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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재산 관리법은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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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편집실 1986년 09월 55호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1962년 5월31일 전 3장 19조 부칙으로 된 불교재산관리법(이하 불재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이후 4반세기가 지나면서 헌법개정만도 수차례나 되었지만 불재법은 개폐되지 않은 채 불교 위에 계속 군림해 왔다.
1600여년 동안 민족사를 창도하면서 면면히 이어 오고 있는 민족의 종교를 뿌리부터 억제하는 불재법은 그 심각한 위헌성, 반민주성 반불교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서 본격적으로 문제화되고 토론된 적은 없었다. 물론 불교 자체내에서는 70년부터 불재법이 갖고 있는 모순점이 갖가지 측면에서 제기되어 왔고 80년 이후에는 80년, 81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정시안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개폐운동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하면서 오히려 83년도에는 ‘관계당국의 자료제출 명령권 및 검사권’ 신설과 벌칙을 대폭 강화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불재법 개악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물론 불재법이 제정 당시에는 비구 대처분쟁으로 숱한 불교자산이 유실되고 경내지 내에서의 각종 위락사업 등으로 인해 사찰환경이 크게 황폐화되고 있던 때라, 불교계의 비상한 관심과 환영속에서 오히려 불재법은 불교보호법률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는 불교자체내의 분규에 정치권력을 앞장 세움으로 해서 종교 자유의 원칙을 스스로, 그것도 아주 부정적인 모습으로 파기한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불교정화운동이 왜색의 축출이라는 명분에서 시작하였으나, 결국 그 와중에서 왜법 사찰령을 계승하는 불재법의 탄생을 보았으니 그 모순이 극심하다 아니할 수 없다.
불교계의 봉건적 의식과 근대적 법률에 대한 인식부족이 불재법의 탄생을 방조한 샘이 되었고, 역대 정권의 불교에 대한 비민주적인 태도와 편의주의가 근대적인 법을 도용하여 자본주의 사회 속에 봉건주의의 한 섬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 공원법등 불교를 억제하는 제법령이 마구잡이로 확산 제정되면서 불교계내의 자각도 이루어졌고, 1970년도 부터는 불재법등 불교관계법령에 대한 개폐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제 불교의 현대화와 민족종교로서의 정확한 위상정립을 위한 모든 시도에서 불재법은-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질곡이 되고 있음을 드디어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정화분규가 종식되어 불교계의 자치능력과 재산관리 능력이 확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재법이 더 이상 제정 당시의 명분을 지속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현재 한국불교를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는 불재법은 그 뿌리를 일제의 사찰령에 두고 있지만, 구한말에 벌써 불교 규제법의 한 형태가 보여지고 있다. 이른바 1902년에 만들어진 36개조의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이 그것인데, 이 사사관리세칙은 승려의 입성금지 폐지를 약속하는 대신에 관리에 의해 불교를 통제하여, 당시 추악한 매국정권에 관여치 못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세칙은 정치적 혼란과 관리들의 부패로 별 효과 없이 1904년 폐지되고 말았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전형적인 서구 제국주의와는 달리 제국주의 문화침투의 일환으로써 불교를 적극 이용하였다. 일본은 당시 동양의 떠오르는 별로 부각되면서, 서구제국주의의 추종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강구하던 때라, 서구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문화침투의 일환인 기독교에 대신하여 일본불교를 이용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 결과 일본은 이미 1500여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토착화 민족화된 한국불교에 왜색불교를 침투시켜 한국불교 전반에 걸쳐 탈민족에 의한 일본불교에의 동화를 획책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친일승려의 반민족적인 타락과 부패가 대규모로 발생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침투와 억압은 당시 민중들이 보여준 열화와 같은 항일투쟁에 비해 불교의 상대적인 무력함에서도 기원한다. 당시 가장 광범위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였던 불교를 더욱 무력화, 왜색화시킴으로 해서 한국인을 ‘순량한 인민으로 화성(化成)’하는데 적극 이용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제는 처음에는 아예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통합 예속시키려 하였으나 한용운 박한영 등이 벌린 임제종 운동 등 한국불교내의 강력한 반발로 그뜻이 성사되지 못하자 한국불교를 법률적으로 통제하려고 사찰령을 제정하였다.
1911년 6월에 제정된 사찰령 7개조에 이어 7월에 제정된 8개조의 사찰령 시행규칙은 완전히 식민지 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써 그 법률로 인해 한국불교의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이 크게 제약을 받고, 이어 왜색이 한국불교에 범람케 되었다. 사찰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조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하는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 장소와 명칭을 변경하고자 하는 때도 역시 같다.
