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월이 시작되면서 학교의 강의도 시작되고 있다 새마음, 새 기분으로 학생들을 대하지만 언제나 흡족한 내용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은 주저하는 내용도 있고, 반복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강의 과목자체가 같은 원인도 있지만 역시 식견이 짧아서일 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것을 전달하려는 욕심도 있고해서, 이럴 때 느끼는 것은 자신의 무지이다. 논어(論
語)에 나오는 무지임을 아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아는것이라는 그러한 무지가 아니라 그저 모르는 것이 많다는 말이다.
여기에 비견해서 보시(布施)를 생각해 본다. 남에게 베풀 때 무조건 베푼다는 것도 전부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조건을 붙여서 보시하는 것도 역시 걸려서 베푸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무주상 보시(無住相 布施)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말하자면 분명히 무엇 때문에 베푼다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겠지만 이 이유를 만드는 것 자체가 머무는 것이 되어서 순수한 의미의 보시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고 믿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라든지 사랑하는 사람이 애인을 생각하는 것 등은 무슨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고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대하는 것도 없고, 되돌려 받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그저 서슴없이 주는 것이다. 오히려 더 없어서 못주는데 마음이 아픈 것이다.
효(孝)로 말하면 불교에서는 지은보은(知恩報恩)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먼저 부모의 은혜를 알고나서 보답해야 한다고 설한다. 흔히 은혜를 알지마는 피상적으로 알거나 극히 일부분만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보답만 하고 다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돈으로 하는 사람, 여행으로 하는 사람, 말로 하는 사람 등이 있지만 정말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해주는 것(法布施)이 진짜 효인 것과 같이, 보시를 하는데 있어서도 보시에 관한 바른 이해가 있고 나서 베풀어 주어야만이 그 가치가 빛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는 자도 청정하여야 하고, 받는 자도 청정하여야 하며 중간에 건네지는 물건이나 계약 등도 부정하지 않는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三輪消伊) 우리는 지금까지 부족한 자에게는 주는 것이 최상이고, 외로움을 느끼는 자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올바른 보시로만 알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확히 알고 나서 주는 것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맹목적이거나 동정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길을 가다가 길거리에 앉아 있는 어린 거지에게 누가 동정을 하지 않을까마는 그렇다고 함부로 막연히 동정만해서 동전 몇개를 준다고 해서 올바른 보시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위안해서 좋은 일을 했다고 자랑한다면 정말로 큰 착오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함부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전 몇 재로 스스로 위안하는 보시라는 것은 이름이 보시지 주지 않는 것만 못하다. 진정으로 그 어린애를 생각한다면 그 애가 요구하는 근본문제를 해결해 줄 때 자연히 없어지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가정문제를 해결해 준다든지, 아니면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해준다든지, 아니면 양자로 삼는다든지 하는 행위 말이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어린애는 하루에 동전 몇 개로 만족을 하면서 일생을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고 이렇게 영원한 거지를 만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애의 잘못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사회 또는 함부로 동정을 베푼 사람들의 탓도 있다. 정말로는 그 애로 하여금 자립할 수 있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최상의 보시이기 때문이다. 거지뿐만이 아니다. 갑자기 불행을 당한 친척이나 친구, 사업을 하다가’일이 여의치 않아 좌절하고 있는 이웃에게 동정도 좋지만 자립할 수 있도록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더 휠씬 좋은 약이다. 사람은 먼 데를 보면서 살아가야 한다. 가까운 눈 앞만 보다가는 항상 조급함 때문에 이성을 잃기 쉽다. 한번쯤 긴 숨을 들어 마시고 눈을 감으면서 명상도 해보아야 한다.
한적한 숲이면 더 좋고 넓은 법당이면 금상첨화다. 온정이 었는 배려는 설탕 맛이 아니라 차 맛이다. 오히려 큰 것을 찾아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항상 지도·격려할 때 그 빛은 한량이 없는 것이다.
통 자기 시간 뿐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만큼 나의 시간은 반감된다. 내 시간을 내가 가져야 하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거의 다가 제 시간을 허송 세월하고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급히 서두는 것만큼 문제는 반비례해서 더 어려워 질런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이 위급하게 원조를 청했다고 해서 덩달아서 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다. 잘못하다가는 큰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방법은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한한 방법을 찾아서 제삼자의 입장에 서서 냉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서로간에 나중에 원망하는 말을 안듣기 위해서다. 단견을 가지고 베푸니까 결과가 서로에게 피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시간이 걸려도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인연이 없어서 못하면 다음 생에서 한다는 마음으로 차분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도움을 받고자하는 사람은 대개가 서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줄 것이 아니라 뻿기도 하고, 혼도 내주고, 타이르기도 해야 한다.
주는 것이란 이러한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항상 남의 도움만 바란다든지 남한테 물어서만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때로는 일부러 도움을 주지 않을 때도 있어야 한다. 그 끊는 마음이야 오죽 할까만 그래도 그 사람을 위해서는 끊을 때는 끊어야 한다. 의지가 약하거나 확신이 안선 사람은 항상 헤맨다. 더구나 그 대상이 나의 분신이든지 사랑하는 사람이든지 성년의 사람일 때는 더욱 그렇다. 20세 이상인 남녀는 성년으로서 이제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몇 번은 좋지만 계속되는 것은 금해야 하고, 또한 주위에서 그렇게 되기를 관심을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 불교는 자각의 종교이고 실천의 종교이다. 때문에 의지가 없는 삶이란 죽음과 같다.
옛날 중국에서 앙산(仰山) 혜적(慧寂)선사가 향엄(香嚴) 지한(智閑)에게 안목을 열어 주기 위하여 끝까지 선리를 말하지 않았던 것은, 지한도 능히 참구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며, 사실 후에 지한은 대나무를 치는(擊竹) 소리에 깨쳐서 견성하고는 앙산이 있는 곳을 향하여 진심으로 감사했던 것과 같이, 우선은 오해도 받고 의심도 살 수 있지만 궁극에는 그것이 자기를 위한 깊은 배려였다는 것을 알면 오해는 금방 풀리는 것이다. 정이 있는 배려는 설탕 맛이 아니라 차 맛이다. 신속한 응답이란 내가 안해도 되는 사소한 것이다. 오히려 큰 것을 찾아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항상 지도·격려할 때 그 빛은 한량이 없는 것이다. 의심이 크면(大疑) 크게 깨친다(大悟)고 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나 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항상 관심을 가지고 대하면 언젠가는 다같이 원만한 경지에 다 같이 이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이 관심이다. 좋은 감정도 관심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관심은 증오심까지도 말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좋다는감정이나 싫다는 감정은 다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증오심도 그 감정이 어중간 할 때는 증오심으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지만 철저히 증오하여 나쁜 감정이 다 없어져 버리면 이제는 증오가 애정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심을 크게 하는 것과같이 증오심도 크다 보면 언젠가는 사랑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볼 때 오늘날에 있어서의 보시란 가난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고 외로운 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베품이 단순히 동정적이거나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져서 완성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그 사람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언 ·충고·책려하는 것이 좋으며 거기에는 꾸준한 관심이 요구된다. 관심은 사랑을 낳을 수 있지만 무관심은 단절을 낳아서 무서운 재앙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있어서의 보시란 관심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