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해 지고 달 뜬다.
나무에 봄물 오른 게 엊그제 같은데, 저녁 볕이 어루만지는 미륵산은 벌써 탈색의 기미로 까슬까슬한 기운이 감돈다. 산 아래 절터 서편, 야트막한 숲으로 해가 떨어지려 한다.
이글거리던 제 빛을 안으로 갈무리한 해가 빛을 녹이며 제 몸을 낮춘다. 예각으로 비치는 햇살이 절터를 밝힌다. 그 빛살이 닿는 동편 숲 위쪽, 달이 조용히 떠오른다. 채 스러지지 않은 빛이 누리에 어스름을 펼치는 저녁, 달은 거기에 제 빛을 더하는 걸 삼간 채 가만히 떠 있다.
제아무리 하늘에 떠 있다고 해도 지금은 아직 해의 시간이라는 걸 저 달은 안다.
말법세상, 석가의 시간이 지나고 미륵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때 가득 차올랐던 미륵사터. 그 마음 안고 살던 이들 자취 없는 지금 빈터의 저녁은 오히려 환하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호남평야 너른 벌을 차로 달려서 홀로 솟은 미륵산 이래 미륵사지 어귀에 내려면 잠깐 어리둥절해진다.
아스팔트 도로에 잇닿은, 보도블록으로 덮인 널찍한 빈터와 그 빈터에서 공놀이하는 청년들이 뿜어내는 활기. 엿새 동안의 노역에서 풀려나 주말의 한가로움을 즐기는 가족들. 그 도란거림을 들으며 유모차에서 호기심으로 고개 뽑는 아이. 길 건너편에 즐비한 음식점에 북적이는 사람들. 낮은 담장 너머 저편에 있는 유물전시관의 날렵한 모습. ‘축축하고 더러운 석가’의 시간, 은성한 한 저녁. 저녁 볕에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석탑이며 그 석탑의 번쩍이는 상륜부까지도 옛날과 무관한 지금에 속해 있다.
미륵사지의 옛 모습은 정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유물전시관을 지나야 자취를 보인다. 지난 5월에 문을 연 유물전시관은 폐사지에는 최초로 선 유물전시관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그 북동쪽 모서리에서 흙을 덮은 보도 블록은 끝나고, 그 지점에서 흙과 잡풀, 풀벌레들이 어우러진 길이 열린다. 그 길을 눈으로 쫓기 전에 옛 시간의 흔적이 턱하니 가슴을 친다.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이다.
석탑은 그러나 탑이 아니다. 동쪽면과 북쪽면 모서리만 겨우 남았을 뿐, 옛시간으로 들어서는 어귀에서 바라본 탑은 피라미드형으로 처바른 묵중한 시멘트 덩어리이다. 일제시대, 무너지는 탑을 보수하느라고 한 게 오히려 탑에게 수모를 안긴 것이다.
탑은, 허물어져 내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면서, 사랑하는 이에게 누추하기 짝이 없는 살림의 켯속을 남김없이 드러낸 뒤의 허탈한 의연함마저 보이면서, 그렇게 서 있다. 제게 퍼부어지는 시선에 어린 놀람이며 연민이며 노여움을 탑은 말없이 다독인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말법세상에서 이쯤은 대수롭지 않노라고. 그래도 어찌되었든 천 년도 넘는 세월의 회오리를 견뎌내어 이렇듯 만나고 있지않느냐고. 그러면 되었다고 다독이는 탑은 영락없는 백제의 탑이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 때 창건된 절이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서울 남쪽 못가-지금의 익산 오금산 미룡지-에서 과부인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마를 캐어 팔아서 서동아라 불리었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아이들을 꾀어 노래를 퍼뜨림으로써 마침내 선화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뒷날 왕위에 오른 뒤, 용화산(미륵산) 사자사에 가려고 부인과 길을 가다가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에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여기에 큰 절을 지어달라는 소원을 말하자 이를 허락하고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도를 물으니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만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법당)과 탑과 낭무(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도왔다. 삼국유사 제 2권 무왕에 관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륵사의 유래다.