제2조 : 사찰의 기지(基址)와 가람은 지방장관의 허가없이 전법, 포교, 법요집행 내지 승니 거주목적 이외에 사용하게 하지 못한다.
제3조 : 사찰의 본말사 관계, 승규, 법식 기타의 필요한 사법은 각 본사에서 제정하여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4조 : 사찰에는 주지를 두며 주지는 그 사찰에 속하는 일체의 재산을 관리하여 사무와 법요 집행의 책임을 지며 사찰을 대표한다.
제5조 :사찰에 속하는 토지, 삼림, 건물, 불상, 석불, 논문서, 고서화 및 기타의 귀중품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지 않고 처분하지 못한다.
(제6조, 7조 생략)
〈사찰령 시행규칙〉
제2조 : 본산 주지는 총독, 말사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 주지가 범죄 기타 부정한 행위가 있을 때나 직무를 태만히 할 때는 그 직위의 인가를 취소할 수 있다.
사찰령의 세부적인 내용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법률은 불교를 식민지 정권이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편의주의적이고 반민족적인 식민지 통치제도의 하나인 것이다. 더구나 사찰령은 사찰의 모든 관할 업무를 주지에게 집중시키고(4조), 그러한 주지의 임명을 총독부나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시행규칙2조). 더구나 주지의 처벌사항 또한 관청에서 하게 되어(시행규칙 5조), 소위 〈주지전횡시대〉를 작출하였다. 주지는 친일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도록 법률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를 그 동안 민주적으로 이끌어 온 〈산중공의제도(山中公議制度)〉는 거의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편 사찰령 제3조와 시행규칙 제2조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30개 본사는 스스로 독립된 종파처럼 말사를 거느리는 본말사제도가 형성되어, 한국불교는 극도의 분열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종교적 이유가 아닌 행정적 편의를 위한 이러한 분열 현상은 한국불교 자체내의 중앙집권식의 통일성을 저해하고 각 본사위에 총독부가 직접 군림하는 극히 관료주의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편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제는 한국불교를 무력화시키고 손쉽게 왜색화시키려는 기본 정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또한 일제는 1916년 8월에 \"포교규칙” 법령을 반포하여 포교전반에 관한 사항을 통제하면서 포교 책임자를 총독부가 직접 심판할 수 있게 함으로써 불교 탄압을 더욱 가중시켜 나갔다.
1929년에 일제는 사찰령을 개정하면서 대처승도 주지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위한 법률적 장치를 거의 완성하였다. 이에 대처를 한 왜색승들은 교종이라 자처하면서 사찰 운영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려 치부와 축첩속에서 한국불교의 얼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암흑의 시기에도 여전히 청정비구를 고집하는 승려들은 곳곳에서 천대를 받으면서도 완강히 한국불교의 왜색화에 저항하였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사찰령은 결국 한국불교의 왜색화라는 단순 명쾌한 목적을 수행키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으며, 한국불교의 독자적인 발전과는 근본적으로 상치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찰령으로 인해 한국불교에 부식된 왜색과 비민주성은 해방 이후에 탈왜색을 위한 불교 정화운동을 분쟁으로 치환시키며 극도의 혼란을 몰고와 결국 불재법의 제정을 가져온 주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사찰령의 주요 부문은 그대로 불재법에서 되살아나게 되었다. 사찰령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그 법률로
서의 효력을 잃지 않고 불교 위에 군림하다가 1962년 불재법의 탄생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사찰령의 기본적인 독소조항이 불재법에서 재생되고 있음은 한국불교의 비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원칙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사찰령 등 모든 일제의 잔재는 해방과 더불어 전민족의 이름으로 준열히 심판받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승만 정권의 비호하에 오히려 모든 친일적이고 반민족적인 잔재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 심화, 확대해나가 독립의 의미를 크게 변질시켰다. 