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해보면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을 성싶다. 본분사를 위한 수행만 어지간히 해가고 있다면.
자경문自警文을보니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 일적一適 야난소也難消’ 이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예전에도배웠고 근래 통 행자실行者室 강의를 하며 여러 차례 보았을 터인데도 이제야 크게 보이는 것이 새삼스럽다.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데에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더니 그래서 눈에 들어와진 것인가. 대충 해석해 보면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의 물도-시은施恩으로 입은 것-소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라는 내용이리라.
여기서 무엇을 시비하기 위하여 어려이 얻은 지면을 까맣게 메꿔가는 것은 아니다.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기 어려우리라고 야운野雲스님은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요즘 스님네는 다 마음을 밝혔기에 시주물을 그토록 흥청망청 쓰고 있는 것일까. 특별한 일도 하지 않는 스님네가 오히려 사업하는 세속인보다도 호사스런 승용차에, 웬간하면 휴대용 전화까지 하나씩 추켜들고 다니는 세상이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기 어렵다는데 그 큰 자동차는 어찌 소화시켜 낼런지 걱정스럽다. 근데, 더 웃기는 것은 그건 무슨 논리인지, 그런 사람을 능력있다고 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제법 과시하며 당연하게 다니는지도 모른다. 그네들이 정말도 닦으러 오기나 한 것인지 의문스럽다는 게, 한순간만 찬찬히 부처님의 경전 한 구절만 들여다 보았더라도 그처럼 위의 없는 짓들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 다니는 짓이 계율戒律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해는가 몰라도 보편적 정서라는 게 있다. 무엇은 하라 하지 말라 명시돼 있지는 않았어도, 승려로서 위의威燒를 어그러뜨려 보편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면, 그것은 엄연히 파위의破威構이다. 파위의破威構는 넓게 보지 않아도 파계이다.
전번 언제 종단의 개혁불사란 걸 이뤄낸 후, 각기 직위에 맞게 자동차도 규제하고 도박승과 은처승까지도 색출하여 엄하게 다스려 승풍僧風을 진작시킬 것처럼 하였다. 그 때가 언젠데 아직껏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릿발 같은 승가적 가풍家風이 세워지지 않은 까닭이다. 더 쉽게 말하면, 우리 승가의 구조가 중노릇 십여 년만해도 이리저리 걸려 안면 모르는 스님네가 별로 없다. 이러니 생각해 보라. 어지간한 제도적 장치로 규제가 되겠는가. 더구나 수행 집단에 수행의 풍토보다 정치적 술수가 난무하니 더욱 그러하다. 이번에는 너를 눈감아 주었고 다음에는 나도 한번 봐주라, 종단의 모모한 힘 있는 인사와 줄이 닿아 있으니 어렵고. 또 대개가 사는 게 그렇고 그렇다보니 누가 감히 누구를 어쩔 수 있겠느냐는, 이런 식이기 때문에 더 이상 진도가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왜 이런 풍토는 조성되었으며, 어찌하다 도박승에 은처승까지 양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아무리 다기능화된 시대라지만 이것까진 좀 심하다. 물론 이리 된 원인은 많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만 짚어 본다면, 첫번째 문제는, 종단의 모든 문제마다 따라다니는 제대로 된 교육부재의 문제이다. 사미계만받아도 거의 자율에 가깝도록 통제되지 않는 삶의 풍토가, 말들은 인재양성이니 교육이 어떻고 떠들면서도, 제대로 만들어 제때에 쓰려고 하지않고 그냥 쉽게만 가려고 했었다. 그래서 계율에 대해서도 언제 교육 한번 반듯하게 시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의무교육제도가 만들어졌으면 물리력을 행사해서라도 교육을 받게 해야 했었다. 이행이 안 되면 교육을 받은자와 받지 않은자 간의 분명한 차별이 있어야 됨에도, 그것도 없었다. 이 집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잘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걸고 수행을 하는 반면, 그런식으로 소양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로도 얼마든지 살게 되어 있는 구조의 모순은 그냥 그대로 살아도 되는 갑다하며 무식한 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다. 이런 이들일수록 갖은 멋은 다 부리며 살고 있어서 제대로된 교육이 더욱 홀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무식이 용기라고 중노릇은 혼자 다 이리저리 맞추며 잘난 것 같아 이런 이들에게 교육은 애초부터 군더더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두번째는 역사 의식 결여 때문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주지 전횡의 문제를 가장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사는 살림살이의 승가가 주지 독점으로 인해 감시의 기능인 대중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눈을 의식하지 않기에 맘대로 횡포를 부리고 자신의 생활도 방자하고 무소불위하게 되어 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풍토는 또 다른 대중에겐 소외와 피해 의식을 가져오기에 충분하였다. 그들 또한 그런 걸 보면서도 제대로 된 수행은 뒷전이고, 홧김에 뭐한다고 한자리 차지하기 위한 기회만 노리고 여기저기 줄서기에 바빠진다. 그러다 그런 자리라도 용케 차지하여 돈을 세기 사작하면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떠들썩하니 비판하던 입은 굳게 닫혀지고 앞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 때부터 슬슬 제살 갉아먹는 짓도 하기 시작하고 그런다.
