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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최세영 1997년 09월 187호
배들이 떠났다. 1938년,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들이 서강을 떠났다. 한강의 물길을 따라 서해로 천천히 움직여 나아갔다. 실로 오랫동안 발 묶여 었던 조운선들이었다. 이제 이 조운선들은 다시 돗대를 높이 올리고 한달 여정의 먼 길을 나선 것이다. 이 배들이 서강으로 올 때는 세곡을 싣고 장마가 시작되기 전 서둘러 올라왔다.
남해나 부산쯤에서는 일찍 길을 떠난 배들도 있었다. 이렇게 올라온 배들은 서강에 뱃머리를 맞대고 여름 장마의 긴긴 날들을 보내야 했다.
이 배들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배였는데 서해 연안지역의 특수한 지형을 고려해 만든 큰 배들이었다. 보통 조운선들이 세곡을 나를 때는 난파와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선단을 짜서 움직였다. 한강 물길을 이용하는 배는 쌀 이백 가마니를 실을 수 있는데, 스무척 정도의 선단을 이루었다. 연해안을 따라 곡식을 옮길 때는 배의 규모가 보통 때와는 달랐다. 이러한 배들은 곡식 일천 석을 충분히 실을 수 있는 큰 배들이었다. 일천 석의 쌀을 실을 수 있는 큰 배들이 줄지어 강을 나서서 서해로 가는 광경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이 배들은 여름 장마의 날들을 보내고 긴 기다림 끝에 고려대장경을 실었다. 이제 이 배들은 세곡을 싣고 올라왔던 예전의 조운선들이 아니었다. 이 배들은 이제 반야용선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롯하게 새겨진 고려대장경을 싣고 피안으로 항해해 가는 반야용선이었다. 고려인들의 혼신 다한 대결집으로 이루어 낸 고려대장경판을 싣고 사바세계에서 극락으로 가는 돛이 올려진 것이었다.
내년은 고려대장경 이운 육백 년이 되는 해이다. 육백 년 전, 고려대장경이 강화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은 없다. 다만 다행히도 고려대장경을 이운해 가던 1398년 그 해, 고려대장경이 해인사에 도착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록이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종 원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1399년 1월 19일 경진일이다.
“경상도 감사를 시켜 해인사에서 불경을 찍어내는 승려들에게 공양하게 하였다. 태상왕-조선 태조-이 자기 재산으로 대장경을 인쇄하고자 하여 동북면에 저축하여 두었던 콩과 조 오백마흔 섬을 단주와 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내게 하고, 해인사 부근의 여러 고을의 쌀과 콩을 그 수량만큼 바꾸게 했다r.”

이 기록은 고려대장경 이운의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려대장경이 지천사로 옮겨진 뒤 언제 해인사에 도착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주는 기록이다.
1398년 음력 5월, 장마가 든다. 고려대장경은 이 장마비를 지천시에서 피한다. 그 뒤로는 이쉽게도 고려대장경 이운에 대한 역사기록은 없다. 그런데 이 기록을 유추해보면 고려대장경이 1398년에 이미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1399년 정종 원년 1월,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재산을 내어 고려대장경을 인출하지 않았다면 고려대장경 이운의 기록은 역사의 미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대장경이 옮겨지던 1398년은 어떤 해였을까? 1398년, 지금으로부터 육백 년 전은 몹시 불행한 해였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한 조선의 백성들은 내일을 알 수 없는 먹장구름속에서 숨죽여 살며 그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 해,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가 피안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고려대장경은 합천 해인사에 도착했다.
왜 태조 이성계는 1399년 정종 원년 정월에 고려대장경을 인출하였을까? 고려대장경 인경은 흔히 봄, 가을에 한다. 그런데 정월 추운 겨울에 태조 이성계는 고려대장경을 인경하여 인출하고자 한다. 아마 몹시 추운 겨울 찬바람 속에서 해인사의 스님들은 먹을 갈았을 것이다. 고려대장경판 한 장 한 장에 들기름을 칠하고 삼삼오오 앉아서 인경 직업을 하였을 것이다. 왜 태조 이성계는 절박하게 고려대장경을 인출하지 않았으면 안되었을까.
그 해, 피눈물의 빗물이 히늘에서 내리고 피바람이 불었다. 그는 그 해에 일어난 이방원의 1차 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 속에서 그는 죽어간 정도전과 백성들 그리고 신하들을 위로하고 천도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정종 원년 1월 1일. 임금이 이씨 왕족들과 함께 하례 드리러 오는 것도 물리치고 그는 수륙제를 올린다. 태조 이성계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는 수륙제를 올리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손에 죽어간 고려인들을, 아니면 조선의 가여운 백성들을 생각했던 것일까? 한 나라를 접고 다시 한나라를 일으켰던 그는 과연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씻을 수 없는 참회와 용서의 마음으로 시작한 고려대장경 인경 불사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콩과 조를 무려 오백마흔섬이나 태조 이성계 자신의 재산으로 내었지만 그 콩과 조를 다시 해인사 부근의 여러 고을에 있는 쌀과 콩으로 바꾸고자 했다면 그 일 또한 손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인사 부근의 여러 고을”이 주는 의미는 뭘까? 그 해 겨울 오백마흔 섬이나 되는 곡식을 바꾸기 어려울 만큼 쌀과 곡식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l398년, 그해는 흉년이 들었던 해였다. 정종실록에 보면-정종 원년 1399년 한식날 2월 19일 경신일이다.
제룡에 제사를 지내며 임금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재궁을 수리하면서 임금이 말한다. “올해 농사가 흉년이 들었으니 이 역사를 멈추도록 하라” 임금이 백성을 생각하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태조 이성계는흉년이 든 그 다음해인 1399년에 고려대장경을 인출한다.
이 기록으로 우리는고려대장경 이운의 소중한 역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육백 년 전인 1398년은 불행한 해였다. 조선의 백성들이 얼마나 어렵게 그 해를 넘겨야 했던지를 알 수 있다. 자기 형제와 백성들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역사 속으로 몰았으며 새로 세운 한 나라의 이상과 꿈을 절망으로 그리고 장마와 흉년으로 백성들은 굶주림과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해를 넘겨야 했을 것이다.
그해, 1398년 고려대장경을 실은 배들이 떠났다.
가자, 가자, 저 피안의 언덕을 향하여.
그러나 과연 그 배들은 어디로 갔는가.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