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서너 살쯤, 농번기를 맞아 소에게 풀 먹이고 꼴을 베며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 때였다. 하루는 무심코소에게 줄 풀을 베다가 막 베어낸 풀에서 흰 액이 흘러나오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늘 하던 일이었지만 그날은 오래도록 논둑에 앉아 풀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풀도 살려고 하는 생명체인데 나는 왜 하필 이런 생명체를 죽여야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날부터 나는풀 베고 하는 농사일이 한없이 덧없게 느껴졌고, 농사일을 언젠가 그만두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것이 내가 출가를 하게 된 첫번째 동기가 아니었나 싶다.
좀더 시간이 흘러 마을에 한학을 깊이 공부한 분이 계셔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공부를 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으로 중국의 「자치통감」을 읽을 때였다. 이 세상에서 출세한다는 것이 결국은 남을 짓밟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한신의 이야기’ 를 읽으며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남을 밟고 올라서기에는 마음이 여리기도 했거니와 그러고 싶은 마음 또한 아예 없었고, 그렇다고 남에게 밟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세간의 이런 아귀다툼을 벗어나 버리는 길은 없을까하는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생명을 죽이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못했으니, ‘멸공’ 이니 ‘싸워 이기자’ 라는 슬로건이 도처에 널려 있던 육십 년대 초의 세간 살이는 내 소심한 성정으론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성정은 나이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승가대학 교수직도 그렇고 불전국역연구원장이라는 직함도 누가 뭐라고 하면 오늘이라도 사표를 내고 훌훌 자리를 버릴지언정, 누구와 싸워 쟁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열아홉이 되던 해에 나는 드디어 집을 나올 결심을 했다. 일단 집을 나가면 누군가 만날 수 있고 새로운길이 열리리라는 생각이었다. 글도 어지간히 익혔고, 헛돈 한 푼 안 쓰고 허풍치는 법 없이 워낙 두루 착실했던 터라 처음에는 반대하던 식구들도 갈길을 가겠다는 나를 끝까지 말리지 못했다. 동구밖에서 식구들의 전송을 받으며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도 사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할지 뚜렷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가 창녕읍에 가까워질 무렵 차창밖으로 내 출가사문의 길을 결정짓게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논둑 길이었다. 스님 한 분이 막 심어 논 모가 일제히 일어나 푸르름을 뱉어내고 있는 듯한 논둑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푸르름 가득한 논둑을 배경으로 바람에 휘날리는 장삼자락과 어깨에 울러맨 걸망 위로 넘치던 탱화, 나는 그때 아무런 의심도 걸림도 없이 결심했다. ‘승려가 되어야겠다’ 고. 사실 그 때까지 불교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교과서에서 배운 ‘극락세계를 발원하는 인도문명’ 이 전부였으니 그렇듯 빠르게 출가의 길을 결심한 것은 오랜 숙연 탓이었으리라.
창녕읍에서 치를 내려 찾아간 포교당의 주지 스님이 ‘좋은 절’ 이라고 소개한 곳이 언젠가 책에서 그 절의 소개글을 읽으며 마음에 담아둔 적이 있던 창녕 ‘관룡사’였다. 내 고향집과 그리 멀지 않은 관룡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이라고는 하나 스님이라고는 주지 스님 한 분과 공양주 보살 한 명 뿐인 단촐한 절이었다. 그 절 주지 스님은 내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는 ‘자기와 여기서 살면 큰스님 만들어 주겠다’고 하며 방을 하나 내주었다. 그렇게 행자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고 송광사 효봉스님을 시봉했다는 그 스님은 내게 하루에 한 수씩 한시漢詩를 가르쳤다. 유학儒學을 먼저 마치되, “네가 정서적으로 시적 감각이 부족하니 시부터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절집 일을 하며 틈틈이 「천수경」을 외우고 불공하는 것도 배우며 중물을 들이던 어느 날, 스님께서 다가오더니 진지하게 묻는 것이었다.
“그래, 정말 머리 깎고 승려가 될 생각인가?”
