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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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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여연 1986년 09월 55호
태풍 “베라”가 할퀴고간 산사의 뜰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숲들은 더 깊은 침묵으로 가라앉고 진한 상채기를 이루는 자연의 질서가 순연한 빛으로 여미어 온다. 웬 종일 낮은 통곡처럼 흐느끼는 듯한 안개비가 꺾여지고 부셔진 상혼(傷痕)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작은새 떼들이 자꾸만 나를 산문 밖으로 내몰고 있다.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산도 아니고 구름도 아닌 나의 속가슴, 해바라기 꽃씨처럼 터지는 그 가슴속에 또 하나 다른 아픔이 일고 있다.
산문밖에 홀로 늙은 장정처럼 서있던 소나무 하나가 머리를 뎅강 잃어버렸다. 그 강한 바람이 추사의 “세한도”에 나오는 나무와 같이 고통의 세월을 잘도 이겨내던 그 노송의 숨결을 짓밟아버렸다.
산문의 일에 지쳐서 허덕이고 식상할 때, 침묵하고 있는 그 소나무의 휘어진 허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참 많은 위안을 받는다. 이렇게 힘겹게 가는 세월 몇 배 보다, 저 놈의 소나무는 더 큰 아픔을 안으로 삭여가면서 몇 백년 한없은 이 강토를 지켜 왔으니 말이다. 한숨보다 더 짧은 이승의 삶을 보다 줄기차게 살아야 한다는 삶에의 투철한 용기를 주는 것
이다. 꺾어져 무겁게 죽음을 뿌리고 있는 그 가지 곁에 서면 장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날 나그네가 하룻밤 여숙을 하였는데 그 주인 집에서 객을 대접한다고 떼거위를 잡고 있었다. 떼거위를 잡고 있는 개울가에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문득 나그네는 소나무와 떼거위를 생각하니 참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위 쪽을 생각하면 못우는 놈(못난 놈)이 먼저 잡혀 죽고 소나무 쪽을 생각하면 잘난 놈이
(곧게 자란 놈) 먼저 죽는것이 아닌가 대가집의 거센 집터를 누르려면 시끄럽게 울어대는 거위가 필요한 것이지 못우는 거위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위는 못우는 놈이 먼저 죽고 소나무는 바르게 자라 잘 생긴 소나무가 먼저 잘려서 재목으로 사용되고 못생기고 굽은 나무는 재목으로 필요가 없어 남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이와 같이 어느 것이 하나만 팍 옳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나”만이 옳다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아가서 세상 살아가는 갖가지 일들 속에서 안되는 일이 전혀 없이 “하면된다”는 논리가 어찌 쉽게 먹혀들어 간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저리 못나서 오래 남아있는 소나무 조차도 꺾어져 죽는데 거
역할 수 없는 나아가서 인간과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 자연을 정복한다는 서구의 기계문명이 이 강토의 곳곳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고 있는가 물론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모르겠는가.
그것은 우리의 노력의 의지를 확대해 보려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마치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아주 위험한 사고의 극단을 가고 있다. “하면 된다”는 것이 어찌 사물의 전체, 삶의 전체 양식에서 성립되는 논리로 규정되고 있는 것일까. 자연의 저 엄청난힘, 바람의 물결을 어찌 막을 수 있으며 우리의 사랑을 어찌 기술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인간의 심정은 날로 기계화되고 우리들의 사랑, 그리춤까지도 도그마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인간의 생활전반, 생의 저 끝없는 노정속에서 결과만이 전체일 수 있을까. 과정,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깊이있게 하는지를 왜 모르는 것일까. 하다못해 바닷가 모래성을 쌓는 작은 게 한 마리의 일조차도 수많은 모래알을 일구면서 수 없는 장애물을 이겨내며 하나의 작은 성채를 이루는데, 하물며 인간의 거대한 삶의 터전이 결과적이고 현시적인 그 자리만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가 진정 풍요롭고 건전한 사회일런지?
땀흘려 성실하게 살고 있는 저 일상의 노정(路程), 그 현장의 일터의 노동자들의 삶의 중심에 힘찬 박수를 치자.
바람에 꽃잎이 흔들리고 있다. 그 싱싱한 가을의 물결, 그 환(幻)같은 물결위로 새로 태어나 성실한 땅을 누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