1980년부터 미륵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자, 3원 1가람 곧 세 개의 절이 모여 하나의 절을 이룬 기람 배치가「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게 밝혀졌다.
중앙에 중문이 있고 중문 안에는 탑이, 탑뒤에는 석등과 금당이 있고 회랑이 이를 둘러싼다. 중문 좌우편의 회랑은 동서로 연장되는데, 동쪽과 서쪽 양편에도 중문-탑-석등-금당-승방의 순으로 배열되었다. 이렇게 독립된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는 미륵이 하생하여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삼설에 따라, 초회, 2회, 3회 각 설법의 장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금당은 세 곳 모두 높이가 구십 센티미터에 이르는 주춧돌이 남아 있다. 이는 경주 감은사의 금당과 같이 지하에 공간을 두기 위한 것이다. 용으로 변한 미륵이 와서 머무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신앙적인 해석에 못을 메우고 닦은 터라서 통풍을 염려해서 공간을 두었다는 건축학적인 해석이 덧붙는다. 잔디를 입혀 돋은 금당 기단 위로 끝부분만 보이는 주춧돌은 후세 사람들의 해석이 어떠하든 입상처럼 우뚝우뚝 서 있을 뿐이다. 정면 측면의 칸수는 모두 같으나 동서 양 금당에 비해 중금당이 조금 크다. 금당 앞에는 각각 석등의 좌대가 남아 있다. 목탑지 앞에 연화좌대만 남은 석등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가장 오래 된 석등이다. 그 석등의 불빛이 닿는 거기, 탑이 서 있었다. 중앙의 탑은 목탑, 동서 양편은 석탑이있는데 목탑과 동탑은 흔적없이 사라졌고 동쪽면과 북쪽면의 일부만 남은 서탑이 있을 뿐이다.
목조 건축 기술이 발달했던 백제, 미륵사지 서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배흘림기둥이며 돌을 나무토막처럼 조각조각 짜서 끼워맞춘 단아한 아름다움. 탑의 1층 탑신 가운데엔 문이 뚫려 있다.
원래 9층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지금은 6층까지만 남았다. 탑이 안쪽으로 허물어지는 바람에 맨 위의 옥개석은 오히려 하늘로 치들려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다. 먼길을 떠나기 위해 막 비상하려는 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탑의 세 귀퉁이에는 원숭이라고도 하고 석인상이라고도 하는 너부데데하고 아담한 돌덩어리가 놓여 있다.
장승의 원형이 되는 이 석인상은 원래 넷이었으나 하나는 없어졌다. 무너지고 덧발리고 잃어버림을 고스란히 겪은 서탑의 무너진 조각돌들을 늘어놓은 발치, 역시 그 돌로 발치를 감싼 한 그루 팽나무가 서 있다.
키도 너비도 탑과 크기가 비슷한 나무. 나무는 제 육신의 괴사를 속수무책 감내하는 탑에게 의지가 되어주겠다는 의지로 가지를 벋고 잎을 피워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은 우산을 씌워주는 일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일”이라던 말을 떠올리게끔 나란한 나무와 탑.
그렇듯 유정한 서탑에서 눈돌리면 무정하기 짝이 없는 동탑이 희게 반들거린다.
l993년에 복원해 놓은 9층 석탑이다.
서탑이 원력을 세우고 돌을 하나하나 고르고 짜맞춰 생명을 부여한 탑이라면, 동탑은 아이들이 갖고 노는 레고 놀이처럼 기성품인 돌조각을 틀에 끼워맞춘 탑처럼 보인다. 절터에서 동떨어진 저 이물감을 세월이 어루만지면 온화해질 것인가.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탇의 이물감은 냉랭하다.