왜색승도 마찬가지로 전혀 심판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친일모리배들로 구성된 이 승만 정권이 친일승 숙청을 목적으로 불교 정화운동에 깊숙히 개입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 이정권의 비구 대처분규에의 개입의 직접적인 목적과 동기는 그 숨은 저의를 의심치 않을 수」없고, 오히려 불교내 분규는 날이 갈수록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더구나 이 정권하에서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분규양태가 전혀 해결되지 못하고 1960년을 넘긴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정권의 분규의 조장과 개업은 정화의 완성이 아니라 분규의 만성화를 꾀해 불교의 전체적인 무력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승만 정권은 왜 불교 분규를 조장하여 민족종교를 무력화시켜 나갔을까? 최근에 불교계내의 자각된 인식에 의하면 정화운동을 조장한 근본적
인 목적은 민족세력으로 결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불교를 무력화시키고 강력한 종교집단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독재정권에 대한 이익의 추구에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분규가 지속되는 가운데 4·l9가 지나고 5·16이 발생하였다. 민주화의 열기를 대신해 군대식의 신속성과 동원력을 이용해 정권을 잡은 박 정회 정권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기본 이데올로기로 제시하였으나 민족종교인 불교를 억제하는 불재법을 만들어 그들 이념의 허구성을 스스로 폭로시켰다. 불재법 제정은 박정희 정권의 민족적 자세를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1962년 5월25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4장 l9조 부칙으로 된 불교재산관리법이 통과되었다.모든 불교단체의 등록을 의무화하고(불재법 6조) 불교단체 대표자의 취임등록을 강제하며(불재법9조) 불교재산 처분에 허가 및 신고(제14조, 제15조) 등은 불교를 정부가 직접 통제하겠다는 의도가 명확히 표출되는 것이고, 마치 승려들이 정부투자 기관에 취업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특히 불재법은 벌칙사항을 두어 승려들을 일반 잡범으로 취급하고 있다. 강제등록조항 제6조를 위반하거나, 불교목적 이외의 사업을 금지시킨 제8조와 주지동의 재산취득을 금지시킨 제10조의 규정에 위반시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하였다. 원칙적으로 제8조와 9조는 불교계내의 소관 사항이며 또 벌칙조항은 종헌 등으로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여기에 국가적인 강제력이 동원될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또 제9조 2항의 주지와 대표임원의 취임등록조항을 태만시하거나 재산 목록의 작성을 규정한 제14조를 위반시에는 근무를 태만히 한다는 이유로 5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여 임원 선출과 재산관리를 일일이 통제하고 있다.
불재법은 비구 대처간의 분쟁이 갈수록 심화되어감과 동시에 경내지 내에서의 요식 위락 영업행위 등으로 불교의 재산과 자율권이 황폐화되어가는 시기에 제정되었기에 불교계 일각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또한 총무원장이나 주지의 권한을 법률적으로 보장해줌으로 해서 비구승에 의해서 조직된 대한불교 조계종이 자리잡아 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일견 불재법은 불교정화라는 차원에서 대단한 기여를 한것 같으나 실상 정치권력이 불교에 깊숙히 개입함으로 해서 불교의 자율적 발전은 크게 제약되는 비극적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불재법이 통과 공포된 이후에 단일종단에 의한 등록이 강제되었으나 2년여가 경과된 후에도 여전히 200여 사찰이 미등록 상태에 있었다. 또한 불재법 제정의 강력한 명분중의 하나였던 경내지 정화가 지지부진하자, 문교부는 불재법의 행정권 집행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1964년에 전북도 교육청에서 불재법의 경내지 책정(불재법 제5조)에 대한 질의서를 낸바 있는데
문교부는 그 답변서에서 불재법의 시행을 위해 강력한 행정력을 발동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또한 64년 8월11일에도 불재법에 의거하여 등록을 필한 ‘대한불교 조계종’ 및 산하 본말사 이외에는 어떠한 불교단체도 합법적인 단체가 아님을 확인하면서 대처측의 한국
불교 조계종을 불법단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비구측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던 불재법은 그 명분을 빌미삼아 전불교를 옭아매는 악법임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1965년에도 다시 사찰등록과 경내지 정화를 법대로 강력히 시행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고, 사실상 불교는 그 자체가 문교부의 소관사항으로 점차 규제되어 갔다.
