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사암들은 한국불교, 특히 사원은 그 어떠한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우리라는 비관적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그만큼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었고 또한 이 땅 이 역사의 현장 속에서 역할이 크게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었다.
정말 이 땅의 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갈망하는 바 크다.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도 컸던 것이고 무엇보다 이 땅의 민중들은 역사의 구조적 질곡 속에서 받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가혹하기 때문에 위대한 해방의 힘, 뜨거운 사랑의 귀의처인 불교에게 그 목마른 구원의 간구가 컸던 것이다.
민족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무려 반세기 이상을 일본제국주의와 맞싸운 우리 민중은 드디어 8·15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그 해방의 귀결을 저 간악한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매판세력들에 의해서 민족분단이라고 하는 민족사 최대의 파란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에 우리 민중은 다시금 압제의 굴레에서 신음하게 되었던 것이고 아직까지 민족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완전한 민족의 통일과 해방을 위해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 현재까지의 모습이다.
그러나 , 우리 불교는 고통받는 이 땅의 민중에게 무엇이었던 것인가를. 이 민족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어떠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 불교는 너무나도 이 땅의 민중들에게 기여한 바가 부족하다. 물론 그러한 비판 속에는 이제까지의 불교 존재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리라. 어떤 의미에서는 8·15해방 이후 물밀듯이 밀려드는 외래문화와 사조, 그리고 우리에게는 분명히 적대적인 외세에 대한 최소한의 힘의 한계에 의한 최대한의 방파제적 역할로서의 불교의 존재성을 부정하여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야말로 이 민족 정신의 보루로서 또는 원형적 근거지로서 전통이 있고 역사 속에서의 다양한 양태로 민중생존과 민족존립의 토대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의 불교에 대하여 가혹한 자기비판을 가하는 것은 그만큼 민족적 구원의지로서의 불교존재에 대한 원망(願望)과 아울러 역사적 사실로서 분명히 그러한 민족구원의 존재로서의 자기역할이 불충분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눈 뜬다. 아니 우리의 불교에 대한 인식의 눈이 아니라 우리 불교 자신이 눈을뜨고 있다. 다시 기지개를 켜며 웅얼웅얼 저 대륙을 울리듯이 지축을 뒤흔들며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것이 지난‘9·7해인사 전국 승려대회”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이제까지 잠자는 듯 썩은 듯 쥐죽은 듯 하던 불교는 절대로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중진 대덕스님, 종단집행부와 각 교구본사 주지 스님과 대중 스님들, 연세 높으신 비구니 스님들에서부터 청아한 학인 비구니 스님들, 형형한 눈빛의 소장 비구 스님들과 가야산 높은 하늘빛을 닮은 청년 스님들, 전국에서 운집한 2000여 스님네들은‘분명 한국불교의 새로운 태동을 알리는 역사의 소리를 만들어 냈다.
불교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민중의 종교였고 그 해방과 구원의 종교였다. 어떠한 정치 권력이나 불의의 집단에 타협하거나 구속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로지 민중의 이익과 행복 그리고 고통에서의 해방을 위한 역사적 불사에 진력함으로서 그 의미와 보람이 있었다.
그러한 우리 불교가 언제부터인가 안으로 자신을 좀먹는 자들에 의해서 본래의 자비의 손길, 파사현정의 자비의 실천력이 무디어지고 밖으로 불순한 권력의 개입으로 인하여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잃게 되고 드디어는 억압의 사슬을 감수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번 해인사 대회에서 완전히 부정 극복되었다.
“불교재산관리법 즉각 철폐하라!” “불교관련 제악법 전면개정하라!” “10·27법난 공개 사과하라!” “불교탄압 중지하라!” 등의 불교를 침해하는 정치권력의 모든 행위와 의도 그리고 그 과정과 실상을 낱낱이 폭로 공개하면서 일제히 성토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단결과 화합의 열기 속에서 모악산 금산사에서 오신 지광 스님은 전체 불교도와 스님네들의 정신을 대표하여 당신의 손을 당신 스스로가 4개의 손가락을 짤라 단지공양(斷脂供養)을 거행하셨다. 그 뜨겁게 솟아나는 붉은피 튀어오르는 손가락으로 「불자여 깨어나라!」는 법문을 주셨다. 이야말로 위법망구의 대승보살이요 자비보살의 실천행으로서 모든 대중 스님들을 벅찬 법열의 충격과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그 이후 전국에서 오신 모든 스님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현정권의 부당한 불교탄압과 민중탄압을 규탄하고 외세에 대한 결연한 자기자세를 다짐하였다.