상륜부와 옥개석에 매단 풍경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온기를 부여하진 못한다. 그나마, 동쪽면에 군데군데 끼워넣은 옛 탑조각돌 몇 점을 보자 비로소 딱딱했던 마음이 조금 풀린다. 그 빛 바랜 돌은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쪼아 다듬은 돌이다.
돌을 다듬는 동안, 오래 반복되는 단순 노동을 하던 석공의 혼잣말이며 석공의 마음속에 스쳐간 회노애락이 손끝을 통해 돌에게 전해졌으리라. 그리하여 돌은 석공의 마음을 받아 안고 석공을 닮아갔을 것이다. 물을 뿌려가며 기계로 다듬은 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들. 뒤섞여 있으면서도 어찌해 볼 길 없는 이질감으로 피차 외로운 돌들.
지명 법사는 무슨 까닭으로 신통력을 부려 하룻만에 못을 메운 것일까. 그만큼 불사가 다급해서 였을까. 아니면 이적을 보임으로써 신심을 돋우려 한 것일까. 그 법력에 비온 뒤 죽순처럼 치솟았을 경외감 못지않게, 산에서 흙을 퍼내는 마음, 흙을 퍼내느라 뽑혀나가는 나무며 풀을 바라보는 과정, 그렇게 퍼낸 흙을 커다란 해 부어서 차근차근 메워 나가는 과정도 중요하지 않았을까.
이루어가는 과정에 들어는 공력이며 깨달음을 굳이 생략해버린 그 뜻은 무엇일까.
못을 메워 닦은 터답게 움푹 패인 곳마다 습기가 배어나는 터에 서서, 흙을 퍼내고 고깔 모양으로 남은미륵사를 올려다보니 이내에 감싸인 산은 제 몸을 그리 쉬 허물어버린 연유를 말하지 않는다.
신라와의 전쟁으로 왕권을 강화한 무왕이 익산지역으로 천도할 뜻을 품고 세운 미륵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더 확장되었다. 절 어귀에 구십 미터의 간격을 두고 두기의 당간지주(보물 236호)가 세워지고회랑이 그 주변을 둘러쌌다.
그 바깥에는 동서 양편으로 연못이 조성되었다.
그밖에 주변에 도요지 등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에 나온 유물 가운데 청자도자기 조각이 많았던 걸로 미루어 절은 고려시대까지 유지되다가 조선초에 폐사가 된 걸로 추측하고 있다.
기단이며 주춧돌이 남은 건물터에는 잔디가 곱다랗게 입혀져 있다. 도도록하게 돋운 땅을 덮은 잔디가 건물터를 무덤처럼 보이게 한다. 아이들은 그 위에 엎드려 턱을 고이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아이들의 배가 서늘하게 감지하는 잔디 아래, 정지된 시간이 고여 있다.
공기를 밀어대는 바람의 기운이 거세진다.
해 진 서쪽 하늘에 개밥바라기 뜨고, 제 시간을 맞은 달빛은 점점 환해진다. 칠월 보름, 우란분재 날의 달이 미륵사지를 비춘다.
스님들이 한철 수행을 마치는 날, 하늘 문이 열리고 영혼이 그 열린 문으로 드나드는 날. 오래 전 탑돌이 하던 사람들 간데없는 미륵사지의 하늘은 둥글고 달빛은 고요히 세상을 보듬는다. 미륵사지, 달지고해 뜬다.
해지던 바로 그 자리로 달이 넘어가고, 달 뜨던 그 숲 위로 다시 해가 뜬다. 누리가 환해진다.
전날 밤, 오가는 영혼의 나부낌으로 바람이 수선스럽더니 이제 대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풀잎 위 이슬이 오롯하니 맑다. 입김으로 호 불면, 이슬 방울은 도르르 굴러가 하나가 된다. 밤이면 다시 이슬로 내릴 그 물방울을 낮동안 하늘로 올려보내려 미륵사지에 해 뜬다.
길 건너, 사람의 마을에서 스피커 소리가 햇발처럼 번진다. 알립니다, 어제 마을에서 결정한 단합대회에….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