1967년 3월17일자 일부 일간신문에 당시 문홍주 문교부장관의 불교재산관리법 철폐 발언이 크게 보도되자 종단측의 반발이 격심하였다. 문 문교장관은 ‘불재법은 비구 대처분쟁의 씨’라고 지적하고 ‘현 비구승단에는 급조된 사이비승과 시정의 불량배들이 많이 끼어
있다’라고 발언함으로 해서 종단은 크게 반발하여 그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문 홍주는 자신의 발언이 전혀 사실무근이며 오보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이러한 해프닝은 당시 종단이 얼마나 정치 권력에 종속화되었으며 불재법의 기본성격과 독소조항에 대해서 무지하였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관리들의 승려 불신이 매우 심화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1968년, 문화공보부는 그해 12월31일까지 사찰재산의 통제 감독을 강화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1969년 11월 I일부터 10일까지 실시된 사무감사 결과, 조계종 총무원은 현재 불교재산관리에 심각한 헛점이 있음을-그동안 불교계가 현대화의 길을 외면하고, 태의연한 봉건적 인사 재정체제에 안주함으로서 불교발전의 심각한 장애가 되었음-발견하고, 정부차원이 아니라 불교 자체내에서 재산운영의 내실화를 위한 자각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이와 같이 불재법이 정착되어가는 시기라 볼 수 있다. 경내지 정화 비구 대처분규 종식이 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등장한 불재법은 점차 불교를 외부에서 간섭관리하는 주도구로 변질되어감을 볼 수 있다. 박 정회정권이 점차 경색되어가면서 불재법 또한 강한 통치수단의 하나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문공부는 1970년 2월9일 전남광주시장에게 증심사 관리 계획을 마련, 종단 및 각도와 협조, 사찰카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그 명분을 사찰소유 재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함으로 해서 불재법의 목적달성과 사회문화 향상에 두었다.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교재산은 ①소속사찰의 주지 ②불교를 위한 사업집행 ③기본재산(부동산)과 기타 재산(사찰수입) 등으로 구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0주요방침 :
①사찰별로 소유 기본재산 실태조사
②미등기 재산에 대한 등기이행 촉구
③사찰별 기록카드 작성
④풍치및 존엄상 필요하다고 관할청에서 인정한 사찰소유의 임야
⑤도시계획 기타 국가목적상 수요의 경우
⑥불재법 8조에 따른 교육 자선 구호, 포교등 불교목적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업⑦영립계획이 수립, 인가된 것
문공부는 또한 재산처분과 관리과정에 있어서는 종단 및 지방관할청의 감독을 강화키로 하였다. 문공부는 이와 더불어 문화재 보호대책의 일환으로 사찰문화재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총무원은 이에 적극 협조, 문공부와 더불어 전국 사찰 실태조사에 나섰다 .

이러한 사찰재산관리계획은 불교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으로써 마치 정부가 불교재산의 관리인처럼 행세하게 되었고, 불재법은 경내지 정화나 분쟁의 종식이라는 초기의 명분 대신에 본격적으로 불교의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하였다. 증심사 전 주지, 박 형선, 허 동 등의 사찰재산 처분권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하여, 신임 주지스님이 그 수습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때 취한 행동으로 총무원은 즉각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회를 주장하였다.
총무원은 분규 우려나 불상사가 없는 사찰을 분규사찰로 인정, 불재법 부칙 제3조를 도용하여 종단에 사전 통보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월권행위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불재법의 독소조항의 하나인 부칙 제3조의 강압적인 시행이 유발한 것으로써 총무원이 이에 전적으로 반발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부칙 제3조 ①문교부장관은 불교단체가 법령에 위반하거나 분규로 인해 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정한 때에는 본법 제9조 제 1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당해 불교단체의 재산관리인을 임명할 수 있다.
이 조항은 불교의 자율성을 크게 침해하고 사유재산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써 위헌적인 독소조항인 것이다.
1970년 8월28일 대통령령 제5307호로 개정된 불재법 시행령은 불교간섭을 더욱 세분화한 것으로써, 정부의 불교간섭은 더욱 확대 심화되었다. l975년에 또다시 개정된 바 있는 동 시행령은, 불교단체의 제반 권한사항을 지방자치 단체장에 위임할 수 있는 조항(제3조)을 비롯하여 불교단체의 등록이나 주지, 대표 임원의 취임등록시 각종 서류의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제4·5조) 그리고 재산관계로는 제7조, 재산목록의 작성방법, 재8조, 재산증감 이동사항에 대한 사항, 제9조, 수입지출예산 및 결산서의 작성 둥을 규정 불교재산의 파악을 용이하게 하였다. 제10조에서 비치장부의 제반사항을 규정하여 불교재산의 증감, 이동상황을 철저하게 파악하도록 하였다.
시행령은 주로 임원등록과 재산파악에 관계되는 것으로써, 불교의 전반적인 재산과 재산관리인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1970년 9월, 문공부 지시라 하여 “사찰관리개선지침”이 시장, 군수로부터 각 사찰에 송달되었다.
이것은 종단내 6백개 사찰은 문공부가 그 나머지는 지방관할 관청이 직접 감독한다는 것을 주 골자로 한다. 또한 사찰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후원회에서 헌납한 찬조금은 시장 군수가 공동 관리키로 하였고, 사찰환경 정화를 목적으로 승려의 노력 봉사를 동원하고 승려의 문화재 보수기술 습득을 의무화시킨다고 하였다. 문공부는 이외에도 수시로 사찰관리 실태조사를 실시, 부실주지를 적발하여 종단에 종용, 해임케 하고 종단이 불응할 시에는 시장 군수를 사찰 관리인으로 임명한다고 협박하였다.
이러한 “사찰관리행정지침”은 불재법이 기본적으로 불교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을 그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불재법은 수시로 정부의 불교간섭을 가능케 하는 기본축임이 확실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