오늘의 한국불교의 부정적 측면은 첫째로 노동의 철학과 실천이 결여된 관념적 사유와 생활에서부터 파생되고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확보하고 그 의미를 세울 수 있다고 한다. 노동을 통한 자기 창조야말로 존재의 근거라는 의미이겠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세계와 사물과 대화하며 역사를 건설하고 사회를 개진 발전시키며 보다 나은 사회와 삶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불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인식의 결여 내지는 전도된 의식 속에서 삶이란 한낱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한다든지 역사적이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보변법계(普 法界)의 공간 속에 무화(無化)시켜 버림으로써 그 주체성을 거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써 인간의 인간됨으로써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망각하였고. 그러한 전도된 불교관에 의한 왜곡의 행위로서 구체적인 역사의식 사회의식 민주의식 둥의 구체성을 거세하는 비불교의 논리를 고수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둘째로는 그러한 노동의 철학과 행동의 결여와 아울러 그것의 구체적인 민중과 실천의 현장인 민중의 삶을 외면하고 거부하는 잘못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본질에 다름 아닌 불타의 구세원력과 보살의 대행대비는 결코 경전 속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닐 터이고 산간의 사원 속의 주문(註文)에만 갇혀 있을 턱이 없다. 중생이 없는 부처는 있을 수 없다고 하듯이 민중이 없는 보살의 자비의 구원의지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철학성의 결여와 민중성의 결여는 바로 그것의 상관성으로서의 실천의 관념성 내지는 관념적 실천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앞에서도 거론한 바와 같이 불보살의 자비로서의 민중에 대한 지향과 그것의 지향을 낳게 하는 철학 그 철학의 시작과 끝은 바로 실천인 바 이 실천의 역사적 결여야말로 현재의 불교의 실상을 보여주는 가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완벽하고 궁극적인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념적 변태야말로 이제까지의 불교를 비역사적 비민중적 비현실적인 불교의 한 측면을 분식하였던 것이고 이러한 태도는 끝까지 민중을 기만하고 불교를 빙자한 자기기만과 자기만족의 저의를 관철하겠다는 태도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극히 관념적이고 비실천적인 완벽의 논리는 차라리 사마외도의 적나라한 사악한 모습보다 오히려 더 반불교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제 한국불교는 「9 ·7해인사 전국 승려대회」를 계기로 하여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제까지 미처 다하지못한 중생의 해방과 그 세계의 완성을 위하여 이 민족 가운데 다시 태어나 그 본래의 모습을 이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 거듭 창출할 것이다.
이 땅의 민중은 모든 외세의 억압과 수탈 그리고 간섭에서 벗어나는 자유 자립의 실현이 시급하다. 그리하여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분열된 민족 이질화된 모습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분단의 구조 분단의 논리에서 파생된 반민주적 제반 모순의 질곡을 타파 극복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 영역에서의 전면적인 질서재구성과 해방의 실현이 요구되고 있다. 때문에 진정 민중의 종교 민족의 종교 세계구원의 인간의 종교인 불교는 위와 같은 민중의 고통을 해방하는 과제를 다하는 데서 그 새로 남을 추구해야 할 것이며 민중의 숨결이야말로 자신의 본래의 맥박임을 자각함으로써 그 존립의 근거와 앞으로의 존재의미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거듭 태어나는 불교는 결코 민중을 기만하거나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앞으로의 발걸음은 얼마나 민중에게 뒤진 자신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할 것이며 마침내 민족이 자신임을 보게 될 것이며 민중의 노래가 자신이 부르는 노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불교가 이 땅의 민중과 함께 가는 길은 이제까지의 그러한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만족적 태도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결코 자기집단의 이익에 연연하거나 매몰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진정으로 자기의 모든것을 다 버렸을 때 민족은 불교를 다시 탄생시킬 것이다. 민중과 함께 하는 길, 민족 가운데서 거듭나는 길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최상의 열반의 길일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이 해방된 세계이기 때문이다.