당신 밑에 있으면 큰스님 만들어 준다던 분께서 난데없이 그런 질문을 하니 무슨 영문인 줄 알 수 없었으나 이미 절에 았으면서 ‘참선해 도통하리라’ 발심하고 있던 나는 망설임 없이 “물론”이라고 대답했다.“승려가 되면 술담배를 끊어야 하고 가려 먹어야 할 음식이 많다. 일생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노라.” 는 내 대답 끝에 스님께서 또 물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젊었을땐 육체적인 욕망만 참으면 되나 나이들면 정신적인 반려자를 구하게 되는데, 과연 독신으로 살 수 있겠는가.”
수십 년 수행을 하신 분이 고작 이런 질문을 하다니 나는 그 스님께 실망하는 마음이 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런 약한 스님이 되지 말자고.’ 나이 쉰이 넘어 지금 생각하면 그분이 겪었던 갈등에서 나왔을 그러한 물음을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 때 열아홉이던 내가 그 스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관룡사에서 여덟 달을 지내고 계를 받지 않은 채 군대에 갔다가 제대를 하고 돌아오니 주지 스님이 다른 절로 가버렸다는 소식이었다. 나중에 수계를 받고 바람결에 그 스님이 있는 곳을 듣고 찾아가 보니 대처승 살림을 살고 있었다. 만난지 일 주일만에 당신 방의 열쇠를 맡기며 나를 신뢰해 주고 공부를 가르쳐 준 분이었으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관룡사 스님이 소식도 없이 절을 떠나는 바람에 부산에서 군 생활을 하며 몇 번 들른 적이 있던 대각사로 갔다.그곳에서 다시 행자생활을 하고 계를 받으리란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다만 주지 스님께 큰절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추천장을 하나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지 스님은 그곳 스님 말씀에 따르면 늘 ‘서울로 출타중’이었다.
절에 계신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나는 제갈공명을 찾아갔던 유비의 저 ‘삼고초려’ 를 생각하며 인욕행을 실천하고 있었다. 아랫사람이 ‘변명하지 말라’ 며 치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소개장 하나만 있으면 될 일인데 그 일이 참으로 어려웠다.
어쨋거나 나는 대각사에서 ‘하심’ 과 ‘인욕’ 을 철저히 익혔다. 부산에선 가장 큰 절이었던 그무렵 대각사에 여남은 스님이 있었는데, 군대 갔다가 다시 행자생활을 하는 나이 스물다섯인 나보다 거개가 나이가 어렸다. 일복이 많았는지 행자가 나 하나뿐이어서 모두 일만 생기면 나를 불러 시키곤 했다. 군말 없이 도량 청소며 화장실 청소까지 혼자 했다. 여름 날 수박 껍질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연탄재가 뒤범벅이 되어 청소차에 쓰레기 상자를 올려줄 때면 얼굴이며 어깨로 흘러내리던 쓰레기물로 곤욕을 치렀던 일이 새삼스럽다.
‘참을 때까지 참아보자’ 며 소개장 써주기를 기다리고 지낸지 넉 달이 지날 무렵, 느닷없이 ‘수계를 받으라’고 했다. 소개장 하나 받으러 갔다가 주지스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대각사 주지 스님을 은사로 월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행자생활을 끝낸 것이다. 수계식이 있던 날은 은사가 된 경우鏡牛스님과 비로소 대면했다. 스님은 내게 ‘혜남慧南’ 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혜능蕙能’이 남쪽에서 활동했다 는 뜻으로 육조 혜능스님에 대한 향수가 깊었던 은사스님의 속내가 드러난 이름이다. 세간에서의 평가야어쨌든 내 은사 스님은 ‘선禪’ 에 대한 향수가 깊은 분이었다. 혜능스님이 오조 흥인스님을 만나러 갔으나 여덟 달을 문앞에도 가지 못했던 저 선사들의 일을 은사스님이 내게도 그대로 ‘연출’ 했다는 것을 수계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수계를 그렇게 받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무릇 도를 닦으려면 ‘곧고 솔직’ 해야하며 순진’ 해야 하는데, 거기에 나 자신은 얼마나 근접한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나는 행자시절 늘 염송했던 「천수경」의 게송 한구절로 예나 지금이나 내 수행의 중심을 삼고 있다. 초발심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원願은 이렇다.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賣意 여래의 진실한 뜻 알고자 하나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