한편, 구제할 수 없을 만큼 변한 이들도 처음에는 놀이를 순수하게 취미로 시작한다. 하지만 여유도는 시간과 돈은 더 좀 재미있는 것이 없을까하며 찾아다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고액의 도박도 하게 되고, 심해지면 어딘가에 내연의 여인도 감춰두고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몰래 들락거리는 것이 순서라고 보면 옳을 것이다.
도박은 세속에서도 망국병으로 지탄하고 있는 터에 중이 그런 짓을 한다면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은처승도 그렇다. 이런 용어가 절집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가당찮은데, 중 같지도 않게 살 바에는 차리리 밤에 나가 트럭 운전을 해서라도 처를 두던 자식을 두던지하면 그걸 누가 말릴까. 그나마 조금 양심 있어 보일 수도 있고, 자신도 떳떳하고.
그들이 도박하고 은처하는 데 드는 돈은 무슨 돈인가. 집을 나설 때 가져오지 않았다면, 시주돈이다. 시주돈은 그리 만만케 여길 돈이 아니다. 그런 이들일수록 상좌나 도반이 어려워 도움을 청하면 바늘도 안들어갈만큼 인색하게 군다. 눈을 흘리고 윽박지르도 할 것이다. 거지 근성이라며.
헌데, 그들의 남아 돈다는 시간과 돈, 그것 말이다. 피나게 수행을 해 본 적도 없지만, 큰절에 살면서 세 때 예불하고 공양만 안 빠지고 하려 해도 그리 여유도는 시간이 없다. 그런데 어디서 시간이 지천으로 나서 무료하고 지루해서 못견뎌 할까. 그들은 수행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는 사람들이겠지. 아니면 사판은 적당히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졌거나. 그러나 어림없는 말씀, 오히려 사편쪽이 더 잘 살아야하고 계율도 청정히 지켜야 한다. 신도들과 가장 가까이서 접하며 살기 때문에 말이다.
수행에 한눈을 팔지 않으면 다른 건 저절로 함께 된다. 계械, 정定, 해慧 삼학三學은 한줄기로 이어져 다른 가지를 치고 선 것이 이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 잘하는 수행지에게 계戒는 좋은 사다리가 되고 보호하는 장치가 되어 주지만, 수행 안 하는 도박승, 은처승 들에게 계戒는 여름에 겨울 옷을 걸친 것처럼 덥고 성가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 종단은 영 글러버린 것인가. 그건 아니다. 정치와 술수, 줄서기 때문에 규제가 안 먹힐 뿐. 좀 생각을 멈추어 보자. 너무 떠 있다. 여기쯤서 필요한 건 수행자들의 자각自생활 된 마음이다. 그리하여 다 출가시의 생각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히는 것이다. 누구야 어떻든 나만이라도 잘살아 버리면 될 것 아닌가. 그런 마음으로 풍토를 바꾸어 기면 도박승, 은처승 등 새롭게 양산된 무리들은 저절로 발 디딜 곳이 없어진다. 어려운 일일까. 마음먹기 나름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