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시라는 것
원래 보서(dana;offering)란 베풀다(DA;give, impart)의 의미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나누어 주는 행위를 매우 중요시한다. “주기 전에는 마음이 기쁘고, 줄 때에는 마음이 맑아지며, 준 후에는 마음이 즐겁다”고 한 경전의 교설같이 기쁜 마음으로써 베풀어지도록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베품의 정신은 반드시 기쁜 마음을 가지고 실행되어야 한다는것이다.
구런데 거기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왜 보시에 그같은 태도가 있어야 하느냐이다. 이에 대해선 보다 넓은 종교적 윤리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공동체 구조 안에 사는 모든 구성원이 한결같이 평등하게 물질적 혜택을 누린다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데,
계급분화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줄곧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두드러진 격차가 심해졌던 것이다. 그 원인은 잉여물의 비대에서 남을 부리게 되고 나아가 남을 지배하면서 철저하게 있는 혐의 횡포가 심해졌을 뿐 아니라 그것의 극대화는 전쟁이라는 사건에서 더욱 가중되어 인류사는 진행되어 온 것이라는데 있다. 있는 자의 횡포와 없는 자의 피해와 한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기정 사실화된 당연지사로 여겨져 오고 말았다. 이제는 소수의 있는 자가 다수의 없는 이들을 이성의 간계(奸計)로써 속이고 지배하는 피라미드식 사회생활 구조를 정착하면서 전체적 인간 삶은 부자유스럽고 불평등하고 비평화적인 고통이라는 것이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의 사회적 관습제도화와 그 타당성을 인정하는 우상화 작업은 곧 다수의 민중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고통거리로 임하고 말았다.
종교마저 그들의 소수지배자들의 이익 옹호를 위해 잔혹하게 정치화되면서 군림교의로 일반 서민의 고통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세존 당시엔 그같은 종교적 부패상은 너무나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바라문교는 제사 (yanna)라는 주술적 공희(供犧)를 통해 엄청난 민중의 재물을 착취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강력히 반대하여 일어난 반주술적 정신이 공동체의 고른 삶을위해 보시로 표현하는 자비 즉 불해(不害 : ahimsa)를 바탕으로 하는 불교를 낳게 하였다.
“풍성한 큰 공희도 베푸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크고 비용 많이 든 제사라도 바른 사람의 보시에 비해 가치가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수천 번이나 제사를 지내더라도 이같은 〈바른〉보시의 16분의 1에도 가치가 없음은 뭐 때문인가?”
이같은 불교의 교의는 그 본래적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바라문교의 소수 지배횡포 착취자들의 신비적 주술성을 배제하고 나선 세존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공동체의 공동 삶의 유지와 합리적 인간 윤리 질서를 수수법의 한 실천으로 강조하셨다.
“광야를 여행할 때의 길동무 같이, 가난한 가운데에서 나누어 주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법이다”고 하였듯이, 외로운 인생의 여로에 있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보시는 연기적 불해(不害) 정신 위에서 이루어지는 생존조건이다. 보시행위를 통해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고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인적 생명 존중과 더불어 사회적 연대의식을 반영한 존재방식의 하나인 것이다. 불교는 그래서 인간고통의 제거와 삶의 행복을 위해 폭넓은 보시를 권장하는 것이다.
2. 보시의 성립조건과 현대적 역할
그러면, 그러한 보시행위는 어떠한 조건을 갖는가? 보시가 원만히 성립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며, 그것의 현대적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
보통 보시행위에는 주는 자, 받는 자 물건이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그 3자는 반드시 깨끗한 마음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기쁜 마음과 충족을 가져와야 하므로 싫은 마음과 불만족을 초래해선 안된다는 인간 감성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시행위에는 기쁜 마음으로써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로 보시의 근본정신은 노력 정진하여 부를 얻어도 자기 스스로 독점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남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책임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이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결국은 보시에 의해 사람들에게 복리를 나누어 줌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공동체 내의 삶을 평등하게 유지함으로써 두루 고른 인생 낙(樂)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공동체 의식을 전제로 하여 함께 고통과 기쁨을 나누는 선상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너〉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연기론적 수수관계와 존재좌표에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 쉽게, “훌륭한 사람(settho purisapuggalo)은 법에 따라 얻은 부를 그릇되게 흩으리지 않으면서 노력정려하는 사람에게 베푼다. 그는 최상의 생각을 하는 자이며,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다. 기쁜 곳(bhaddakam thanam)에 이르며, 이를 행함에 우울함이 없다”고 하여, 인간의 마땅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결과는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행위에는 공동체 의식이라는 동고동락의 일체감 위에서 기쁜 마음태도로써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고로 재가자는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여 부를 얻어서 그러한 보시행위를 할 수 있을지라도, 일체의 생산활동을 금지 당한 출가 사문들은 어떻게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기쁜 보시를 행할 수 있겠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출가자는 물질적 보시를 할 수 없으므로 그 대신 거기에 버금가는 정신적 보시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법시」와 「무외시(無畏施)」를 베품으로써 물질보시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원만한 상호부조적 수수관계는 곧 출가사문들의 진정한 본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지성인으로서 민중의 지팡이가 되고, 물질이 결코 정신과 다르지 않다(色心不二)는 실천적 일체감과 사랑을 느끼는 삶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격언처럼 진정한 정신교양의 고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곳곳에서 설하고 있다.
따라서 출가자는 정신적 수련에 게을러서는 마땅히 남의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일하지 않고 먹는 무리라고 사회적 힐난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 물질적 생산 이상의 정신수행이나 덕망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것이 적당한 성숙을 맞이하면서 비로소 재가자의 물질보시와 출가자의 정신보시가 상응하여 서로가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에 어긋나는 출가자의 보시행위는 아무런 의미가치를 짓지 못하고 만다.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된 사기며 혹세무민의 행위이다. 그래서 시주은은 무거운 것이다.
만약 정신적 보시가 불충분하면 연기적 불해의 관계에서 반드시 노동으로써 갚아야 한다. 이 점에서 출가자의 노동 금기사항은 폐기되어야 할만하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농일치의 정신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