몸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밑에서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얼굴만 새겨졌다. 몸은 돌속의 세계에 갇힌 채 얼굴은 돌표면의 세상으로 쑥 드러난다.
석공의 손은 광물인 돌을 유동체로 만든다. 돌표면은 물 위에 푼 막이 된다. 그 막을 밀어올리는 얼굴이, 태어나는 순간의 고통이 하도 커서 전생의 기억을 잊는다는 바로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하는 후궁이 도적의 딸임을 깨달았을 때 왕의 마음에 스쳐간 영상 또한 저러하지 않았을까. 일상속에 무심히 지나치던 진실, 덮어두었던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의 소스라침.
금당 뒤편으로 올라가면 또다른 금당, 서금당터가 나온다. 서금당터 한가운데, 해마다 한 차례씩 법당에 불을 지펴 잡귀를 쫓았던 일본 법당의 그것과 같은 화로 자리가 남아 있고 거기서 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영암사에서도 그런 의식이 치러지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한다.
서금당터 앙편의 보물 제 489호 귀부는 비신도 이수도 없다. 동편의 귀부가 조금 크다. 부릅 뜬 눈, 앞으로 니아가느라 맞는 바람결이 만져질 듯 섬세한 귀의 주름, 여의주를 문 입 가장자리의 갈기 같은 무늬, 밀린 거죽이 느껴지는 발가락의 주름으로 거북은 살아난다.
거북이라기보다는 용처럼 곧추 세운 목으로, 인동 무늬 덩굴진 비좌를 등에 지고도 꿈틀거리며 움직일 듯하다. 비좌에 꽂혀 있던 비석은 없어졌으나 탁본은 남았다. 영암사지적연국사지광탑비靈嚴寺址寂然國師慧光搭輝라는 탁본에는 한때 이 절의 주지이던 적연국사가 l014년에 83세로 영암사에 입적하였고 고려 현종 14년(1023)에 비를 세운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영암사라는 절이름도 확인하게 되었다. 황매산 영암사는 중국에도 있다.
초조 보리달마에서 육조 혜능으로 이어지는 선의 법맥에서, 오조 홍인이 태어난 곳이 황매현이다.
일찍이 일곱살 때, 길가에서 만난 사조도신이 성을 묻자 “성은 있으나 그 성이 공하기 때문에 내 성은 불성이다” 라고 대답했던 홍인. 홍인이 산 황매산 안에 영암사가 있다. 합천 황매산 영암사의 이름이 여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이곳이 선의 맥을 이은 참선도량이라고 보기도 한다.
지금 법당과 요사채로 쓰이는 건물 두 동은 1960년대, 인근의 고가를 주민들이 옮져다 지은 것이다. 삼층 석탑이 있는 뜰을 가운데 두고 두 동의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탑 옆 절마당에는 절터를 발굴하면서 찾아낸 주춧돌이며 다른 돌들을 모아놓았다. 그 돌 위에 벌집이 얹혀 있다. 네 개의 문으로 벌들이 부지런히 드나든다.
일벌의 생애는 사람의 시간으로 치면 6주에서 8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 눈으로 보면 짧은 벌의 한생애는 하루살이의 눈으로 보면 또 얼마나 하염없을 것인가.
그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이르렀는지 모를 문지기 벌 한미리가 문간에 붙어 서서 드나드는 벌을 분별한다. 그 앞, 법당으로 쓰이는 건물 벽에 ‘영암사 건립 정화공사 조감도’ 가 붙어 있다. 동향인 옛 절터 아래, 남향한 새 절의 조감도이다.
불사에 쓰일 기와가 그 아래 쌓여 있다.
그 법당 뒤편, 언제 적에 만든 건지 짐작하기 어렵게 오래된 수조에서 물을 떠마시고 나오며 사람들은 말한다. 물맛 좋다. 물은 서늘하고 달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돌고 돌아 이 수조에 담긴 물인지 모를 물을 마시고 나와, 얼마나 많은 땅을 밟아 여기에 왔는지, 억양으로 미루어 이 지역 사람이 아닌 듯한 보살을 만난다. 보살은 기와에 내려앉은 먼지를 장갑낀 손으로 닦아내고 있다. 사람들이 불사에 관심을 가져서 공덕을 이루었으면 하고 보살은 속마음을 비친다. 이름없이 절을 지키는 보살들.
그 보살에게 묻는다. 저 입구의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요? 어디 있는 나무 말인지….
보살의 눈이 잠시 허공을 쓰다듬는다. 절 바깥, 불사에 쓰일 나무를 다듬는 전기 톱소리가 정적을 가른다. 저기, 주차장 어귀에 있는 나무말인데요. 아주 오래된 나무같던데요. 보살은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고목나무라고 허는디… 조심스럽게 말하는 보살은 자신이 한 그루 나무처럼 보이는 것도 모르고 반복한다. 그냥 고목나무라고 허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