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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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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은 경구 - 영덕 1997년 09월 187호
달리는 차 안에서 한참을 잤나보다. 눈을 뜨니 대전이다. 이젠 정신을 차리고 대구행 차를 바꿔 타야한다. 잠은 그만 잠은 그만! 되뇌이면서도 다시 비몽사몽이다. 차에서 선잠을 깨고 난 뒤 밀려드는 허전함. 때맞추어 날마저 저물어 가면 길에선 노스탤지어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인생의 여울목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 온다. 저무는 들녘에 혼자 서서 갈 곳 잃은 막막함이라 할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싫어서 될 수 있는 한 앞자리에 앉아 가속을 즐기며 상념에 잠기거나 그것도 번거로우면 일념도 놓지 않고 일심 주력하는 것이 버릇이 된 터이다. 백중마지로 곤했던 모양인지 이런 저런 체면도 가리지 못하고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대전은 늘 지나가는 길목일 뿐이지만 무슨 반연에서인지 낯설지 않다. 차를 기다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과 그들의 작별을 지켜본다. 문득, 눈시울이 더워져 등을 돌린 채 호흡을 가다듬는다. 무엇 때문에? 서로 알지도 못하지만 지금 작별을 나누고 있는 저들과의 또 다른 별리가 두려운 건가? 대중 속의 고독! 그것 때문이었나.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도 수시로 찾아오는 것. 저렇듯 평범한 웃음 속에 어우려져 갑남을녀로 살아 버릴 걸.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는 걸까. 혼자 감당해야 할 생의 무게, 그것이 외로움으로 오는 걸까. 설사 둘이라도 어차피 혼자인 것. 그건 살아 있는 자 누구나 감당하고 있는 생의 지분이야.
지난날 벗들과 나누던 다정한 인사를 회상하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본래 중생이란 서러운 것. 일체중생과의 동체대비 그로써 한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이냐. 그 모든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지금, 이 순간 너는 누구냐? 칠십오 분의 일 초, 0.03초의 일 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나가는 철저한 중생. 그 중생을 뒤져 부처를 지으려는 자, 보현보살의 십대원을 실행하여 이 땅 위에서 불토를 보고 싶은 원력보살… 아직도 생각을 통해 생각을 이기는 법에 길들지 못하고 쉽게도 허물어져 버리는 나약한 감성, 죽어야 멎는 의식의 흐름, 그 엄청난 폭류. 불교적 가치관에 의거해 오늘을 살고 있고, 그것이 나라는 인간 존재의 구제를 위해 궁극적인 의미인 것을 자신할 수 있다. 예우 받지 못하는 스승의 자리일지라도 그 일의 숭고함을 포기할 순 없다. 알아주지 않음을 슬퍼하지 말고 스스로 서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자. 자 다시 시작하는 거야. 화엄의 세계마저도 환영이며 꿈일 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으니 마음이 여래를 지어낸다. 허망하기에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고 환영과 같은 여래의 세계일지라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청사진을 펴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짊어진 업이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일찍 세우는 일… 이러할 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선재 동자가 만난 최후외 선지식 보현이다.

선남자여, 만일 여래의 공덕문을 성취하고 싶다면 마땅히 십종의 광대한 원행을 닦아야 하느니라.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로 제불을 예경할 것, 둘째로 여래를 칭찬할 것, 셋째 널리 공양을 닦을 것, 넷째 업장을 참회할 것, 다섯째 공덕을 기꺼이 따를 것, 여섯째 법륜 굴리기를 청할 것, 일곱째 부처의 재세를 청할 것, 여덟째 늘 부처를 따라 배울 것, 아홉째 언제나 중생을 수순할 것, 열째 널리 모두 회향할 것.
보현행원품

이 열 가지 원 속에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그만두지 못하고 그 원과 행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다. 강한 자만이 선을 지켜낼 수 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